상곡에서의 전쟁

2021. 3. 17. 01:26언어와 유전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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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開 : 秦開는 燕의 昭王(B.C.311~B.C.279) 때 賢將으로 東胡에 人質로 가서 있다가 돌아와 東胡를 征伐하여 千餘里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史記』「匈奴傳」에는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거의 같은 內容을 傳하면서 『三國志』「東夷傳」韓條에 引用된 『魏略』에서는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라고 攻取한 領域에 대해서 千餘里나 차이가 나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것은 秦開가 정복한 東胡와 朝鮮의 位置를 비정하는데 문제점이 된다.
≪參考文獻≫
『史記』卷110「匈奴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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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너무 중요한 것은 한단고기 자료인데,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

무인 54(BC343) 상곡(上谷)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造陽)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임승국 주해, 정신세계사, 117쪽-

 

 

 

진개의 침공 이전에도 상곡(上谷)에서의 전쟁은 계속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상곡까지도 우리 영토 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곡,어양,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했다고 하니

진개의 침공 이전에는 위 땅이 모두 우리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고구려 모본왕때, 어양, 상곡, 우북평을 습격할 수 있었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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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상곡(上谷), 태원(太原)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 삼국사기에 적어 놓아도 딴소리 하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우북평 탐구 자료

우북평군 右北平郡(한서지리지-유주)

[출처] 우북평군 右北平郡(한서지리지-유주)|작성자 어이무사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