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이 유행한 배달나라 시대에는 문자의 글씨체가 발전했다!

2010. 3. 2. 15:14천산사부님 국사 강좌

학문이 유행한 배달나라 시대에는 문자의 글씨체가 발전했다!녹서, 용서, 화서, 우서, 과두문, 조족문!!!

2010.02.27 12:11 | 역사수필-하늘나라(天國) 한배달조선과 천하 천자국(天子國) : 철학(정신문명)과 과학문명과 정치문화 등 | 天山歷史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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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자의 6서체와 6서법

한자의 6서체를 대전, 소전, 예서, 해서, 행서, 초서라 한다.

한자의 6서법을 상형, 지사, 회의, 형성, 가차, 전주라 한다.

대전, 소전,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의 서체는 은나라 갑골문과 주나라 금문(종정문) 이후에 생긴 글자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2. 배달나라의 6서법과 여러 서체

그런데, 한자의 글자를 만드는 법은 은갑골문보다 이미1,000년 이전에 정립되었던 것이 된다. 그리하여 6서법이 정립된 때에는 이미 주나라 이후에 생긴 6서체처럼 글자모양이 발전되었으며, 학문이 융성하던 시대였다.

녹서는 배달나라 초기에 사슴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사슴발자욱을 보고 사슴을 나타내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어 사물을 나타낸 글자인데, 사슴의 뿔모양으로 된 글자가 된다.

이 녹서의 영향으로 후대에 글자의 서체가 발전하였는데, 서기전3500년경에 대학자이던 태호복희가 용의 형상을 본따 글자를 만든 용서(龍書)가 있었고, 서기전2700년경 배달나라에는 학문이 더욱더 융성하여 꽃모양의 글자체인 화서(花書)가 있었으며, 배달나라의 대학자이던 광명왕 자부선인이 비가 내리는 모양을 본따 우서(雨書)를 만들었으며, 당시 배달나라의 동쪽지역의 제후이던 창힐이 배달나라의 문자를 배워 새의 발자욱 모양을 본따 조족문을 만들었으며, 또한 창힐이 올챙이 모양을 본따 과두문을 만들었다라고도 한다.

즉 이러한 글자체와 6서법이 정립된 것을 고려하면, 이미 배달나라는 글자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사실로 보아 학문은 말할 수 없이 융성하였으며 발전된 상태였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특히 서기전2700년경 자부선인은 1주일 달력이 되는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이라는 책력을 만들었고, 도를 어겨 전쟁을 일으키던 헌원에게 삼황내문경이라는 종교철학서를 전수하여 도로 되돌아 오게 하여 배달나라의 진정한 신하가 되게 하였던 것을 볼 때, 체계적인 학문이 정립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서기전2700년경에 화서, 우서, 조족문, 과두문 등의 서체가 발전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글자를 이용한 학문과 예술이 발전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된다.

3. 단군조선의 상형표의 문자= 신전(神篆)

서기전2333년에 건군돤 단군조선에는 신전(神篆)이라는 상형표의 문자가 있었는데, 이 신전은 곧 배달나라의 상형표의 문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군조선은 배달나라를 정통을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이며, 영토상으로 갑골문의 나라인 은나라의 선대가 되는 황제헌원의 뒤를 이은 요임금의 나라는 배달나라의 제후국으로서 배달나라의 문명권에 속한 것이므로 은갑골문이 황제헌원이후 계승된 나라의 문자가 발전된 것이라면, 이 또한 배달나라 문자에서 파생된 문자가 되는 것이 된다.

순임금은 원래 단군조선의 신하로서 요임금을 치러갔다가 요임금에게 협조하면서 등용되어 섭정을 하게 되었고 결국 요임금의 뒤를 이어 천자가 된 인물인데, 서기전2267년에 단군조선과 순임금 간에 이루어진 도산회의는, 상국인 단군조선이 주관한 치수관련 회의로서 평등한 국제회의 차원이 아니라, 천국과 천하국 즉 상국(上國)과 제후국 간의 회의로서 단군조선이 천하를 다스리는 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일이 된다.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에서 단군조선의 태자부루가 사공 우에게 전수한 치수법을 적은 책과 홍범구주 등을 이르는 금간옥첩 또는 금간옥서, 신서 등에 새겨진 글자는 곧 단군조선의 문자이며, 이는 순임금이 쓰던 문자와 같거나 서체만 다를 뿐 같은 상형문자임이 틀림없는 것이 되며 단군조선의 신전 문자가 되는 것이다. 금간옥첩이라 불리던 책이 남아 있다라면 그 서체를 바로 알 수 있을텐데...금간옥첩(金簡玉牒)이 금판에 옥을 박아 글자를 만든 책이라면 지금까지도 충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보물이 된다.

만약 순임금이 요임금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므로 요임금이 그 이전부터 써오던 글자를 썼다고 하면, 요임금은 황제헌원의 나라를 이은 인물이므로 황제헌원이 항칭로부터 전수받은 조족문 또는 과두문을 쓴 것이 되는데, 이또한 배달나라의 문자로서 단군조선이 쓰고 있었던 문자가 되는 것이다.

4. 우가 세운 치수기념공덕비(소위 禹碑, 禹王碑, 大禹治水功積碑)에 새겨진 상형표의 문자 =과두문?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 당시 우(禹)는 순임금의 신하로서 사공의 벼슬에 있었다. 서기전2288년 순이 요임금의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소위 요순시대 9년 대홍수가 발생하였고, 서기전2284년에 섭정 순이 요임금을 유폐시키고 강압적으로 선양을 받아 스스로 천자가 되었으며, 서기전2280년에 치수담당이던 곤이 9년동안이나 치수를 완성하지 못한다고 책임을 지워 우산에서 처형하고, 이에 순임금은 곤의 아들 우를 치수담당인 사공에 봉하여 치수룰 맡겼던 것이다.

이후 우는 노심초사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22년간이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하게 되었는데, 결국 자허선인의 안내를 받아 순임금에게 단군조선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간청하게 되었고, 이에 순임금은 단군왕검에게 청을 올렸으며, 이리하여 단군왕검은 순임금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생각하여 치수법을 전수하여 주도록 태자부루를 사자로 파견하여 도산회의를 주관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처음 요임금은 서기전2357년 형 제지를 멸하고 스스로 제왕이라 하면서 독단을 차리고 마음대로 구주를 나누는 등 배달나라의 도를 어기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서기전2334년까지 3차례나 단군왕검이 섭정을 하던 나라를 기습침략하는 등 하여 결국 단군왕검이 순방하던 중 왕성을 점령하니 이에 홍제가 붕어하고 왕성을 잃은 단군왕검은 동북의 아사달로 무리800을 이끌고 이동하여 나라를 정비하니 구이들이 추대하여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였던 것이다.

서기전2324년에 나라를 정비한 단군왕검은 유호씨에게 명하여 요임금으로 하여금 도를 깨우치도록 하였고,  이에 유호씨는 환부의 직을 수행하던 장자 순, 차자 유상과 권사 등 100여명과 함께 군사를 인솔하여 요를 치러 가니, 이에 요가 굴복하여 황하물가에 유호씨를 대접하여 머물도록 하니, 이때부터 유호씨는 요임금의 소행을 감시만 하게 되었고, 이후 요임금은 유호씨의 아들 순을 마음에 두어 유혹하기 시작하였고, 서기전2314년에 순의 나이 30세에 등용하였으며, 서기전2294년 순의 나이 50세에 섭정을 맡겼던 것이다.

순의 신하인 우는 순임금의 명을 따라 서기전2280년부터 치수에 힘썼으나 서기전2267년까지 22년간이나 완성치 못하였고, 결국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에서 단군조선의 사자 태자부루로부터 치수법을 전수받은 후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우는 치수를 완성하고 자신의 치수경위와 태자부루의 가르침을 비에 새겨 세상에 남긴 것이 바로 소위 우비, 우왕비, 대우치수공적비가 되는 것이다.

우는 태자부루를 만나기 전에 3달동안 목욕재계를 하였다. 목욕재계는 신(神)을 맞이하기 위하여 치르는 의식이다. 태자부루는 천제 단군왕검이 보낸 천국의 사자로서 신과 다름 없는 것이 된다. 우비에서 나타나는 제(帝)는 우의 임금이 되는 순임금이 되며, 신(神)은 제(帝)의 위가 되는 천제(天帝)로서 천신(天神)인 것이다. 즉 우는 순임금을 제라 하였으므로 태자부루를 제(帝)보다도 윗자리인 신(神)으로 적은 것이다.

소위 우비에 새겨진 글자의 모양은 과두문 즉 올챙이의 모양을 본따 쓴 글자체가 되는데, 이 과두문은 역사적으로 서기전2700년경 창힐이 황제헌원에게 전수하였다는 글자라고도 하는 바, 역사적 근거로 볼 때 거짓말은 아닌 것이 된다. 즉 우가 치수기념공덕비를 세우면서 과두문으로 새겼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5. 과두문은 신전의 일종!

서기전2700년경에 창힐에 의하여 출현한 과두문은 배달나라를 정통으로 이은 단군조선의 문자가 되며, 곧 신전(神篆)의 일종이 되는 것이 된다. 서기전2700년부터 서기전2333년까지는 약360년 정도 지난 시기가 된다.

소위 금간옥첩, 신서에 새겨진 글자는 신전이 될 것이며, 과두문 또한 신전의 일종이 된다.  

하나라 문자는 은갑골문과의 관련성이 입증되지 않고 있으나, 소위 우비가 하나라의 문자라면, 은갑골문보다는 전시대의 문자가 되고, 이는 곧 단군조선의 초기 신전문자이며, 은 갑골문을 서체의 일종이라 보면, 단군조선의 신전과 은갑골문은 동일한 상형표의 문자로서 다만 그 글자의 모양이 다소 다를 뿐이며, 후대에 새로이 생긴 글자나 변형된 글자가 생겨 상통하지 못한 글자가 된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화폐가 되는 소위 명도전과 그 이전에 주조된 것이 되는 첨수도와 침수도에 새겨진 문자는 단군조선의 문자가 되며, 상형문자와 표음문자가 새겨진 것이 되는데, 특히 상형문자는 은갑골문과 유사한 것이 되어, 은갑골문은 배달조선의 상형표의 문자의 아류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즉 대체적으로 은나라 갑골문이 정립되어 단군조선의 문자와 다르게 된 시기 이전이 되는 요 순 하나라 시대의 고대중국은  단군조선의 문자와 동일한 문자를 사용한 것이 된다. 은나라가 서기전1766년에 단군조선의 천자국을 출발하였으나, 점차 폐쇄적인 정치를 하여 단군조선과 교류가 거의 단절되면서 문자의 형태가 달라진 것이 된다. 그래서 은나라가 망한 때인 서기전1122년경에는 은갑골문과 단군조선의 문자가 많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주나라 시대에는 단군조선과 주나라 백성들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서기전924년에 단군조선의 부여사람 왕문이 신전을 고쳐 부예(符隸)를 만들었고, 서기전221년경 진시황 시대에 정막이 부여에 다녀가면서 부예를 본따 예서체를 만들어 중국문자를 통일하는데 반영되었던 것인 바, 이후 중국의 문자가 한나라의 문자라는 뜻에서 한자(漢字)로 불리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한자(漢字)라고 부를지라도 원래 한자는 단군조선의 상형표의 문자이기도 하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바른소리(正音) 글자인 한글과 함께 상형문자의 뜻을 가진 참그림 글자로서 진서(眞書)라 하면 될 것이라 본다.

원래 "글"이란 말 자체가 "그림"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서 글은 원래 그림에서 나온 것이 된다. 즉 그림이 원조이고 글은 그림이 변하여 문자로 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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