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중국의 역사의 출발과 문자의 역사

2010. 2. 23. 10:07천산사부님 국사 강좌

1. 고대중국의 역사의 출발

소위 삼황오제라는 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헌원,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 제순의 시대는 배달나라 중기에서 단군조선 초기에 해당한다.

중국의 실질적인 시조는 황제헌원이 된다.

배달나라는 서기전3897년 갑자년 10월 3일에 개천하여 서기전2333년까지 이어졌다.

서기전3528년 태호복희가 배달나라의 한웅의 아들로서 우사(雨師)를 지낸 후 산동지역 진(陳) 땅에서 진(震)이라는 나라를 세우니 진제국(震帝國)이라 불리운다. 

서기전3218년 염제신농이 배달나라의 우가(牛加)를 지내고 태호복희가 다스리던 땅에서 나라를 세워 이으니 염제국(炎帝國)이라 불리운다.

2. 중국의 실질적인 시조 황제헌원과 문자 차용

서기전2698년 계해년에 헌원이 배달나라 제후국이던 유웅국(有熊國)의 왕 공손씨(公孫氏)의 후손 또는 아들로서 왕이 되었고 헌구를 중심으로 탁록에 걸치는 중원땅에 나라를 잡으니 웅국(熊國)이라 불리운다. 특히 헌원은 그 나라의 벼슬이름에 운사(雲師)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데, 아마도 배달나라의 운사를 지낸 인물로서 반란을 일으켜 치우천왕에게 100여회의 전쟁으로 도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치우천왕은 풍백과 우사에게 명하여 폭풍우로 황제헌원을 혼쭐나게 하였다라고 산해경에 전해 온다. 산해경의 기록에서 풍백과 우사 외에 운사라는 명칭이 빠져 있어서 황제헌원이 운사로서 난을 일으켜 천왕이 풍백과 우사와 더불어 토벌한 차원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10여년의 전쟁 후 황제헌원은 치우천왕의 명으로 자부선인이 가르침을 내려 삼황내문경을 전수하고 도를 깨닫게 하여 진정한 신하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가 서기전2688년경이 된다.

서기전2697년 갑자년에 치우천왕은 황제헌원이 난을 일으킬 당시에 먼저 염제국을 쳐서 유망을 퇴위시키고 그 아들 괴를 세우고 염제국 왕으로 봉하니 서기전2357년 단군왕검이 비왕으로 섭정하던 단웅국(檀熊國)으로 불리는 나라이다.

*유웅국(有熊國) : 서기전3258년경 소전씨(少典氏)가 강수(姜水)에 봉해져 유웅국의 시조가 되었고, 소전의 아들 신농은 다시 염제국의 시조가 되었으며, 소전씨의 다른 후손에 공손씨가 있고 그 공손씨의 후손이 헌원이 된다. 신농과 헌원은 520년정도 시대 차이가 난다. 유웅국은 웅국이라 한다. 즉 곰족의 나라임이 타나탄다.
*단웅국(檀熊國) : 단국과 웅국을 연결시킨 국명이 되는데, 배달나라 18대 거불단한웅의 배필이 염제국의 말왕인 홍제(洪帝)의 딸이며 단군왕검의 어머니가 된다. 단웅국은 단국인 배달나라와 곰족의 나라인 염제국을 함께 나타낸 국명이 된다.

황제헌원은 당시 배달나라의 제후이던 창힐에게서 문자를 배워갔으며, 이후 배달나라 문자를 쓰면서 문장언어가 발전하면서 언어로 고착화 되어 고대중국어가 출발한 것으로 된다. 배달나라에는 이미 상형표의문자가 있었고, 일부 상형문자에는 표음문자의 원조가 되는 상형-표음문자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ㅇ ㅁ 각의 모형은 상형문자가 되며, 이 상형문자가 . ㅡ ㅣ로 변형되어 가림토의 기본모음이 되는 것이다. 자음에 해당하는 문자는 단군조선 시대에 가림토38자가 정립될 때 . ㅡ ㅣ로 조합된 글자로 변형되어 정립된 것이 된다. 배달나라의 상형문자는 단군조선에 이어져 신전(神篆) 또는 진서(眞書==참글)이라고 불린다.

황제헌원이 항복하여 배달나라의 진정한 천자가 된 후 300여년 동안 거의 별다른 전쟁이 없이 평화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서기전2383년경 요가 출현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요는 서기전2382년에 도라는 땅에 봉해졌고, 서기전2357년에 웅국의 왕이던 이복형 제지를 쳐서 멸하고 무례하게도 제왕을 참칭하고 배달나라의 역법을 마음대로 폐하고 독단을 차려 명협이라는 풀에 의지하여 달력을 만들고 오행을 마음대로 악용하여 중앙의 왕이라 칭하였으며 땅을 마음대로 나누어 구주로 하였다. 이리하여 세상이 어지러워 졌는데, 서기전2334년경까지 요가 단군왕검이 섭정하던 단웅국을 세차례 기습침략하여 결국 멸망시키고 단웅국왕 홍제도 붕하니 당시 순방정치를 하다가 왕성을 잃은 단군왕검은 무리 800을 이끌고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하여 나라를 정비하니, 요를 제외한 모든 무리들이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으니 서기전2333년 무진년 10월 3일 조선을 개국하였던 것이다.

 세상이 어지러워 진것을 우려한 단군왕검은 서기전2324년경 유호씨(有戶氏)에게 명하여 환부, 권사 등 100여명과 군사를 이끌고 가서 요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이때 순(舜)은 20세의 나이로 유호씨의 장자로서 환부(鰥夫)의 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유호씨는 아들 순과 군사들을 인솔하여 황하 물가에 이르니, 요가 눈치를 채고 유호씨를 대접하여 머물곳을 마련하니 이후 유호씨는 단지 요의 소행을 감시만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요는 나라를 보존하게 되었고 단군조선이 인정한 천자로 되었던 것이다. 이후 요는 다른 목적이 있어 아버지를 잘 따르고 있던 순을 유혹하기 시작하여 10년후가 되는 서기전2314년에  순의 나이 30세에 등용하였던 것이며, 이리하여 순은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요에게 협조하게 되었다. 서기전2301년에 단군조선은 요와 순이 언제 반역할지 모르므로 방비하는 차원에서 요중(遼中)에 12성을 축성하였다.

*요중12성은 모두 지금의 난하와 영정하 사이에 있으며 번한의 서편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서기전2294년에 요임금은 순에게 섭정을 맡겼다.
서기전2288년에 9년대홍수가 발생하였다.

서기전2284년에 순은 요임금을 유폐시키고 천자자리를 찬탈하고 스스로 천자가 되었다. 아버지 유호씨는 순을 천자로 인정하지 않아 아직 순임금은 단군조선의 정식 천자가 되지 못하였다. 단군왕검의 사자이던 유호씨의 감시 대상이었던 것이다. 순임금은 마음대로 단군조선 직할 영역부근에 유주와 영주와 병주를 설치하였다. 유주는 지금의 북경근처로, 영주는 산동지역의 서쪽부근으로 된다.

*북경일대는 고죽국의 영역이 되는데, 아직까지 고죽국은 봉해지지 않고 중간지대였던 것이 된다.

서기전2280년에 순임금은 치수담당이던 곤이 9년동안 치수를 완성하지 못하자 곤을 우산에서 처형하고 그 아들 우(禹)에게 치수를 맡겼다.

그러나 우도 서기전2267년까지 치수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13년간을 노력하여도 치수를 하지 못하고 22년간 홍수는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우는 방법을 찾다가 자허선인(紫虛仙人)의 가르침으로 단군조선의 태자부루를 만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이를 순임금에게 간청하였다. 이리하여 순임금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단군왕검은 백성을 생각하는 순임금을 진정한 천자로 인정하고 진한(眞韓) 태자부루를 파견하여 도산회의(塗山會議)를 주관하게 하여 치수법을 전수토록 하였던 것이다.

*天子作民父母以爲天下王 : 천자는 백성의 부모가 됨으로써 천하왕이 된다.

서기전2267년 태자부루는 도산회의를 주관하러 가면서 번한에 반달간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하고 순임금으로부터 치수에 관한 보고를 받은 후, 번한을 대동하고 도산에 이르러 회의를 주관하고, 순임금의 사공 우에게 치수법을 전수하여 주어 이후 우는 22년간 완성하지 못하던 치수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때 도산회의에서 순임금이 마음대로 설치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단군조선 영역으로 편입시키고 병주는 그대로 두었다.

이때 태자부루가 우에게 전수한 치수법과 함께 건네진 홍범구주 등은 바로 단군조선의 신전문자로 쓰여진 것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서기전2267년경에는 아직 가림토38자가 정립되지 아니한 때가 된다. 가림토38자는 서기전2181년에 정립되었다.

서기전2247년까지 순임금은 20년동안 4회에 걸쳐 5년에 한번씩 순행하던 태자부루에게 당시 산동지역의 낭야성(가한성: 지금의 청도)에서 우공의 사례를 보고하였다. 이때까지 순임금은 단군조선의 진정한 천자로 있었다.

그러나 순임금은 서기전2247이후 다시 산동지역의 남국(藍國) 부근에 유주와 영주를 설치하였고, 서기전2241년에 단군왕검이 붕어하고 태자부루가 단군이 되어 서기전2240년에 순임금이 산동지역 다시 마음대로 유주와 영주를 설치하니, 2대 부루단군이 유주와 영주를 정벌하고 제후를 두었다. 아마도 이때 고죽국이 북경일대에 봉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죽국은 하나라 이전부터 존속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인데, 순임금 시대에는 아직 봉해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부루단군은 천자 자격이 없는 순임금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유호씨는 차자 유상과 치수에 공이 큰 우에게 명하여 순을 치게 하였다. 서기전2224년경에 결국 순임금은 창오의 들로 피하였다가 우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서기전2224년 우는 돌변하여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보수하더니 자칭 하왕이라 하면서 단군조선을 거역하였다. 이에 유호씨는 우에게 가르침을 내려 단군조선의 가르침 안으로 돌아오록 하였다. 그러나 우는 완강하게 거역하면서 마음대로 제후를 봉하고 조공을 받는 등 하면서 단군조선의 제도를 흉내내어 폭돌한 정치를 폈다. 이에 수만의 백성들이 우의 폭정을 피하여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도망하여 왔으며 이후 우는 국경을 봉쇄해 버렸다.

3. 고대중국 왕조의 출발과 문자

서기전2224년 우는 자칭 하왕이라 하면서 독단을 차리고 제후를 마음대로 봉하고 조공을 받는 등 단군조선으로부터 이탈을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단군조선의 사자 유호씨는 차자 유상에게 명하여 권사아 군사를 모으게 하고 우에게 가르침을 전하게 하였는데, 우는 완강하게 거역하고 전쟁에 돌입하였다.

서기전2189년경 우는 모산의 진중에서 전쟁중에 죽고 아들 계가 우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우도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전쟁으로 버티니 유호씨는 더이상 하나라 백성들을 깨우치지 불가능함을 깨닫고 군사를 물리고 오히려 서방과 인도지역으로 가르침을 펴러 떠나니, 유호씨의 근거지였던 감(甘)이라는 도시가 없어졌다. 이에 하나라는 모산에서 중원 땅으로 옮겨 하나라 왕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종교는 없고 오직 패도만이 존재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하왕들은 단군조선을 따르기도 하였는 바, 내놓은 자식처럼 겉모양만 천자로 인정된 것으로 된다.

하나라의 문자는 그냥 단군조선의 문자라고 보면 된다. 즉 신전(神篆) 문자가 된다. 신전문자는 은나라 갑골문의 원조가 되는 셈이다. 물론 하나라 때 새로운 상형표의 문자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하나라는 단군조선에서 이탈을 시도한 나라로서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독자노선을 걸은 왕조가 되기 때문에 독자적인 문자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은나라도 처음에는 단군조선의 천자국으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전쟁광의 나라가 되어 독자노선을 걸음으로써 그에 따라 독자적으로 만든 상형표의 문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문자의 형태가 단군조선의 문자와 달라져 결국 은문(殷文:소위 은 갑골문)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된다.

결국 하나라도 서기전1767년경에 이르러 망하게 되었는데, 걸왕이 폭정을 펼치자 하나라의 제후국이던 은나라의 탕이 군사를 일으켰고, 이에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자, 단군조선이 군사를 보내니 은탕이 사죄하므로 군사를 멈추어 회군을 하려 하였는데, 걸왕이 약조를 위반하고 회군하던 단군조선 군사의 앞길을 막자, 이에 단군조선은 은탕과 몰래 모의하여 걸왕의 군사를 치게 되었고 이에 걸왕은 남소로 쫓겨갔다가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단군조선의 군사를 구이(九夷)의 군사로 적고 있고,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이후에는 단군조선 본국을 동이(東夷)로 고쳐 적게 된다.

당시 구원군에는 고죽국이 큰 역할을 하였고 이에 서기전1766년에 은나라가 세워져 천자국이 되었는데, 단군조선이 번한은 고죽국의 묵태를 보내어 은탕의 즉위를 축하해 주었다. 즉 은나라는 천자국으로서 번한의 저 아래 단계에 해당하고 고죽국보다 낮은 단계의 나라에 해당하게 된다. 고죽국의 임금은 군(君)으로서 단군조선의 직할 제후국이므로 천군국이 되고 번한은 천왕격의 나라이며, 은나라는 천자국으로서 천군의 아래에 해당하는 나라이다.

천자의 아래에는 공, 후, 백, 자, 남이 봉해진다. 단군조선 시대의 군(君)은 천군을 가리키며, 처자보다 위 자리가 된다. 천군은 천상의 작은 임금으로서 천하의 왕인 천자보다 한 단계 위가 된다. 물론 천군이 천하의 지방에 봉해지면 천군국의 왕이 되는 것이다.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적은 것은 역사날조에 해당한다.

은나라는 서기전1766년에 세워져 서기전1122년까지 지속된다. 은나라가 단군조선의 후원으로 건국되어 단군조선의 천자국으로 출발하였으나, 곧 하나라의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쟁을 일삼는 나라로 전락하였고, 결국 폭정을 펼치다 서기전1122년에 제후국이던 주나라의 무왕에게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은나라는 처음 단군조선의 천자국으로서 출발하였으나 점차 전쟁광의 나라로 변하여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받지않고 문화교류가 단절되면서 독자노선으로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와 달라져 은갑골문, 은문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된다. 그러나 은나라 갑골문과 단군조선의 상형표의 문자가 동일한 글자체가 많았고, 교류가 빈번하지 않아 달라진 글자나 새로운 글자가 생겨서 상통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고 보인다. 서기전1122년경 은나라가 주나라에 망할 때 기자는 단군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때 기자의 사사이던 왕수긍이 단군조선의 삼일신고를 은문으로 고쳐 기자에게 주었다고 전해지는데, 은문과 단군조선의 문자가 상통하지 않았던 글자가 있었던 것으로 된다.

서기전1122년에 주나라가 건국되었는데, 이때 단군조선은 숙신을 보내어 무왕의 즉위축하를 해주었다. 즉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인정해 준 것이 된다. 이후 주나라는 대체적으로 단군조선과 관계가 우호적이어서 백성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러나 춘추전국 시대가 되면서 제후국들이 주나라 천자를 무시하고 패도가 판을 치게 되어 결국 전국시대에 제후들이 왕을 칭하면서 천자행세를 하니 도가 무너져 서기전249년 진나라에 의하여 주나라는 망하였던 것이다.

주나라 때는 이미 중국어가 고착화 되어 정립된 것이 된다. 은문을 계승한 주나라의 문자는 각 제후국들마다 글자의 형태가 다른 것이 많았는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문자도 통일시켰다. 주나라는 하나라나 은나라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단군조선과 백성들의 교류가 많았는데, 상형문자의 통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때 정막이라는 사람이 단군조선의 부여에 다녀가면서 서기전924년에 왕문이 만든 부예(符隸)를 본따 중국에서 예서체를 정립하여 통용시킨 것이 된다. 이리하여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의 문자와 중국의 문자가 크게 다르지 않고 한국이 중국의 한자를 수입한 적이 없는 것이 되며, 원래의 한자의 발음이 지금의 중국어에는 없는 ㄱ, ㅁ, ㅂ 등의 받침이 있는 단군조선의 발음이었다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고대중국의 왕조는 서기전2224년에 하나라가 시초이고 서기전1766년에 은나라가 서고 서기전1122년에 주나라가 섰다.

배달나라의 제후국이던 황제헌원의 나라를 이은 고대중국은 하나라로부터 왕조가 시작되었고,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이탈하기 시작하여 결국 진정한 왕도가 아닌 패도의 길을 걷게 되어 단군조선의 제후국과 주나라의 제후국이던 연나라와 제나라가 수차례 전쟁을 하였고, 서기전323년에 연나라가 왕을 칭하자 단군조선의 번한도 번조선왕이라 칭하면서 연나라를 방비하였던 것이고, 연나라가 서기전222년에 진시황에게 망하였으나 번한은 서기전195년까지 이어졌고, 서기전195년 한나라의 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노관의 무리였던 위만이 번조선에 망명하였고 이후 위만이 욕심이 도져서 번조선왕 기준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처음 단군조선의 번한은 지금의 영정하에서 발해만 유역을 다스렸으며, 난하의 동쪽에 있는 험독을 수도로 삼았고, 위만도 험독을 수도로 삼았다.  번한의 북쪽이 되는 지금의 내몽골지역에는 구려국이, 서쪽에는 고죽국, 남쪽의 산동지역에는 청구, 남국이 있었고, 구려의 동쪽이자 번한의 동북에는 진번이 있었으며, 진번의 동쪽에는 부여가, 부여의 동쪽에는 숙신이, 숙신과 부여의 남쪽에는 옥저, 졸본, 비류 등이 있었으며, 백두산의 동쪽에는 예국, 남쪽에는 개마국이 있었고 개마국의 남쪽이 되는 한반도의 평양에는 마한이 있었다. 번한관경에 속하는 고죽국, 청구, 남국과 마한을 제외하면 진한관경에 속한다. 즉 진한에는 구려, 진번, 부여, 숙신, 예, 옥저, 개마 등이 속한다. 서기전1122년 주나라 시대 이후에는 제나라가 산동지역에 자리잡으면서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청구, 남국, 엄, 회, 서, 개, 래, 양, 우 등의 나라가 주나라 제후국 제나라 등과 전쟁을 하였으며, 서기전909년경까지 청구, 엄 나라가 존속한 것이 되며, 이후 중국내륙의 8이 등 동이로서 기록되고 있다. 8이는 남, 엄, 회, 서, 래, 개, 양, 우이를 가리킨다. 청구는 산동지역의 중북부가 되며, 제나라가 산동의 북부를 차지하면서 청구는 천진 남쪽과 제나라의 서쪽과 태산 북쪽으로 그 영역이 축소된 것이 된다. 태산일대에 엄이가 있었으며, 제나라가 패자가 되면서 엄이가 사라지거나 축소된 것이 된다. 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에 산동의 남부에 건국되었다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 문왕에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으로 피하였다가 제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서기전512년에 결국 오나라 합려왕에게 완전히 망하였다. 그외 회이와 사이(泗夷)는 서기전221년경 진시황 때까지 존속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진시황이 주나라를 통일한 때 중국내륙의 동이는 모두 진나라에 흡수되었던 것이 된다.

중국의 문자사용은 서기전2698년경 황제헌원이 배달나라의 상형문자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었고, 서기전2224년경 하나라가 시작될 때까지 문자는 배달나라의 정통계승국인 단군조선의 문자와 같은 단군조선의 신전이라는 글자체였으며, 이후 독자노선을 걸어 문자의 형태가 달라지고 새로운 문자가 만들어진 것으로 되고, 이어서 은나라와 주나라를 거치면서 단군조선과 잘 통하지 않은 글자가 생긴 것이 되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문자를 통일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문자가 상통하게 된 것이 된다.

지금의 한자는 진시황이 중국의 문자를 통일시킨 이후 정립된 글자이며, 그 이전의 주나라 시대 제후국들의 글자는 나라마다 다른 글자체를 가졌고, 상형표의문자이므로 상통한 면이 있으며, 은나라의 갑골문은 기본적으로 단군조선의 문자와 그 뿌리를 같이하는 것이 되고, 하나라의 문자는 바로 단군조선의 신전문자가 되는 것이다. 진시황이 통일시킨 예서체는 정막이라는 사람이 단군조선의 부여에서 가져간 부예를 본딴 글자가 되는데, 한국과 중국의 문자통일에 기여한 점이 있다.

서기전924년경에 부예를 만든 왕문은 기자의 사사이던 왕수긍의 후손이 되는데, 왕수긍이 서기전1122년경 사람이고 왕문이 서기전924년경 사람이니 약200년 차이가 있는데 30대를 1대로 계산하면 왕문은 왕수긍의 약6, 7대 후손이 된다.  서기전1122년경 왕수긍은 은나라 갑골문과 단군조선의 문자를 모두 알았던 학자이며, 단군조선이 문자를 은문으로 번역한 사람이 되고, 그 대를 이은 왕문이 문자에 밝아 단군조선의 상형표의 문자인 신전(神篆)의 자형을 간소화하여 글자는 간편하고 뜻은 그대로인 문자를 만들어 부예(符隸)라 하였는데, 이러한 글자체를 진시황 대 정막이라는 사람이 본을 따 예서체를 만든 것이 된다. 정확히 부예의 글자가 어떤 것인지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왕문이 왕수긍의 후손으로서 은갑골문을 참고하여 단군조선의 문자를 정립하였던 것으로 본다면, 한자의 예서체와 뜻이 통하지 않을 만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하게 단군조선의 문자가 어떠하였던 것인지를 알려면, 신라시대 박제상이 지었다는 부도지 외에 음신지(音信誌)라는 책이 전해진다면 도움이 될 것이고, 단군조선과 북부여 시대에 글자를 새긴 기록이나 비석이 남아 있으면 다행이 된다.

4. 소위 명도전 문제

명도전이라고 불리는 화폐는 주나라 춘추전국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주조된 화폐이며, 중국의 학자들은 연나라의 화폐라 하지만, 말도 안되는 억지 추정이며, 소위 명도전은 바로 단군조선에서 주조되고 사용된 단군조선의 화폐가 된다.

특히 명도전에 새겨진 문자는 은갑골문과 유사한 문자가 새겨져 있음을 중국학자들로 인정하고 있는데, 주나라 춘추전국 시대의 제후국이던 연나라의 문자와는 완전히 다른 글자체를 가지고 있는 글자로서, 단군조선의 상형문자, 상형-표음 문자, 표음-상형 문자, 표음문자가 된다. 상형문자는 중국의 상형문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상형-표음 문자나 표음문자는 중국의 상형문자와 완전히 다른 글자로서 그들로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문자가 되는데, 단군조선의 가림토문자로 대입하여 해독을 하면 풀리는 글자들이 된다.

상형문자가 되는 明이라는 글자는 해와 달로 조합된 글자인데, 밝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서, 발(밝), 해달, 히, 희, 흐 등으로 읽어지는 글자가 된다. 히, 희, 흐는 "해(太陽)"라는 뜻이 된다. 희는 白을 나타내며, 흐는 변하여 "눈(目)"이라는 글자가 되기도 한다. 明의 옛글자는 변형되면서 "믱"이라는 소리글자의 형태가 되어 지금의 "명"이라는 소리가 된 것으로도 된다.

상형문자가 되는 朝라는 글자는 아침에 떠오르는 해와 달을 나타낸 글자로서 아침 조라는 글자인데, 아침해 달, 앗달(아사달)이라는 글자이다.

소위 명도전에 새겨진 순수한 상형문자가 아닌 표음문자 또는 상형-표음 문자는 고대중국의 문자와는 판이하게 다른 글자로서, 한글의 자음과 모음으로 읽어야만 해독할 수 있는 글자이다. 즉 단군조선이 서기전2181년에 정립한 가림토38자로 이루어진 글자이거나 그이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상형-표음문자로 이루어진 글자인 것이다. 명도전 이전에 주조된 것이 되는 첨수도나 침수도와 명도전의 글자를 분석하다 보면, 글자의 형태가 표음문자 형태로 변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한다.

지금의 한자가 창힐의 조족문자, 은갑골문, 주 금문, 대전, 소전, 예서 등으로 내려온 것이라 하더라도 배달나라 문자의 아류가 되는 것이며, 특히 은갑골문은 단군조선의 초기 신전(神篆) 문자의 아류가 되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서기전924년에 왕문이 만든 부예(符隸)가 발견된다면, 한자의 역사가 명백히 밝혀지게 될 것이다. 만약 예서체가 부예라면 한자는 바로 단군조선의 문자가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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