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과 연제 연합군

2008. 2. 29. 23:08한민족고대사

단군조선과 연제 연합군

 

 

BC 707 년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 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한단고기, 109쪽, 단군세기

 

이 내용을

사마천이는 단군조선에게 패한 사실을 이렇게 흉노전에 적어 놓고 있습니다.

 

 

<  산융(山戎)이 연나라를 넘어와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희공(齊禧公)이

산융과 제나라 도성 밖에서 싸웠다.>

 

 

 

(BC 707년)

똑 같은 해에 동일한 사건인데,

 

연나라를 완전히 통과해서 정벌하고, 제나라 수도 외곽까지 갔다는 내용을

단군세기에서는 "조을"을 파견했다고 적어 두고 있으며,

사마천이는 이를 산융이라 했습니다.

 

단군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조을"은  아마도 단군조선 영향 아래의 산융 임금이었을 겁니다.

 

뭐 산융이라고 한들,

융이(戎夷)라고 했듯이, 우리 동이 족의 일파입니다.

 

한단고기, 110쪽을 봅시다.

 

 

BC 653년, 36세 단군 매륵입니다.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기자씨 집안)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

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

 

 

 

 

<사기>'제태공세가'

 

 

二十三年 山戎代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代山戎 至干孤竹而還

 

 

 

[환공23년 산융이 연을 정벌하자 연은 제에 위급을 알렸고 제환공은 연을 구원하기 위해 산융을 고죽까

 

 

지 이른 후 돌아왔다]

 

 

 

 

여기서 산융(山戎)은 고조선이고 제(齊)나라가 승리하지 못한 것을 감추고 있는데 돌아왔다는 내용은 패

 

 

 

 

했다는 기록입니다.

 

 

이런 기록이 <사기>에 또 나오는데 '조선전'에 쓰지 않고 '흉노전'에 실어 놓았습니다.

 

 

 

 

<사기>'흉노전'

 

 

 

基後四十四年 而山戎代燕 燕告急干齊 齊桓公北代山戎 山戎走

 

 

 

[44년 뒤 산융이 연을 치자 연은 제에 위급을 알리고 제환공이 북의 산융을 치자 산융이 돌아갔다]

 

 

 

사마천이가 "제태공세가" 에 적었가가 "흉노전"에서 살짝 빼버린 부분이 무엇입니까?

 

 

 

 

고죽(孤竹)이란 단어입니다.

"고죽" 이란 고조선의 번조선이요, 기자 후손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전쟁을 하면,

적국의 어떤 지역으로 반격해 가는 것이 상식 중에 상식입니다.

 

 

제태공세가에서 적어 두었듯이

고죽국에까지 갔다는 것은 바로 "조선"과의 전쟁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고죽국" 출신의 용병들을 응징해 보겠다는 내용입니다.

 

그 고죽국에서 출병한 이가 누구냐하면, 기자의 후손 집안입니다.

 

 또한

이를 사마천이는 조선에게 졌다는 사실을 감추고자 슬쩍 산융전에 싣고 있는 것입니다.

 

한단고기를 사마천의 사기가 증명해주고 있지요.

 

 

이미 민족사학계에서

검토한 부분인데, 제가 "고죽" 국가 단어의 어감을 첨가 했습니다.

 

 

 

참고로 이 두 곳의 자료를 보시면,

한단고기의 정확성에 놀랄겁니다.

 

 

 자료 가져온 곳 및 참조:

http://blog.naver.com/casahoo.do?Redirect=Log&logNo=20008981717

 

 

http://kr.blog.yahoo.com/han1592/982918

 

 

고죽국 위치에 따른 식민사관과 민족사관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