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명도전 논쟁과 관련하여 참고로 중국학계 장박천 교수의 논문 하나를 소개합니다. 번역은 '아저씨'가 하신 것 같고, 저는 허락 없이 여기에다 전재를 하니, '아저씨'는 용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
“명도”폐 연구 續說
장박천(張博泉)
관건어: “明刀”幣, 圓折式刀幣, 方折式刀幣, 尖首刀
내용요점: 箕侯, 朝鮮侯, 樂浪朝鮮는 殷이 중국 동북 역사 발전과정에 남긴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본 논문은 당대 고고학계 연구의 새로운 성과를 근거해서 볼 때 동한말에 사가들이 주석을 달았던 箕侯, 朝鮮侯가 모두 樂浪이 있었다는 견해에 관해 잘못된 주석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생각은 당시는 箕子가 東遷하여 요서에 있고, 朝鮮侯國이 아직 亡하지 않고 入海(樂浪)하기 전 활동중심은 요동에 있었다고 제기한다. 동시에 이 논문의 중점은 역사적 사실의 연구와 출토된 刀幣 연구와 결합하여 두 式 刀幣와 관련된 문제를 짚어본 결과, 圓折式刀는 朝鮮侯貨幣이고, 方折式刀는 燕國화폐라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는다.
“明刀”幣 面文에 囗인 圓折式刀幣와 面文이 囗인 方折式刀幣 두 式이 있는데, 이들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있어왔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유적들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의 증가로 많은 도폐가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연구도 전에 없는 성과를 얻었다. 이들 연구 성과들은 분포지점의 확인부터, 刀型변천, 개혁과정 및 刀幣 面文에 대한 연구에서 기뻐할 만한 발전을 거두었고, 금후의 연구를 위한 기초도 다지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 연구는 문물출토는 있는데 문헌기록이 없는 과제에 속하는 것으로, 실물과 문헌기록도 있는 것이나 문헌기재만 있는 연구보다 어려운 과정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방법에서 이 문제만의 특수성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문제의 연구를 대충대충 일을 끝마칠 수는 없다. 오히려 선학들의 연구를 세심하게 분석하여 긍정적인 면을 찾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연구를 위해 사고할 만한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또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결코 이들을 무시하면 안된다. 이것은 필자가 “명도”폐를 연구하면서 얻은 기본적인 견해이다. 그래서 “續說”이라고 제목을 지었다.
一, 현재 있는 연구 성과에 대한 긍정과 미해결로 남겨둔 것 현재 折式刀幣와 方折式刀幣에 대한 연구로 얻어낸 성과는 주요하게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이다. 첫째, 고고학계는 오랫동안 꾸준한 노력으로 刀幣形制의 기원과 변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일치된 견해를 얻었다. 1) 도폐의 발전과정은 尖首刀, 圓折式刀와 方折式刀이다. 2) 尖首刀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圓折式刀는 尖首刀에서 기원하고, 尖首刀 기초 위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3) 方折式刀는 圓折式刀를 이은 후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의 연구들을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다. 尖首刀, 圓折式刀, 方折式刀의 발전과정에 대하여 이미 기본적으로 일치된 결과를 얻었지만, 이 도폐들이 만들어진 시대에 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1) 尖首刀는 春秋시대보다 이르거나 春秋시대에 상당한다고 생각하는 견해. 2) 圓折式刀는 춘추시대 또는 戰國초에 속하고 方折式刀은 전국중기에서 연 멸망 때까지라고 생각하는 견해. 이 중에서 尖首刀와 圓折式刀의 시간에 대해선 논하는 바가 약간 다르지만 모두 연구하는데 참고할 만하다. 위에서 볼 때 발전하는 시간을 보면 3자가 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춘추전, 춘추, 戰國의 燕멸망이다. 이 중에서 刀幣는 직접적으로 尖首刀에서 기원하는데, 이 도폐는 圓折과 方折 두 式의 다른 과정을 거친다. 둘째, 尖首刀, 圓折式刀과 方折式刀 산지에서 진행한 연구 성과가 상당히 풍부하다. 이미 출토한 刀幣분포지점과 범위를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주로 지금의 하북성, 요녕성과 길림성의 부분지역에 있다. 이런 점에 대하여 朱活은 尖首刀는 “전국초기로, 燕국경 내의 소수민족활동지역에서 주조한 화폐”라고 생각하였다. 후에 《산동 치고성에서 출토한 첨수화를 논함-겸해서 첨수화의 몇 가지 문제를 논함(談山東淄故城出土的尖首化(貨)―兼談尖首化的幾個問題》논문에서 Ⅰ형이 요녕에서 출토된 것을 근거로,Ⅱ형은 과거 요동에서 출토되고, 혹은 張家口, 承德등지에서 출토되었다고 말하면서, 尖首刀 문자 중에 囗(竹), 囗(■), 囗(魚) 등의 글자가 있는데, 이 지역들은 모두 고죽국과 접근해있거나 尖首刀는 당시 고죽족이 활동한 범위 내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陳鐵卿은 《흔히 보이는 고대화폐―명도(一種常見的古代貨幣―明刀)》논문에서도 “尖首刀는 하북성境內에서는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尖首刀이후 도폐에 관하여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刀幣에 두 가지 式이 있다는 것과, 그 산지는 燕國境內에 있고, 燕易下都를 중심으로 밖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견해이다. 셋째, 尖首刀, 圓折式刀과 方折式刀의 연구는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모두 결합하여 진행하였다. 일반적으로 尖首刀는 연국경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모두 연국이 관할하는 경내를 연구로 삼아, 동북의 孤竹, ■가 안에 들어가 있는데, 모두 燕에 속하는 지역이라고 본다. 동시에 기타 두 식의 도폐도 燕幣로 많이 본다. 이상의 3가지 면의 연구 성과에 대해 나는 매우 큰 발전과 진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명도”라고 불리는 것은 일종의 도폐에 두 가지 式인지, 아니면, 두 종류의 다른 나라의 화폐인지, 2) 그 산지는 연국경에서 같이 나온 것인지 아닌지, 3) 燕중기 조선을 아직 정벌하지 않고 또 진번, 조선의 땅을 점령하기 전에 동북의 ■, 조선은 연국에 속했는지 아닌지, 4) 囗,囗는 同一字의 변화인지 아닌지, 아니면 두 가지 다른 글자인지 아닌지 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이 바로 본문에서 논하려는 문제와 원인이다.
二, 圓折式囗刀가 朝鮮侯國貨幣라는 설 3종 刀幣에 대한 연구 중, 尖首刀에서 圓折式刀까지를 일종의 幣制의 개혁과 화폐제도, 그리고 도폐상의 글자를 통일하였다고 보는 것에 대하여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圓折式刀가 燕幣인지, 아니면 동북(만주)의 箕子후대의 朝鮮侯國의 화폐인지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내야 할 문제이다. 필자는 아래 세가지면의 논증을 통해 尖首刀는 孤竹侯, 기侯 때에 이미 있던 화폐이고, 圓折式刀는 朝鮮侯國의 幣制일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의 발전변천과정으로 보면, 尖首刀와 원절식도가 만들어진 지역은 모두 동북지역에 있다. 殷이 孤竹國을 지금의 하북성 盧龍縣地에 封하였는데, 출토한 孤竹器로 보면, 그 관할 범위는 지금의 遼河이서지역을 포함한다. 그 땅은 옛날 嵎夷라고 불렀다. 孤竹은 姓이 墨台氏이고, 또 目夷氏라 불렀는데, 땅을 성씨로 부른 것이다. 墨台, 目夷는 同音異寫로 ‘明夷’라고도 부른다.《史記․殷本紀》에 殷人의 후예에 目夷氏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殷末 箕子가 東遷하였는데 그 땅은 고죽과 가깝고, 실제로 孤竹의 屬地에 있다.《易․明夷》에 “箕子之明夷.”라고 기재하고 있다. 사서기재는 “箕子適朝鮮”이다. “之明夷”의 “之”와 “適”은 뜻이 같은데 같은 사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잇다. 明夷와 朝鮮은 같은 땅에 대한 다른 기록이다. 예를 보면《後周文紀․周隴右總管長史贈太子少保豆盧公神道碑》에 “朝鮮微子之封, 孤竹伯夷之國.”(《庾開府集》기록과 같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神道碑銘 역시 “朝鮮建國, 孤竹爲君.”라고 말한다. 이 조선은 바로 目夷, 明夷의 地이다. 遼寧 喀左에서 箕侯銘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고죽과 가까운 지역이다. 箕侯銘 청동기가 발견된 객좌지역은 고죽지역과 매우 가까운 지역이다. 朱活은 尖首刀 위에 囗, 囗, 囗등의 쓰여져 있는 글씨를 國族으로 불렀다. 요서에서 출토한 孤竹, 箕, 魚 등 청동기는 시간은 殷末에서 西周에 속하고, 첨수도의 시간은 연구에 따르면 春秋前 또는 춘추까지 연장될 것이다. 陳鐵卿 분석에 따르면, 원절식도의 “明”자는 본래 첨수도에서 따른 것으로, 첨수도 위에서 이 “明”자는 각종 行用標記雜字(雜字를 標記해 통행에 사용한)이므로, 燕國의 都邑명칭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朱活의 연구와 결합하면 첨수도가 사용되었을 때는 설명하면 “明”은 당시의 지역명칭으로 孤竹, 箕, 魚등 國族은 明夷지역에서 이미 첨수도를 사용하였고, 그 후에 동북에서 사용된 도폐는 이곳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箕子의 國稱은 箕侯로 불리는데 대략 서주부터 춘추사이에 있었고, 기후라고 불리우던 것이 춘추부터 朝鮮侯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원절식도는 춘추에서 전국초까지 있었는데 朝鮮侯國이 출현한 이후로, 지명 明夷(朝鮮)를 국명으로 고치면서 동시에 화폐제도도 개혁하였을 것인데, 이때 弊面 위에 통일적으로 “明”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東漢末 역사서에 주석을 많이 달았던 應劭, 高誘는 사서에 주석을 달기를 “당시 낙랑은 조선후국이 소재한 지역이었고, 그곳은 箕子가 東遷한 땅이라”고 注를 달았다. 사서를 살펴보면 이것은 틀린 주석이다. 《사기․조선열전》에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 내용은《한서․조선열전》도 같은 내용이다. 全燕은 戰國 燕 全盛시기를 가리키는데 “略屬眞番,朝鮮”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즉 眞番, 朝鮮의 토지를 점령하여 “자기에 속하게 하였다(以屬己)”라는 뜻이다. 《博物志․雜說》에는 “箕子居朝鮮, 其後燕伐之, 朝鮮亡入海爲鮮國師(君).”라고 기재하였다. 여기서 朝鮮은 國稱이고 즉 箕侯를 朝鮮侯의 朝鮮으로 고치고, 연에게 정벌당한 후, 진번, 조선 역시 연에 귀속하게 되어, 조선은 나라를 잃고 바다로 도망쳤는데, 이 바다는 반도를 가리키고 있다. 즉《한서․지리지》의 “낙랑조선”이다. 燕에게 토벌되지 않은 朝鮮侯國은 요동에 있어야함을 볼 수 있다. 연이 조선을 伐한 후, 原朝鮮地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眞番은 遼東郡外의 鄣塞地로, 서쪽은 요동군과 접하고, 낙랑은 요동동남쪽에 있으므로, 연국은 朝鮮후가 도망쳐 도달한 낙랑지역은 “연에 속하지 않았다.(以屬己)” 그래서 나는 “원절식도 후에 나타난 방절식도폐가 燕幣이고, 燕國경내에서 생산하고, 연국이 진번, 조선를 점유한 후에 비로소 거기에 전해 들어온 것이다”라고 본다. 방절식도폐 시간은 전국중기에 연이 망할 때까지로 시간으로 분석하면 서로 일치한다. 둘째, 문자의 계승관계로 보면, 원절식도는 동북에서 생산된다. 첨수도 위의 문자는 古拙한데, 어떤 것은 갑골문에 유사하고 그중 國族, 地名을 뜻하는 글자인데 갑골문에서도 보인다. “明”자는 囗으로 쓴다. 그 글자는 갑골문에서 원류한다. 周의 銘文에는 “燕”자는 “匽”로 되고, 즉 “囗”와 “匽”자는 유사하지가 않는데 역시 아마도 燕國名이 아닐 것이다. “囗”자는 오늘날 “明”으로 많이 해석한다. 그러나 갑골문의 明字는 “囗”으로 한다. 金文에서는 “囗”으로 한다. 이 “明”字는 “囗”이나 “囗”에서 직접 원류하지 않고, 갑골문중의 “囗”에서 원류한다. 郭沫若《殷契粹編》에서는 “萌”으로 해석하였다; 《周禮․占夢》에서 杜子春은 萌을 明으로 말하였다. 또 그 字는 “明”이 된다고 말하고 明字는 萌에 근거하는데 후에 明으로 썼다. 이 字로 보면 “匽”자와 무관한 것 같지만 반대로 오히려 “箕子之明夷”의 “明夷”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箕子之明夷”의 “明夷”는 즉 “箕子適朝鮮”의 조선이다. 鮮은 또 讀音이 私의 同聲字로, 私, 斯音은 尸(夷)의 字가 通한다. 그러므로 明夷 두 자의 本音은 마땅히 “明尸”로 읽어야하는 것과 같다. 明夷가 殷人의 原書라는 것이 의심스러운데, 朝와 囗는 모양이 닮았다. 조선은 中原史書의 寫法이다. 또 “明”자는 또 “昌”으로 한다. 예로 《詩》에 “東方明矣”라고 하고 《說文》에서는 “東方昌矣”로 여겼다. “昌”字의 古文은 “囗”이고, 籒文은 “囗”으로 하고, 篆書는 “囗”가 되고, “囗”와 形이 비슷하다. “東方明矣”, “東方昌矣”의 “明”, “昌” 두 자는 모두 하늘이 장차 밝는 것(天將明)으로 역시 즉 朝이다. 이에 근거해서, “朝”자는 여기에서 마땅히 “昭”라고 읽고, “明”자와 통한다. 지금의 朝鮮語는 朝鮮 두 자는 여전히 “昭鮮”으로 읽는다. 마땅히 그 本音일 것으로, 舊 注音의 “潮鮮”으로 읽은 것은, 誤讀이라고 생각한다. 연이 昭王때, 조선을 정벌하여 진번, 조선 두 나라의 땅을 점유하여 조선은 나라를 잃고 도망가서(亡) 入海(樂浪)하였다. 연은 원래 진번, 조선지에 요동군과 鄣塞를 설치하였는데 遼東郡治址는 襄平(지금의 遼陽市)에 있다. 《한서․지리지》襄平縣下 注로 “莽曰昌平”하였다. 昌平은 襄平前의 舊名으로, 平義는 “夷”가 되고, 昌平城名 역시 明夷(朝鮮)에서 원류한다고 볼 수 있는데 마땅히 箕子之後 에 箕侯를 조선후로 고친 國名과 城名이다. 殷人과 조선은 그 地를 明夷로 부르고 또 昌平이라 異寫(다르게 쓰고)하고, 明夷, 昌平을 中原史書에는 朝鮮이라고 썼다. 東漢末 이전에는 箕子나, 箕子이후의 朝鮮땅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지가 않다. 역시 당시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재가 없다. 箕子, 朝鮮侯의 일에 관해서 아마도 西晉 武帝 太康2年 汲郡사람인 魏 安厘王塚에서 얻으진 수십차의 竹書와 다른 版本의《逸周書》를 얻었다. 淸나라 李錯은 《尙史․軒轅五帝夏商列傳》권1에서《汲塚書》를 인용하여 기록하길 “胤子(祿父)在比阝(邶), 父師(箕子)在夷,奄, 孤竹而君之, 以夾煽王燼, 商可復也.”하였다. 邶은 王國維의 고증으로 燕이고, 奄은 산동에 있다. 그러므로 箕子는 夷에 있는데 明夷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세 땅은 고죽과 가깝다고 말했다. 張華는《博物志》에도 朝鮮왕은 이곳에서 낙랑으로 도망친 지역이라고 하였다. 北周, 唐때, 기자는 孤竹屬境에 있고, 조선은 요동에 있다고 기재한 것은 결코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다. 刀幣面文의 변화 및 역사진행을 결합하여 분석하면 첨수도의 “竹”, “箕”와 “明”자에 竹, 箕가 明夷地에 있다는 역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후에 기자가 강대해져 原地名(明夷, 朝鮮)을 국명으로 바꾼 이후에 舊幣制도 개혁하여 國名으로 面文을 통일한 것은 즉 箕子 후에 朝鮮侯國시기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원절식도이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과거에는 주의를 끌지 못했는데, 주로 동한말 이래 기자와 箕子之後의 조선이 낙랑에 있다고 계속된 생각의 영향을 받아, 燕昭王 全盛이전에 대해, 요서, 요동귀속 및 그 변화의 역사가 분명하지 않아, 기자와 箕子이후에 朝鮮이 모두 낙랑에 있었다고 잘못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기자의 明夷(朝鮮)는 遼西 箕후명기가 출토된 지방에 있는데, 李白《東夷雜考》에서도 이 說을 주장하였다. 箕子이후의 朝鮮侯國의 활동중심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서 사서에는 기재된 것이 없다. 그렇지만 사서에 나오는 것을 참고할 수는 있다. 예로《사기․조선열전》戰國燕全盛時, “嘗略屬眞番,朝鮮”이라고 기재하고,《索隱》에서는“略二國以屬己”라고 하였다.《한서․조선열전》顔師古 注에 “戰國時燕國略得此地”라고 했는데 모두 原眞番, 朝鮮地가 이미 연국이 침략하여 빼앗은 지역임을 말한다. 또《박물지》기재에 조선이 연에 정벌당해 조선은 토지를 잃고 亡入海(樂浪)하였기 때문에 箕子후의 朝鮮의 변화에 대한 기재는 매우 정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재에서 보면 연은 원래의 眞番이나 朝鮮땅을 점령하였지 결코 조선왕이 도망친 낙랑지역을 점유하지 않았다. 만약 朝鮮侯가 일찍이 낙랑에 있었다면 “亡入海”라는 표현보다는 “退居海”하였을 것이다. 燕國은 眞番, 朝鮮 두 나라 땅을 점유한 후, 조선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진번에 鄣塞를 설치하였는데, 朝鮮侯國의 舊地가 요동인데, 지금의 요하이서의 부분지역을 포함하는 곳에 있었음을 추측해 알 수 있다. 만약 첨수도의 産地가 竹과 箕의 지역에 있다고 말한다면 직접 첨수도와 계승관계가 있는 원절식도는 朝鮮侯國이 明夷(朝鮮)地를 國稱으로 바꾼 후에 明(囗)을 面文이 된 화폐였을 것이다. 셋째, 箕子후의 朝鮮國이 존재한 시간과 그 경제무역의 발전으로 보면, 나는 원절식도 역시 朝鮮侯國에 속하는 화폐라고 생각한다. 원절식도는 燕나라 경내에서 나오지(出産) 않는 견해에 나는 동의한다. 원절식도폐가 사용된 시기에 대한 분석은 춘추에서 전국초까지라고 하는데 나는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箕子後의 朝鮮이 箕侯를 朝鮮侯로 바꾼 시간은 西周, 春秋間으로 推論하는데, 朝鮮侯가 강대해져 遼西以西地를 점유한 후로 그 활동중심은 이미 요서에서 요동, 즉 지금의 요양으로 옮겨왔다. 이 때문에 원절식도가 요서에서 첨수도로 대체된 시간은 춘추에서 연이 조선을 정벌한 이 시간 내일 것이다. 연이 조선을 정벌한 것부터 연이 멸망할 때까지 지금의 동북 요하 동서쪽은 방절식도폐가 전해지고 분포하는 지역이다.《사기》,《박물지》등 기재에 따르면, 연이 조선을 정벌하기 전, 요동은 연에 속하지 않았다. 또 연과 조선 두 곳이 관계하지 않는 지역이 아니고, 箕子의 朝鮮侯가 점유한 지역이다. 경제와 무역의 발전상황으로 보면, 箕子이후의 朝鮮은 지금의 遼河 동서쪽에 있고, 이때는 바로 그 朝鮮의 전성시기이다. 기후는 요서에 있는데, 기본적으로 은을 계승한 청동제조 기술은 지방과 민족의 특색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는데 비하여, 춘추에서 전국 초까지 발전하였던 朝鮮侯國 물질문명의 발전에 이미 뚜렷한 지방과 민족의 특색이 생겼다. 이것은 문헌과 고고학 두 방면에서 모두 증명할 수 있다. 《한서․지리지》에 箕子 “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나라의 聚落은 山川을 部界로 하고, 都城, 邑落, 家室이 있다. 그 청동기문화는 이미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시기 요하 동서쪽에서 출토한 東北系靑銅短劍을 보면 그 기술은 상당히 높은 발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과 민족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사서에 기재된 箕, 朝鮮, 眞番지역은 그 북쪽은 지금의 길림성 경내에 도달한다. 箕子의 “八條之敎”는 箕子이후의 朝鮮侯國과 낙랑조선이 東北에서 행한 가장 오래된 법령이다. 그 나라는 衣冠帶劍하고 文皮가 특산이고, 그리고 해상으로 齊나라와 상업무역을 하였다. 제나라지역에서 발견한 面文 囗도폐는 朝鮮侯國이 제나라와 상업왕래를 하면서 남겨놓은 實證이다. 사서에는 朝鮮侯國 鑄幣에 대한 직접적인 기재가 없다. 《한서․지리지》기재에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하였다. 여기서 50만으로 계산한 것은 화폐일 것으로, 위에서 말하는 “相傷以谷償”으로, 곡식은 단독으로 계산할 수 없다. 그 時量谷器를 계산하는 단위로 계산한다. 원절식도 뒷면에는 숫자가 있는데 1에서 5000까지로, 아마도 幣面値를 대표할 지도 모른다. 만약 이렇다면 한 노예가 돈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는데 五千値의 刀幣 100매의 몸값을 내야한다. 이렇게 해야 노예주로 부터 일반평민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기자의“八條之敎”의 내용으로 보면, 朝鮮侯國은 당시 노예제국가였고 이런 규정은 분명히 노예주에게 유리한 것이다. 조선후국에서 당시에 통행한 화폐는 明字를 面文으로 하는 刀幣였을 것이다. 따라서 50만 몸값은 아무래도 원절식도폐를 가르킬 것으로 생각된다.
三, “囗”은 “匽”으로, 연이 조선을 정벌한 후, 동북에 전해진 도폐이다. 고고학계 연구에 의거하면 囗도폐가 사용된 시기는 전국중기에서 연 멸망까지로, 方折式刀幣라고 불린다. 원절식도의 面文은 통일해서 “明”字를 사용했지만 도폐 뒷면 문자는 여전히 첨수도를 계승하였는데, 원절식도가 첨수도에 대한 직접적인 상호 계승의 관계임을 설명한다. 그리고 囗도는 面文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뒤쪽문자(背文) 역시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고 그 산지는 燕國境內에 있는, 연이 새로이 주조한 도폐일 것이다. 현재, 두 식의 刀幣面文의 연구에 대해 아직 완전히 통일되지 않아 다수가 囗, 囗을 동일한 한 字로 보는 전후의 다른 변화는 “明”字로 해석하기도 하고 “匽”字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연구 중에 “匽”자로 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나는 囗을 “明”자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보고 “匽”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직은 협의검토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두 글자를 한 글자로 같이 해석하기의 전후 變形 역시 검토할 대상 내에 두어야할 것이다. 이 두 글자에 대한 비교와 사고를 거친 후, 나는 囗와 囗는 두 글자일거라고 생각한다. 글자의 결구가 다를 뿐 아니라 筆劃 역시 다르다. 囗자의 출처인 囗는 어떤 것은 囗라고 썼지만 構形에는 변화가 없다. 囗은 갑골문囗자의 출처인 “囗”에서 변화해 온 것이다. 그리고 囗의 출처인 “囗” 역시 囗가 없는 寫法이다. 囗자는 字書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필획으로 囗으로 예속되게 정할 수 있는데(隸定) 囗이 상형자라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다. 그 글자의 書寫, 象形과 音讀에서만이 그 글자가 “匽”자와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 첫째, 字의 象形體에서 音을 구한다. 囗은 분명히 眉目의 形을 모방하고 上部囗는 眉形이고, 下部는 囗는 眼形이 되는데 獨體의 象形字일 것이다. 마치 眉聲이 되는 글자를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眼은 이 글자의 音讀을 표시한다. 眼은《集韻》語限切, 又葉伊甸切, 음은 宴으로 예로 蘇轍의 雪詩: “終勝溪嶂長薰眼, 典衣共予成高讌.” 讌은 지금의 “宴”이 되는데 宴과 讌, 匽 讀音이 통한다. 囗은 眼(伊甸切)에서 소리를 얻은 것이다. 둘째, 字에서 定에서 音을 구한다. 오늘날 “日”字 역시 囗나 囗에서 지은 것이다. 囗자는 囗로 음을 정할 수 있고, 그 字 上部는 一이 되고, 下部는 囗이다. “亘”자는 뜻을 二에서 취하고, 예를 들어 囗에서 囗를 짓고(되고), 음은 宣이나 桓이다. 日에서 亘을 만들고 隸書 囗에서 역시 亘으로 쓴다. 二字는 곧 混通하였다. 東北胡系에 속하는 민족 烏桓 역시 “烏延”이라고 했는데 “延”과 “宴”, “燕”, “匽”자와 音이 가깝다. 烏延은 그 族 本音일 것으로 字는 亘 (囗)을 따랐다. 생각건대, 북방에서 延, 沿으로 읽는 字音은 燕과 音이 같다. 그 字는 囗에서 소리를 얻은 것(得音)과 같다. 셋째, 囗의 別寫로 음을 구한다.《篇海類編》에는 囗字가 있는데 音은 宣으로 注讀했는데 즉 “亘”자이다. 그 필획은 囗類이고, 書寫의 편리를 위해 囗위의 一橫을 日字의 옆(側)에 두었다. 亘은 延으로 音을 읽을 수 있다. 이 字 역시 亘(囗)에서 소리를 얻었다. 囗은 囗字의 別寫라고 의심된다. 나는 이 囗자가 匽이 刀面 위에 있는 異寫라고 의심한다. 그 음독은 서로 같을 것으로 匽은 刀幣 위에서 美觀을 求하는(생각한) 특수한 寫法이다. 그 字는 “明” 이 아니고, “匽”일 것이다. 만약 이러한 추론이 잘못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동북의 조선후국과 연국은 모두 국명으로 幣를 이름 지었을 것이다. 이 囗字로 文을 한 방절식도폐는 시기로 보면 연소왕이 개혁하고, “燕國殷富”하며, 사회경제가 비속적으로 발전할 때, 주조를 시작한 도폐일 것이다. 춘추에서 전국초까지, 연국 영토는 넓지가 않았다. 중원제국과의 교류도 적었다. 그 북쪽에는 동호가 있고, 동에는 “조선요동”이 있었다. 그래서《사기․조선열전》기재에 그 동쪽은 “眞番, 朝鮮”이라 하였다. 조선은 즉 箕子之後의 朝鮮侯國으로 그 활동중심은 요동에 있다. 진번은 이 조선의 동쪽에 있다. 燕中期 강대할 때, 비로소 북으로 동호를 치고, 동으로 조선을 토벌하여, 요서, 요동, 진번의 땅(地)을 점유하였다. 그러므로 연소왕 이전의 고죽, 기자 조선을 燕境內로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 단지 燕境外에서 연, 제와 服事, 臣服이 발생한 동북지방의 諸侯伯國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연소왕 개혁 전, 사서에는 燕國 鑄幣와 관계가 있거나 연에 도폐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료의 기재가 없다. 고고학적인 발견으로 증명하길 燕易下都에서 출토한 방절식의 囗刀는 이시기에 주조한 것일 것으로 이것은 이 종류의 刀幣시간이 전국중기에서 연이 멸망까지와 완전히 부합한다. 이것이 그 첫째이다. 방절식囗도 산지는 연국 그리고 易下都를 중심으로 대외로 발전하였는데 그 幣가 동북으로 전해진 것은 燕이 요동, 진번을 점령한 후이다. 연문화가 동북에 전해진 후, 점점 동북에서 발전하고 우세해졌지만 원래 朝鮮侯문화는 여전히 동북에 남아있거나 존재하여, 이 때문에 그 초기 囗도는 囗와 필연적으로 같이 존재하는(사용되는)상황이 생겼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동북에서 두 종류의 도폐를 연구할 때, 근원을 밝혀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근원을 찾아내는 중에 당시 역사의 실제상황과 부합하고 인식 상에서 정확함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는 발전하고 변화한다. 동북도폐는 이런 발전변화의 특정역사단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동북도폐연구에서 각종 기재의 진위에 대한 판별분석을 떠날 수가 없다. 漢末 사서에 주석을 달은 사람들은 箕子, 箕子이후의 朝鮮侯國에 주를 달아 모두 낙랑에 있다고 하였다. 나는 사서기재중의 실제상황과 서로 부합하지 않는 誤注라고 생각한다. 나는 연구 중 이 점을 주의하고 있지만 아직도 스스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연구가 더 필요하다. 이점이 두 번째이다. 연이 진번, 조선을 점령한 것은 연소왕이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할 때로, 이 이전의 진번, 조선은 연에 속하지 않는다. 당시 요동의 개념은 遼水印이지만 또 遼水以西의 부분지역을 포함한다. 이를 따르면《戰國策․燕策》기재의 “燕東有朝鮮遼東”은 記事가 연소왕이 조선을 정벌한 전이기 때문에 조선과 요동은 두 개 지역명이라고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조선은 國稱, 즉 朝鮮侯國이다. 당시 遼東郡이 아직 건립되기 전이기 때문에 요동은 지역호칭이다. 후에 연이 진번, 조선을 정벌하고, 조선이 나라를 잃고 亡入海(樂浪)하여 진번국은 요동군 동쪽에 있고, 낙랑은 요동군 남쪽에 있고, 이 때문에 “조선요동”은 바로 조선은 요동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亡人海 후의 낙랑조선을 가리키지 않을 것이다. 즉 朝鮮侯國의 요동은 똑같이 연의 요동이라고 이해할 수 없고, 연과 조선이 두 개의 돌보지 않는 지역이라고 이해할 수 없다. 더욱 亡入海한 것과 이미 亡入海한 두 지역을 같은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箕子와 箕子이후의 朝鮮侯國의 연구에 대해 《사기》,《한서》,《위략》,《박물지》의 記事에 대한 상호 參校 후에 이론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동한말 역사서의 주석에 기자, 조선후를 모두 낙랑에 있다고 한 설을 선택하지 않고, 다른 연구의 길을 찾았다. 어떤 사람은 나의 연구가 “離奇古怪, 不足爲据”하다고 질책한다. 문제에 대한 연구의 정확여부는 반드시 고인의 說을 지키는 위에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또 반드시 근인들의 다수 주장을 따르며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고인의 주석한 “奇”를 벗어났고, 그밖에 나 역시 고서 중에서 나의 연구할 길을 찾았다. 만약 이것이 바로 “離奇古怪”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감당하길 원한다. “不足爲据”하다고 것에 관해서는 아마도 이 종류의 문제에 대한 연구가 시작 중에 있기 때문에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견해를 아직 정리해 내지 못했다. “不足爲据”라고 말하는 것에 나는 역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어떠한 증거를 선택하여 연구하든 연문화가 동북에 전해져 동북지역에 원래 侯伯國에서 군현으로 발전시켰고 동북의 남부에 봉건의 새로운 시대를 들어가게 하였다. 견해는 모두 서로 같은 것이다. 화폐제도를 말하면 첨수도는 앞에 있었고, 원절식도폐는 그것을 이었다. 마지막이 방절식도폐라는 것은 共認되었다. 어느 한 나라에 속하느냐가 아직 일치하지 않을 뿐이다. 문제는 방법을 열어놓고 연구하여 사서에 기재된 사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한다. 箕子이후의 朝鮮에 대한 연구도 그래야 한다. 이것이 세 번째이다. 나는 화폐에 대해 이전에 연구한 것이 없다. 최근에 퇴직한 후 시간을 이용해 殷人과 殷이 동북에 남긴 흩어져있는 기재들을 정리하여 이 문제를 언급하고 이 문장을 썼는데 그야말로 異論이 있는 類에 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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