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나라 천도 논문

2022. 1. 16. 21:05언어와 유전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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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당시 
연국이 山戎 제 세력에 의해 곤란(病)을 당하였다43)는 기록에 근거한 山戎 
침입의 가능성이다. 대부분 이것을 연국 천도의 가능성으로 인식한다. 즉 
左傳과 史記 齊太公世家 등에 근거하면 山戎 부락연맹이 강성하여  
연국 및 기타 중원 제후국을 위협하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그 과정에서 山
戎에게 연국은 도성지를 함락당하게 되자 천도를 단행하였다는 것이다.

연국을 곤경에 처하게 한 세력이 山戎세력이든 혹은 白狄세력이든 간에 연
국을 둘러싸고 太行山, 軍都山, 燕山 일대에 무수한 여러 戎狄세력이 웅거
하고 있었다는 점과 연국이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서 모종의 관계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세력의 강약에 따라 수시로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는 길
항관계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이 의견은 일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천도의 두 번째 가능성은 琉璃河 유지 黃土坡 묘장에서 보이는 정황으로
부터 추정할 수 있다. 즉 張家園上層文化의 기물이 琉璃河 유지의 묘장에서 
단 한차례 출토된다는 점으로 볼 때, 張家園上層文化로 상징되는 토착집단
이 연국 주체세력에 의해 대부분 배척당하였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러나 당시에 張家園上層文化는 永定河 남북에서 상당한 분포 범위를 갖고 
있었다.46) 따라서 琉璃河 유지에서 보이는 정황은 연국 주체 세력에 대해 
張家園上層文化 토착세력의 저항을 야기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때
문에 연국 주체세력이 천도를 단행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세 번째 가능성은 바로 河水의 범람이라는 자연재해로 인한 琉璃河 유지
의 폐기이다. 이러한 인식은 시봉지인 琉璃河 유지의 폐기시기와도 연관된
다. 琉璃河 도성지의 폐기 연대에 관해서는 해자 내의 퇴적물 정황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즉 서주 초기와 중기에 형성된 해자는 河內에 방어의 기능
을 하는 물이 가득 찼을 때 사용된 반면, 그 바로 위에 있는 퇴적층은 흙탕
물로 가득 찼으며 동시기의 유적 단위 내에 고급 등급의 유물이 보이지 않
는 점에 미루어 볼 때 琉璃河 도성지는 서주 후기에 이르면 도성 기능의 
변화가 발생하여 도성으로부터 일반 거민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47)

 


따라서 琉璃河 고성이 연국 도성으로 사용되었던 시기는 서주 초중기이
며 이후에는 그 기능을 점차 상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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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추정한 천도 원인이

첫번째로 원인이 올라와 있습니다.

 

 

 

 

 

146쪽

<<이 昭襄王은 周 赧王 3년(기원전 312년)에 즉위하였는데 그의 재위 기간
은 전국 중기 이후 연국이 전국칠웅의 하나가 되는 최강시기에 해당한다. 
현존 전적을 살펴보면 薊를 燕都로 삼은 시기는 이것이 최초라고 볼 수 있
다...>>

지금의 북경지역에 '계국'이란 나라가 있었고, 이 때에 가서야 연소왕이 계국을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147쪽

<< 한비자 유도 를 검토해본 결과 적어도 춘추 시기에는 분명 계성은 연국의 도성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중략) 산융의 세력이 제거되어 계성으로 천도하였다는 것도 재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강조까지 하십니다.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북경까지 진출 못했다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155쪽

결어 부분,

따라서 연의 세력은 영정하(永定河) 일대를 넘지 못하고 거마하 일대, 용성 일대를 전전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거마하 일대, 용성 일대 전전

진개의 북벌 전에는 계국-북경-에 온적이 없다고 하네요.

 

154쪽

 

현재 용성현 남양 유지이며

춘추시기 환후 시기에 천도하여 적어도 29대 간공 시기까지 춘추시기 연국의 도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

유리하 유지--->임이--->?--->(임)이 , 그러나 영정하 이북의 계성으로 천도는 전국 시기에 가서야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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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제 명도전연구에 유리한 정황의 논문이지요.

 

참고로 2008년 5월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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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해설

이렇게 보면,

동호/산융(맥조선)이 유리하 연 수도를 쳐서 용성과 이현 쪽으로 몰아내었고 그곳에 '계국(BC 690~BC 300년 즈음)'이란 맥조선 후국을 세운 것이니 진개의 동호 천리는 계국을 쳐서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계국 시절에 명도전이 북경 (혹은 이현까지) 나온 것인데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