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적인 생각

2022. 1. 14. 14:55언어와 유전자학

이덕일 소장님, 수구리님, 어이무사님 사료를 중심으로한 갈석산 연구를 보면 모두 살펴 볼만 합니다.

수구리님 연장성은 석가장 아래에 있고

어미무사님은 갈석산이 태행산맥의 백석산이라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현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아마도 진장성과 연장성을 연결해서 만들었지 않나 추측해봅니다.

또 제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해안선인데, 발해 해안선이 훨씬 육지 쪽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갈석산 위치를 빈주시까지 보는 경우-이덕일 소장님 자료-가 있는데 이는 어이무사님이 우갈석이라 부르는 곳인 듯 합니다.

 

또 연나라 국경 '계'의 위치가 현 북경이 아닐 수도 있는데,

수구리님은 '거록현' 이라 보고 있습니다.

중국 사서에 몇 년에 어떤 상황이 자세히 나오지 않은 터라, 또 허세와 허풍이 심한 역사 과장이 많은 내용들이라

조심해서 살펴야 합니다.

다음 이후석 교수님의 고고학을 중심으로 본 역사도 참고할만합니다.

주로 연의 진개 조선 2천여리 진출 전후만 다루다 보니

지도에 4C 전후 연하도 문화지도가 있습니다.

저는 이 연하도 문화가 형성되기 전 BC 5세기 까지는 이곳의 주인이 고조선인들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토론 영상을 보니

2016년 제3회 상고사 토론회 영상 3(발표 : 이후석 박사, 토론 : 김종서 박사)

 

김종서 박사님은  지금의 갈석산(산해관)을 국경으로 BC9~BC4 로 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Qyi1vjQyr4&t=4445s 

참고로 김종서 박사님의 진개의 2천리 침략설을 아예 허구로 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계 유물도 저처럼 유민들의 흔적일 수도 있다 생각하시네요.

그리고 이후석 교수님의 자료를 인정하고 그 토대로 거리 추정도 해 보았습니다.

https://blog.daum.net/daesabu/18328394

 

전국시대 요서지역 =맥 이나 고조선

그러므로 전국시대 요서지역의 십이대영자문화를 계승하는 동대장자유형 은 동호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정치체의 문화이며, 예맥(또는 맥)이나 고 조선과 관련하여 논의해야

blog.daum.net

고대의 1리 단위가 현재 단위와 같은 지는 '만리장성' 이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직선 거리인지 꾸불꾸불한 길을 말한 것인지, 대충 말한 것인지는 살펴 볼 문제입니다.

 

다만 동호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중국 사서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은어떠했는지는 계속 고찰해야될 탐구영역이라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봅니다.

후대 동호는 요,금,청으로 나타난다고 보면, 우리 겨레 일족 만주족 계열이 중원으로 내려감으로서 방패막이 사라지고

역사의 모든 문제에서도 밀리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현 연하도를 지우고

수구리님의 공부를 채택한다면, 제 명도전 국적 공부도 확실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계속 토론 과제라 보겠습니다.

 

박선미님이 석사 논문과 출판한 책에서 입장 차이가 난 것은 이 연하도 문화 때문일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만약 명도전 주조 시기가 4C 중반이 아니라 100년 200년 정도 올라간다면, 제 주장에 무게가 실릴 것입니다.

지금 혹 정밀한 연대 측정 기술이 있다면, 명도전을 측정해보는 것도 하나의 과학적인 방법이라 봅니다.

 

갑자기 신채호 샘의 유명한 말씀이 떠오르네요.

 

여기에 제 연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이미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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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1세기경 후반 고조선 사람들이 계속 서남쪽으로 내려오므로 주(周)는 소공석(召公奭)을 연(燕)에 봉하고, 당숙(唐叔)을 진(晉)에 봉해 이를 막게 했다. 연(燕)은 당시 황하 이남의 소국이었으며, 지금의 베이징 지구는 연(燕)의 영역이 아니라 고죽국의 영역으로서 고조선의 변경지역이었다. 고중국 주(周)나라 후국 연(燕)이 북방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자, 고조선의 서변 후국들은 BC 10세기경부터 주(周)의 후국 연(燕), 진(晉)과 국경을 접하게 됐고, 자연히 교류와 함께 갈등도 일어나게 됐다.

BC 8세기 말(BC 707년, 동주 환왕(東周 桓王) 13년)에 고중국 사가들이 호맥(胡貊)이라고 기록한 고조선 서변 후국이 연(燕)을 공격해 격파하고 산동반도에 있는 제(齊)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때 고조선 후국(산융)의 공격력은 주로 고조선 기마문화의 선진성과 우월성에 의거하고 있었다. 고조선 후국 기병부대의 민첩한 기동성이 연(燕)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산동반도의 제(齊)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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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123101031612000001 

 

고조선과 古중국 경계선 이어서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었다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⑪ BC8세기 조중전쟁과 국경선- 한민족 문명학고조선, BC 10세기 燕·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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