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비파형동검 bc30세기에 이미 출현했다.

2010. 12. 28. 09:32한민족고대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칼은 청동기시대(BC 3000년경)에 이르러 단검과 구별되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나뭇잎 모양의 긴 칼날과 칼날을 손잡이 모양으로 늘여서 칼자루로 만든 동(銅) 또는 청동제 무기들이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

 

고대에는 창이 주된 전쟁무기였다. 창은 인간이 고안한 최초의 무기 가운데 하나로 처음에는 단순히 끝을 뾰족하게 깎은 막대기였다. 원시인들은 주로 창을 던지는 무기로만 사용했다. 이후에 군사적 행동이 개인의 독자적인 행동에서 큰 무리를 이룬 군인들의 집단행동으로 발전하자 창은 점차 찌르는 무기로 변모했다.

 

창을 든 군인들로 구성된 방진(方陣), 즉 빽빽하게 정렬시킨 군인들을 한 곳으로 모아 군대를 편성한 이 방식은 일찍이 BC 3000년경에 수메르 군대에 의해 이용되었다.

 

환단고기에서 bc 2700년경 치우천황이 광석을 캐어 칼과 창과 화살 및 투구를 만들었고 이들 무기로 중국의 황제헌원과 탁록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이 결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검은 창에서 유래되었을것으로 보인다. 화살촉과 창촉은 처음에 석촉으로 쓰였을 것이나 청동기시대에 이르면서 청동화살촉과 청동창촉(동모)가 출현하게 되고 이 동모중에서 조금 긴 것이 검으로 변했을 거라는 추론이다.

 

일부에서는 돌칼 즉 마제석검이 청동검으로 변모했을 것으로 보나 돌칼 즉 마제석검이 실제 전쟁에서 사용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전쟁중에는 돌칼이 서로 부딪혔을 경우 대부분 깨어지기 때문에 실용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돌칼은 실생활에서 물건을 자르거나 고기를 자를 때 쓰였을 것이다.

 

특히 청동기시대의 비파형동검과 함께 발견되고 있는 마제석검은 청동검을 모방한 것으로 무덤에 부장하기 위해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요서지역의 bc3000년경의 홍산문화시대의 석곽묘에서는 비파형 동검을 모방한 비파형옥검이 무덤에 부장된채 발견된바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마제석검이 모방한 청동검은 비파형동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제석검은

손잡이가 일체형으로 된것과 비파형동검처럼 분리형으로 된 것이 섞여있는데 이는 비파형동검을 사용한 사람들이 비파형동검외에도 다른종류의 많은 검들을 사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의 청동검은 창과 같이 찌르는 용도로 쓰였다가 점차 주로 치거나 베는 용도로 바뀐다.

검이 치거나 베는 용도로 바뀌면서 검신이 길어지게 되고 검을 다루는 기술도 필요하게 된다. 검신이 길어진다는 것은 이 청동검을 만들기 위해 많은양 의 청동이 필요하고, 이 청동검이 부러지지 않도록 하기위해 재련기술이 필요하며, 이와 더불어 검을 다룰수 있는 기술(검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대의 전쟁터에서 청동검은 소수의 장수나 수장층 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위세품으로 무덤에 부장되었고 다수의 병사들은 청동창(청동과)으로 무장했다는 것이다.

 

비파형동검은 검손잡이(검병)를 따로 제작하고 이를 검신에 끼워 사용한다.

이것은 기존의 검신이 부러지면 검신만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여 검손잡이와 조합해 쓰면되고 검의 울림현상이 손으로 전달되는 것을 막을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장점은 검신을 창에 꽂아 사용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수의 비파형동검이 부러진 채 발견되고 검신만 발견될 뿐 검손잡이가 발견되지 않으며

비파형동검의 실제 크기가 30cm 내외의 단검인 것은 위의 내용을 뒷받침 할수 있다.

 

비파형동검은 검신을 창과 조합할수도 있고 검손잡이와 조합할수도 있는 다목적 검이다.

 

문제는 비파형동검의 상한연대가 bc10~9세기로 너무 늦다는 것이다.

수메르인들이 bc30세기에 청동검과 청동창으로 무장했고 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가 bc3000 년기 후반부터 나타나는데 bc35세기경 발달된 홍산문화를 계승했을 요서지역엔 bc10-9세기에나 비로소 청동검이 등장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비파형동검은 검신형태가 시베리아의 유엽형동검과 유사하다. 시베리아의 유엽형검은 대부분 검신과 검손잡이가 하나로 연결된 완성형 이지만 일부는 비파형동검과 같이 검신과 검손잡이를 따로 결합하게 되어 있는 조립형 이다. 또한 비파형동검문화의 기하학문장식이나 선형동부(도끼) 말멍에와 같은 것들이 시베리아지역의 기하학문장식이나 청동도끼 말멍에 등과 동일한 형식에 속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들어 비파형동검이 시베리아지역의 조립식동검에서 기원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조립식 동검은 bc3000년기부터 존재했었고 bc 8세기까지 그 문화가 이어졌다. 그것을 2000년이나 지난 bc10~bc9세기에 요서지역에서 받아들여 비파형동검을 탄생시켰다는 것이 말이나 될까?

 

비파형동검의 절대연대 측정을 통해 밝혀지게 되겠지만 시베리아와 마찬가지로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도 bc3000년기부터 존재 했을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홍산문화기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파형 옥검을 보면 알수 있다. 비파형 옥검은 마제석검과 마찬가지로 청동검을 모방한 것으로 무덤에 부장하기 위해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비파형동검의 연대측정은 대부분 상대연대측정에 의존해 왔다.

그것은 중국학자들이 비파형 동검을 발견하고 연구한 것은 대부분 1960년대 전후이며 1980년대 후반 홍산문화가 발견되기 이전으로 학자들의 선입견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대부분의 문화가 중국에서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고 청동기의 획기와 편년을 중국내지를 기준으로 200~300년 늦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국내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왔는데 그것은 비파형 동검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만주의 요서지역이 중국영토로 국내학자들이 검증하기 어려운 실정도 있지만 국내 역사학계의 사대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연구풍토에서 기인한 측면도 크다.

 

일부 요동지역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의 절대연대측정(탄소연대측정)결과는 bc11세기전후로 측정되는데 이것조차도 국내학자들은 무시하고 있다. 절대연대측정을 믿을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2010년초 여수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굴되어 그 연대를 조사한 결과 bc10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어 기존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는 ‘비파형동검’의 상한연대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반도 남단의 비파형 동검이 bc 10세기 것이라면 비파형 동검의 중심지이며 최초로 출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요서지역은 비파형 동검의 상한년도가 더 올라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 유적 16호 집터와 평양시 상원군 용곡리의 4 · 5호 고분에서 비파형 창끝이 발견되었는데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측정한 결과4,539+197/-197년 전으로 나타나 이 비파형 동모의 연대가 bc 26세기로 추정되며

 

평안남도 성천군 백원리 9호 고인돌에서 세형동검과 팽이형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그 제작 연대가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3,368+522/-522년, 핵분열비적법으로 3,402+533/-533년 전으로 나타나 이곳에서 발견된 세형동검이 bc14세기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북한학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비파형 동검 문화가 bc 30세기경에 발생하였다고 추정했다. 이렇게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짐에 따라 비파형동검이나 동모 또는 세형동검의 기존 학자들의 편년체계는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려워 졌다.

출처 : 고조선 그리고 요하문명
글쓴이 : 홍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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