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앵무새 죽이기】낙랑군*갈석산*한사군의 진실-낙랑군의 역사...반론 [3]

2011. 1. 30. 00:35한민족고대사

 

 

낙랑군과 조선현이 서로 분리되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런데 북위는 효창 연간(525-527)에 낙랑군이 속한 영주를 잃어버립니다.   아마도 524년에 반란을 일으켜 529년에 진압된 영주의 군벌 취덕흥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때 낙랑군이 다시 세워졌다는 것이죠.   앞에서 정광 말년(523-525년 중 어디쯤)에 낙랑군이 다시 세워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낙랑군이 먼저 설치되었고 그 후 영주가 함락된 것이지요.


반란이 진압된 뒤 534년에 영주가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위서] 지형지에는 특이한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525년 영주에 있었던 낙랑군이 537년에는 남영주에 설치되고 있는 기사입니다.   남영주는 533년에 영웅성을 치소로 해서 세워졌는데 어디일까요?   [수서] 지리지 상곡조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 遂城舊曰武遂。後魏置南營州,准營州。置五郡十一縣  수성은 옛 이름이 무수이다. 북위가 남영주를 두어 영주에 준하게 하고 5군 11현을 두었다.


남영주의 5군은 광도군*요동군*낙랑군*영구군*여군(=창려군)입니다. 북제는 5군 중 창려군만 남기고 다 폐지하였으며 수나라는 개황 원년(581년)에 주를 옮기고 583년에 창려군도 없애고 상곡군에 현들(영락현과 신창현)을 소속시켰다가 598년에 수성으로 개명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 북평군 치소가 신창(新昌)이었다고 했는데 [수서] 지리지에는 신창이 요동군의 현으로 나옵니다.   이 신창이 수성이 됩니다(영락현은 뒤에도 나오지만 신창은 더 나오지 않고 수성만 나옵니다.)


여기가 바로 비여이며 난하 하구이며 갈석산이 있는 곳입니다.   즉 남영주의 낙랑군은 북위 세조가 설치했던 조선현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자, 길고 지루해서 이따위 포스팅은 더 읽지 않겠다고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연도별로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313년   낙랑군, 한반도에서 축출되어 모용씨의 요서지방으로 이동함

432년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사민시킴.   북평군에 조           선현을 둠(낙랑군은 쇠락하여 폐지된 것 같음)

52X년   북위에서 다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함

525년   영주를 잃어버림.   낙랑군도 이 무렵 없어진 듯

537년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됨.   남영주는 [수서] 지리지에 나오는 수성임


여기서 이덕일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그는 이런 복잡한 낙랑군의 이동 따위는 거들 떠 보지도 않고 바로 [수서]로 날아갑니다.   [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이 나오니 그것만 찾으면 된다는 사고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냅니다.   [수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먼저 이덕일의 말을 다시 한번 볼까요?


■■▶ 수나라 정사인‘수서(隋書)’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改名)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창려군이 모용외의 본거지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낙랑군과 조선현이 모두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이덕일의 말은 원문과는 많이 어긋나지만 대의에는 지장이 없으니 세세히 고증하는 일은 그만 둡니다.   하지만 원문을 찾아보지도 않고 재야사가의 글을 휙 베껴 썼으리라는 의심이 강하게 드는군요)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건성건성 읽으신 분들은 문제가 아직 남았다는 것을 못 느끼신 것 같습니다.



[3-3] 갈석산碣石山에 대한 해석 부분 



[태강지리지]로 돌아갑니다.   실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쓰인 때가 280년-289년 사이입니다.   낙랑군이 요서로 이동한 것은 313년이고 갈석산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것은 동위 효정제 천평 4년(537년)입니다.   다시 한번 [사기색은]에 있는 [태강지리지]의 원문을 보시죠.


■■▶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낙랑군이 4반세기 뒤에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수성현에 올 줄 어떻게 알고 이런 것을 써놓을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앗, 그러면 여태까지 낙랑군을 추격해 온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공연한 헛고생일까요?   그럴 리가요.


같은 수성현이기는 하지만 본래 수성현은 낙랑군이 관할하던 15개 현 중 하나였습니다.   [한서] 지리지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에서의 낙랑 수성현(樂浪遂城縣)이란 낙랑군 수성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후대에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난하 하류에 자리잡은 수성현이 아닙니다)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남는 문제는 장성이 시작된다는 갈석산입니다.


[사기색은]에 나오는 [태강지리지] 인용문은 너무 짧아서 뭐라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동시대에 쓰인 [통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통전] 권 178 주군8의 좀 더 긴 인용문을 한번 보실까요?


■■▶ 盧龍漢肥如縣。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故名之。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非此碣石也。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이다.   갈석산이 있으니 해안가에 우뚝 선 모양을 보고 그 이름을 삼은 것이다.   진나라 태강지지에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한다했는데 갈석은 지금 고려의 옛 강역에 있으니 이 갈석산이 아니다.


재야사가들은 이 부분에서 늘 상 제일 뒤에 있는“이 갈석산이 아니다非此碣石也”는 인용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어지니까요.   두우는 노룡현의 갈석산은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시작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문장에서 [태강지리지]의 인용문이 어디까지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저는 매우 소극적으로“진나라에서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한다.  秦築長城 所起自碣石”부분만 [태강지리지]의 인용문으로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唐 시대인 8C 후반에 지금 진황도의 갈석산이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라고 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 여기서 [사기색은]을 다시 볼까요?


■■▶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또 [수경]에 전하기를“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북평의 갈석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통전]에는 유주 계현(薊縣)을 소개하며 계현에 갈석궁이 있었다고 적어놓았습니다.   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였으며 한나라의 계현이고 상건하가 흐르며 모용준이 도읍한 곳이라 적어놓았습니다.   이런 곳이 위만 조선이 있던 자리이며 낙랑군이 설치된 곳일 리 없죠.   연나라의 장성은 요하를 넘어갑니다.   [사기] 본기에는 진나라의 영토를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 地東至海暨朝鮮 西至臨洮 羌中 南至北嚮戶 北據河為塞 並陰山至遼東


땅이 동으로는 바다와 조선에 이르고 서로는 임조와 장중에 이르며, 남으로는 북향호에 이르고 북으로는 황하를 요새로 삼아 음산을 아우르고 요동에 이르렀다.


요동을 영토로 삼고 있는데 왜 북평의 갈석에서 만리장성을 시작했을까요?   최근 연진장성은 압록강까지 뻗어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에라이, 동북공정 추종자야라고 할 인간들이 있겠군요)   [사기] 조선열전을 잠깐 봅시다.


■■▶ 연나라는 그 전성기에 진번과 조선을 공격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고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요동외요(遼東外徼=요동 밖의 경계)에 속하게 하였다.


위 글로 보아 진나라의 경계는 요동이었습니다.   난하 하류를 경계로 할 이유가 없었죠.   물론 이덕일류는 난하를 요하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논의하는 것은 다람쥐 쳇바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전국시대 연의 영토를 이야기하는 적이 없거든요.   연은 고조선에서 2천리 땅을 빼앗는데 난하가 경계라면 그 전에는 난하에서 이천리를 물러난 곳이 연의 동쪽 경계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연은 존재할 수 없는 나라가 됩니다.   그러나 연이 난하로부터 이천리쯤 고조선 땅을 빼앗았다면 고조선은 청천강을 경계로 버틸 수 있게 되죠.   따라서 패수는 압록강이며 압록강에서 청천강 사이가 공지로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판단입니다(사기에서의 패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후대의 패수는 대동강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압록강 너머 요동 어디쯤에 갈석산이 있었죠.   후일 낙랑군 수성현이 되는 곳입니다.   그 갈석산과 노룡현의 갈석산이 후대에 와서 혼동됩니다.   또한 연진장성은 잊혀지고 산해관으로 장성이 놓이면서 갈석산이 진시황대 장성의 시작이라는 전설이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족) 노룡현의 갈석산도 역사가 짧지 않습니다.   [상서 우공편]에 황하 옆(고대에는 황하가 북경 인근으로 해서 바다로 나갔다고 합니다)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통전] 변방전 동이 고구려조에 있는 다음 기사를 한번 보시죠.


■■▶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按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石。


갈석산은 한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 전하는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우갈석은 황하 너머 바다 근처에 있는데 지금의 북평군 남쪽 이십여리 지점이므로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 된다.


재야사가들은 절대 쳐다보지도 않는 구절이죠.   고고학적 자료와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재야사가들은 평양의 낙랑 유적을 무시하는 것처럼 장성 유적도 무시하고 있죠.   유적과 문헌이 대립해도 유적이 이길 것인데 유적과 문헌이 일치하는 걸 무시하면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 [논증論證 3] ■■■■■■■■■

(난독증에 이해력 부족까지 겹쳐 뒤죽박죽인 괴이한 주장?)



필자筆者도 [앵무새]가 말한 두 번째 부류의 이야기로 넘어가서 집중해 보기로 한다.   이 대목은 다음과 같은 분석틀로 전개해 나갈 것이다.   [첫째로] 아주 친절하게 이덕일 선생의 책인『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를 예시例示로 들고 있으니 그 저서著書를 중심으로 글을 풀어나가겠다.   [둘째로] 설명의 편의상 <앵무새>의 주장을 3단락으로 구분하였으니 위 글을 대조하면서 읽으면 편할 것이다. 


풋! 이란 소리는 아무데서나 뱉는 게 아니다.   이 장章을 읽으면서 말미末尾에 이르면 바로 그 웃음이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라는 걸 저도 모르게 자각自覺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안 뜨거워졌을까?


선생의 주장들을 가지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나 바보처럼 난독증에 걸려 멍청하게 이해하였다는 명백한 사실을 필자筆者가 이미 다른 [반론]에서 충분히 피력하였다.   서점書店에서 잠깐 훑어보고 와서 수박 겉핥는 식으로 비평을 하니『책이 없으니 꼭 집어서 씹어줄 수가 없다』는 쓸데없는 푸념이나 늘어놓고 있는 경망스러움이 진동한다.


필자筆者의 졸견拙見으로는 서두序頭에 언급한대로 [일제관학자日帝官學者들이나 두계학파]의 주장이 지니고 있음직한 [반도사관]의 숨은 의도와 그런 인식 아래에서 창조된 괴이한 이론의 근본적인 모순을 밝혀내는 게 핵심 논제이기 때문에



1) [한사군漢四郡]의 위치가 한반도 및 평양 일대가 아니다.

2) 만조선滿朝鮮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

3) 처음부터 단군조선은 요서遼西-요동遼東 일대(지금의 요하遼河지역이 아닌 필자가 누누이 언급한 훨씬 서쪽방면이다)에 존재했다가 요서遼西의 일부분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했다.



라는 견해가 이제는 거의 확고하고 명료하게 [재야사학계]에서는 정립되어 가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의 역사논증은『어차피 그런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그동안 <유사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학설들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매우...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게 왜 그런지는 글을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3-1 단락] 수성현遂城縣*갈석산碣石山*요수遼水의 위치 문제에 대한 진실 찾기


이 부분에서 수성현遂城縣과 갈석산碣石山에 관한 [앵무새]와 <이덕일> 선생과의 견해 차이를 보다 면밀하게 검증하기 위해서는 원전原典 기록의 비교분석과 [앵무새]의 주장 그리고 선생의 의견에 대한 상호교차대조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가. 주요 논점論點 1


[원문原文]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사마정司馬貞 사기색은史記索隱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인용>



[이덕일 선생 견해]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수성현과 갈석산을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는 저절로 밝혀진다.   <조선일보  연재 컬럼>


낙랑군의 위치를 찾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갈석산碣石山이다.   사기 하본기夏本紀에 인용된 갈석에 관한 태강지리지의 주석에 그 단초가 나와 있다.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구절이다.   곧 갈석산이 있는 곳이 낙랑군이며 바로 만리장성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106-107p>



[앵무새의 주장]


저렇게 써놓으면 [태강지리지]가 [사기]의 일부분처럼 보입니다.   역사학자가 되어가지고 이렇게 엉터리 출전을 쓴다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태강”은 진晋나라 무제(사마염)의 연호로 280년에서 289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태강지리지]는 이때 만들어진 책으로 실전失傳된 책입니다.



[필자筆者 의견]


<이덕일> 선생의 논제는 매우 명확하다.   인용된 두 기록의 문맥이 거의 동일한 가운데 낙랑군樂浪郡의 위치를 규정하는 검증방법을 핵심 주제로 삼고 있는 정황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거典據로서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를 들고 있다.


허나 우스운 것이 지금 [앵무새]는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과 갈석산碣石山 문제를 같은 주제로 언급하면서도 이런 핵심보다는 먼저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의 저작著作 년대나 인용 출전出典의 모순을 건드리고 있다.   마치 엉뚱한 수풀 속에서 잃어버린 열쇄를 찾고 있는 꼴이다.


아울러 선생의 기록들을 비교해보았을 때 분명히 이런 사실(史記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인용 문제)을 알고 있었으며(이는 조금만 관심 있는 역사학도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관점을 자신의 견해가 그대로 표현되는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를 빌어 완전하게 기술해주고 있다.


또한 [컬럼] 특히 신문기사 게제의 속성상 대담자對談者의 이야기를 받아 적어 편집하는 과정에서 기자들이 이를 함축하거나 잘라 내거나 취사선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걸 [앵무새] 자신이 더 잘 알 터인데 왜 이런 고의적인 망발을 저지르는가?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이 대목에 들어와서는 호들갑을 떨며 파닥이던 [앵무새]도 조금은 정신을 차리고 길을 제대로 찾아 온 듯하다.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본문本文은 이렇다.



나. 주요 논점論點 2


[문헌 기록]


또 [수경]에 전하기를『(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 此云 夾右碣石入于海 當是北平之碣石



[이덕일 선생 견해]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창려현 북쪽에 있는데 창려현은 만리장성의 북쪽 끄트머리인 진황도秦皇島와 난하灤河 사이에 있는 현縣이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앵무새 주장]


어?  여기 재밌는 구절이 있군요.   갈석산이 두 개가 있답니다.   대체 이런 구절은 왜 무시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걸 이야기하면 자기들 이야기가 뻥이라는 걸 자백해야 하기 때문이죠.



[필자筆者 의견]


이런! 이런!!  여기에서 [앵무새]는 또 망발을 한다.   이 사람은 [상서尙書 우공禹貢]과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갈석碣石을 아예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인가?


필자筆者가 말해주겠다.   선생이 주요 논제로 삼고 있는 [한사군漢四郡 특히 낙랑군樂浪郡] 문제는 만리장성萬里長城 그리고 갈석산碣石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런 관계가 특히 한 세트처럼 부각되고 있는 진秦*한漢 시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재야사학계]는 논점의 명확성과 논리 전개의 선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堯*순舜*우禹 무렵인 [우공禹貢]의 갈석碣石을 일단 배제하고 진秦*한漢 시대였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갈석碣石을 한정적으로 인용한다.   즉 갈석碣石이 두개 있다는 걸 알지만 [수경水經]을 주해註解한 사마정司馬貞의 북평北平 갈석碣石을 인정한 것이다.



■■▶ 시대경과에 따른 갈석碣石의 위치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애 나오게 될 글 [3-4]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대체 갈석산이 두 개가 있다는 구절은 왜 무시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걸 이야기하면 자기들 이야기가 뻥이라는 걸 자백해야 하기 때문이죠] 라고 하며 혼자만 좋아서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 이 사람이 [어? 여기 재밌는 구절이 있군요?]라 한 우스운 경거망동이 오히려 더 재미있다.



가. 주요 논점論點 3


[문헌 기록]


수성은 옛날의 무수武遂이다.   후위에서 남영주를 설치하자 영주에서는 5군 11현을 승인해주었다.   (수성의) 용성*광흥*정황은 창려에 속한다.  遂城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5郡11縣 龍城*廣興*定荒屬昌黎縣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상곡군上谷郡>


[이덕일 선생 견해]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상곡군上谷郡 조條는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改名했다는 뜻이다.   <조선일보 컬럼>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상곡군上谷郡 조條를 보면 수성은 옛날의 무수武遂이다.   후위에서 남영주를 설치하자 영주에서는 5군 11현을 승인해주었다.   (수성의) 용성*광흥*정황은 창려에 속한다.  遂城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5郡11縣 龍城*廣興*定荒屬昌黎縣 는 구절이 있다.  


수성현이 창려현으로 변했다는 사료이다.   수성현은 당나라 때에는 북경 서쪽의 역주易州에 소속되었다는 기록들이 전한다.   이로서 갈석산이 있는 낙랑 수성현은 현재의 하북성 창려임을 의심할 바가 없게 되었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앵무새 주장]


<이덕일>은 지금 난하灤河 동쪽 대릉하大凌河 서쪽에 있는 창려현昌黎縣이 창려군昌黎郡이며 여기가 낙랑樂浪이라고 주장합니다.   갈석산碣石山도 있으니 앞뒤가 딱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상곡군上谷郡 조條]에 나오는『수성은 옛날에 무수武遂라 불렀다 遂城舊曰武遂』는 무슨 말일까요?


재야사가들 식으로 <무수武遂>를 추적해 보면 [사기史記] 본기本紀 진무왕 4년 조에『4년 의양을 점령하고 6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황하를 건너 [무수]에 성을 쌓았다』란 말이 나옵니다.   전국시대 한韓의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원곡현垣曲縣 동남쪽입니다.   그러니까 [재야사가] 식으로 말하면 여기가 바로 낙랑군樂浪郡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대체 한나라 시절 낙랑군 이야기를 왜 수나라 사서에서 찾느라 난리를 치는 걸까요?   세월이 흐르면 지명은 변합니다.   왜 저기에 낙랑이 나오는지 설명하겠습니다.



[필자筆者 의견]


<이덕일> 선생은 수성현遂城縣을 이렇게 찾고 있다.   먼저 가장 합리적인 검증을 위한 전제前提를 설정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논리적인 해석 모델을 구체적으로 만든다.  



1) 현재 진황도秦皇島와 난하灤河 사이에 위치한 창려현昌黎縣과 [사기史記]의 수성현遂城縣은 과연 연관이 있을까?


2) 현재의 창려현昌黎縣이 [사기史記]에 나온 수성현遂城縣의 후신後身이라는 증거만 있으면 낙랑군樂浪郡의 위치에 대한 오랜 논쟁은 종지부를 찍는 셈이다.



이런 과정에서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상곡군上谷郡 조條]에서 <수성현遂城縣>을 찾아내고 후위後魏 무렵 남영주南營州를 설치할 즈음 영주營州에서『5군郡 11현縣을 승인해주었다』는 기록과『(수성遂城의) 용성龍城*광흥廣興*정황定荒이 창려昌黎에 속한다』는 기술을 근거로 [수성遂城=창려昌黎]임을 증명한다.


더불어 이같은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입증 자료로서 수성현遂城縣이 당唐 때에는 북경北京 서쪽의 역주易州에 소속되었다는 기록들을 제시하면서 모두가 같은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사료적 근거로 명쾌하게 결론짓는 가운데 현現 [난하灤河-진황도秦皇島]와 일치함을 거듭 밝혀주고 있다.


[앵무새]는 이처럼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 합리적이고 기본적인 검증과정을 아예 외면하고 작심作心을 했는지 늘 하던 대로수성을 무수武遂라 불렀다 遂城舊曰武遂』는 무슨 말일까요?』라고 능청을 떨다가 슬그머니 논제의 핵심을 돌린 의문 부호를 찍는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구절에서는 천연덕스럽게 이 대목의 주요 내용이 무수武遂란 지명고地名考에 있다고 혼자만 단정하면서 난데없는 [사기史記 본기本紀 진무왕 4년 조]를 들먹이는 가운데『산서성山西省 원곡현垣曲縣 동남쪽이 재야사가 식으로 말하면 바로 낙랑군이다』라고 초점을 흐려 놓고 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는 역사에 까막눈일까?   대체 한漢 시절 낙랑군樂浪郡이 아닌 무수武遂라는 지명에 집착하여 왜 진晋나라 사서史書에서 찾느라 난리를 치는 걸까?


세월이 흘러도 한 지명이 어떤 근본적인 이유(특정한 목적을 가진 의도적인 조작 등) 때문에 변하지 않거나 민족고유의 지명이기 때문에 이동하는 사례는 늘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째서 저기에 무수武遂와 연관된 낙랑樂浪이 나오는지 설명하겠다. 



1) 먼저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상곡군上谷郡 조條]의 무수武遂는 뒤에 나오는 문맥(...후위에서 남영주를 설치하자 영주에서는 5군 11현을 승인해주었다.  『수성의』 용성*광흥*정황은 창려에 속한다)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일부러 그 대목에서 수성遂城의 구명舊名이라고 하면서 일부러 거명據名하였는지 해석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의 입장은 분명하게 [수성현遂城縣-무수武-남영주南營州 속현屬縣-영주營州 속현屬縣-창려현昌黎縣]을 같은 지역으로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선생은 이 사실을 명백히 꿰뚫고 있었으나 [앵무새]는 모르는 체 그 뒤 문장을 빼어 버려 의도적으로 자신의 입장에 맞추어 교란攪亂시키고 있다.


2) 산서성山西省 원곡현垣曲縣의 무수武遂는 필자筆者의 아래 예시例示 글를 보면 이해하겠지만 모용외慕容廆가 고구려에게 핍박받다 도주하여 귀부歸附한 장통張統을 그 지역으로 이치移置된 낙랑군樂浪郡 태수太守로 봉封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이주된 일부 조선구민朝鮮舊民과 관련되어 [무수武遂와 수무遂武]로 지명교란地名攪亂이 일어났다.



■■▶ 자세한 설명은 필자筆者의 글 [낙랑군과 관련하여 고구려의 서변 공략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한 일고찰-미천왕 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3-2 단락] 낙랑군樂浪郡에 관한 문헌기록 검증하기


가. 주요 논점論點 1


이번 글에서 보여주는 [앵무새]의 [반도 낙랑군설樂浪郡說-요수遼水의 현現 요하설遼河說-연燕의 압록강鴨綠江 유역 진출 및 청천강淸川江 경계설-연燕*진秦 장성長城의 압록강鴨綠江 이남설-사기史記 패수浿水 압록강설鴨綠江說-압록강鴨綠江과 청천강淸川江 사이의 진秦 고공지설故空地說-鴨綠江 부근 갈석산설碣石山說]을 보면


이전에 <이덕일> 선생을 비판하면서 [이병도의 수성현遂城縣 황해도黃海道 수안설遂安說]을 부정하던 태도는 무엇이었는지 필자筆者가 어리둥절해진다.   [유사식민사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것 같기 때문이다.


마치 카멜레온과도 같이 글에 따라 논지論旨가 왔다갔다 변하는 듯해서이다.   아무튼 위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글에서 반론을 제시하였으니 거두절미하고 다만 지금 이 장章에서 [앵무새]가 주장하는 핵심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된다.



1) 낙랑군은 미천왕 14년(AD 313년)에 한반도에서 축출된다.   그러나 [자치통감]을 보면 그것이 낙랑군의 끝이 아니라는 게 후대의 바보 재야사가를 혼란케 하는 것이다.


2) 모용외가 낙랑군을 두었으므로 낙랑군은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의 위치와 모용외가 설치한 지역의 두 개가 된다.   북위北魏의 [위서魏書] 세조기世祖紀를 보면 분명히 낙랑*대방이 모용외에 의해 옮겨져서 유지되고 있었다.


3) 모용씨는 시라무렌 강 상류에 살다가 AD 285년에 요동에서 일어난 모용외가 AD 289년 대능하 방면을 차지하고 AD 307년에는 선비대선우가 된다.   중심 근거지는 요서의 창려군昌黎郡으로 동진 원제가 평주 자사로 임명했다.   이때 고구려는 요동의 지배권을 놓고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본거지가 창려군이었으므로 옮겨간 낙랑군도 그 부근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요서 일대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4) 전연은 전진에게 멸망당했으나 모용수에 의해 다시 부활해 후연이라 불렀으며 작호로 <낙랑왕*대방왕>등을 내리고 있다.   모용씨의 집착은 이 정도였다.   뒤를 이은 북연의 지배자는 고구려계였던 고운高雲으로 영토는 난하 동*요하 서로 요서일대에 불과했다가 불과 1년 만에 암살당하고 풍발이 이었다(AD 409년)



[이에 대한 필자筆者 의견]



제발 [돈이 웬수라느니?  서점서 잠깐 보고 왔는데 도저히 돈 내고 살 수가 없어서 그냥 왔습니다]란 엉뚱한 소리나 말고 사서史書 한 권이라도 좀 제대로 사서 읽고 확실하게 주장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스스로 제 머리를 혼란케 만드는 바보놀음을 그칠 것 같다.  


1) 항에서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던 낙랑군樂浪郡을 미천왕美川王이 멸망시켰음은 이미 필자筆者가 이 장章의 끝에서 소개하는 글에서 밝혀두었으니 두말할 가치조차 없다.   아무튼 [앵무새]가 낙랑군樂浪郡이 여전히 지속되었다고 말하는 논거論據는 바로 아래 기록들이다.



■■▶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참군사로 삼았다.   <자치통감>


■■▶ 연화 원년(AD 432년) 영구*성조*요동*낙랑*대방*현도 6군의 백성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   <위서魏書 세조기世祖紀>



위 기록을 보아도 모용외慕容廆는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고 명시明示한 걸로 보아 이미 미천왕美川王에 의해 분명히 축출된 낙랑군樂浪郡과는 다른 지역에 이치移置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럼 과연 어디에 두었을까?


그 후로 설設한 낙랑군樂浪郡은 장통張統이 이끌고 온 무리를 합쳐 모용외慕容廆가 습취한襲取한 지역의 잔여 낙랑조선민樂浪朝鮮民들을 모아 산서성山西省의 수무遂武(무수武遂라고도 기록이 산란散亂되고 있다)에 새로이 둔 것이다(구당서舊唐書 가탐전賈眈傳에 가탐賈眈의 고금군국현도古今郡國縣道 사이술四夷述에서 요동군과 낙랑군은...서진西晋 때 강남江南으로 옮겼다고 하여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 이런 징후가 잡히는 기록이 있다.   진晋 시대에 들어서면서 혼란과 세력 각축의 와중에 고립된 낙랑군樂浪郡은 조선朝鮮 등 몇 현縣말고는 사망駟望*둔유屯有*혼미渾瀰와 같은 뜻도 알 듯 모를 듯한 현縣의 표기명表記名만을 남기는 가운데 왕망王莽이 주된 치소治所로 낙선정樂鮮亭이라 바꾼 패수浿水나 증지增地같은 현縣도 사라진다.   이미 무력화無力化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 미천왕美川王은 요동遼東과 현도玄菟 지역에서 모용외慕容廆를 상대로 완전한 힘의 우위를 확보하며 견제에 성공하자 곧바로 영정하永定河 남쪽에 있던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 등 [한군현漢郡縣]을 몰아내기 위한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 이와 연결된 [자치통감自治統監]의 기사가 AD 313년 4월이고 미천왕美川王의 낙랑군樂浪郡 침입이 같은 해 10월임을 고려할 때 4월에 장통張統이 민가民家를 거느리고 <모용외慕容廆>에게 갔다는 사실은 이미 장통張統과의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10월의 침입 기사는 사실상 전한前漢 낙랑군樂浪郡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다.


▷ 이 싸움이 해를 이어 계속되었음은 적어도 전 해인 AD 312년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양서梁書*북사北史]에서 이 시기에 미천왕美川王이 자주 요동遼東을 침범했다는 기록을 상기하면 결국 서쪽의 요동군遼東郡 지역에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모용씨慕容氏의 제어制御에 성공하자 곧장 화살을 돌려 낙랑군樂浪郡을 몰아내는 전략을 실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분명히 비중이 작지 않은 인물로서 등장하는 <장통張統>이 그 무렵 관명官名조차 지칭指稱하지 않으면서 요동遼東에서 도망하여 낙랑樂浪에 웅거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바로 그 전에 진晋의 요동태수遼東太守나 그만한 권한을 가진 실력자로서 의탁한 신분임을 짐작케 해주기 때문이다.

  


[앵무새]는 한漢 낙랑군樂浪郡이 멸망하고 새로이 이치移置된 사실까지는 아주 정확히 보았다.   그의 말대로 문헌 기록에 등장하니 [없는 군현郡縣의 백성을 북위北魏가 옮길 수는 없으므로 분명히 낙랑樂浪*대방帶方 등의 군현郡縣이 모용외慕容廆에 의해 다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전연前燕 무렵 영정하계선永定河系線을 중심으로 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평주平州의 일부를 장악한 연燕 지역에 존재했다가 북위北魏 시기 조금 확장되어 북상北上한 유주幽州로 낙랑조선인(樂浪朝鮮人-예맥조선민濊貊朝鮮民을 포함한 조선 구민舊民들)을 옮기고 있다.


또한 다음의 사료에서 정확하게 기술한 바와 같이 미천왕美川王 시대까지 고구려의 지속적인 공격과 끈질긴 압박으로 결국 원래의 낙랑樂浪은 멸망하고 대방帶方은 궤멸지경에 이르렀으며


그 서부 방면에 위치한 요동遼東과 현도玄菟조차 북위北魏에 이르러 거의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때문에 전연前燕을 멸한 전진前秦을 이어서 북방의 강자로 올라선 북위北魏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군현郡縣에 대한 전반적인 정비를 시행하고 있다.



■■▶ 낙양군은 전한 무제가 두었다.   양한兩漢과 진晋에서 낙랑이라 불렀는데 후에 고쳤다가 파하였다.   정광(AD 520-AD 525) 말년에 복구했다.    치소는 연성이다.   현을 둘 가지고 있다.   호는 219 인구는 1천 8이다.   영락현은 정광 말에 두었으며 조산鳥山이 있다.   대방현은 양한과 진에 속했는데 후에 파하였다.   정광 말에 다시 속하게 했다.


樂良郡前漢武帝置 二漢*晉曰樂浪 後改罷 正光末復 治連城 領縣二 戶二百一十九 口一千八 永洛正光末置 有鳥山 帶方二漢屬 晉屬帶方 後罷 正光末復屬   <위서 지형지>  



※ 이 때 요동군遼東郡의 호戶가 131 인구는 855에 불과하다 했으니 고구려의 침탈侵奪과 북위北魏의 습취襲取로 말미암아 허명虛名에 불과할 정도로 유명무실해졌음을 짐작케 해준다.



나. 주요 논점論點 2


하지만 3)항에서 [앵무새]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해괴망측한 [유사식민사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여준다.   이런 발상은 아래와 같은 그 당시 정세를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예 외면하는 자세로 초지일관 [두계학파]의 학설에 맹종하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과 다름없다.



미천왕美川王 시기와 맞물린 5호胡 16국國과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지만 [제2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고 표현할 만하다.   그러나 한족漢族의 정사正史에서는 이 시기를 [제2차 치욕의 시대]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즉 5호胡 16국國을 그리 인정하고 싶지도 않아『다섯 오랑캐의 굴욕스런 폭정의 시대』라고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 무렵의 지리적인 개념을 완전히 가공하였다.


한족漢族의 정사正史에서는 오로지 북방민족에게 비참하게 밀려난 [동진東晋]만을 정통으로 보았지만 북방 왕조는 이 시기를 [명호개역시대名號改易時代]로 기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새로운 사조思潮가 열린 시대변혁과 혁명의 시대라고 인식하며 자부하고 있었다(진서秦書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이차적으로 각 왕조마다 과장된 역사 기록이(일시 정주定住를 지속적인 지배로 기술하는 사례들) 등장한다.


[명호개역시대名號改易時代]는 북중국 일대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적 용어였으며 지명고地名考에 대한 중복과 교란은 그 시대를 관통하던 정치적 지리적 표기관습이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대륙에서의 나라 이름이 바꾸어진 변화의 시기]였음을 명백하고 긍정적인 사유思惟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경향은 그 무렵 고구려의 외교정책에서도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신들...다시 말해 완연한 동방문화제국이며 자생적인 북방기마민족국가의 후예답게 스스로의 전통에 부합한 정체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정치체계를 알린다는 시위였고 이를 통하여 정착민족인 한족漢族의 남부 대륙 중심지역들을 온전하게 지배하였다는 우월감의 발로였다.



따라서 선비족鮮卑族의 일원인 모용외慕容廆도 회제懷帝와 민제愍帝가 잇따라 시해를 당하면서 서진西晉이 멸망하고 동진東晋이 세워지니 동진東晋의 원제元帝가 내린 대선우大單于*창려공昌黎公이란 벼슬과 작위爵位를 거부하면서 자립하려는 데에만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러므로 <모용외慕容廆>의 진출 경로와 자립지自立地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위와 같은 정세변화와 전연前燕 이전부터 꾸준히 진행되던 북방민족의 진입과 맞물려 중첩되고 교란攪亂된 지명地名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검증이 선행되어야 한다.


선비鮮卑를 처음으로 중흥시킨 단석괴檀石槐를 보좌하던 삼부대인三部大人 가운데 우북평右北平 서부와 상곡上谷까지의 지역을 관할한 모용대인慕容大人의 후예로 인식되고 있던 모용씨慕庸氏의 요동遼東 진입 경위를 추적해보면 아래와 같다. 



가) 증조曾祖 막(모)호발莫(慕)護跋이 사마의司馬懿의 공손씨公孫氏 토벌 때 공功이 있어 솔의왕率義王에 봉封해져 극성棘城에 처음 나라를 세웠는데 모두 이 지역을 요서遼西로 기록한다(初鮮卑慕護跋自塞外入居遼西棘城之北).  


   공손연公孫淵 때 요서遼西는 [상간하桑干河-영정하永定河] 남쪽이었음은 필자筆者가 이미 다른 글에서 설명한 바 있다(16국國 춘추春秋 진서晋書 재기載記*自治統鑑 太康2년 조*魏書와 北史 참조).   따라서 극성棘城도 지금의 유성柳城에 있지 않았다.


※ 모용선비慕容鮮卑는 조조曹操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오환烏丸을 교묘한 계책으로 궤멸시키는 기회를 빌어 부족을 이끌고 빈 자리인 요서遼西에 들어와 조위曹魏와 관련을 맺게 된다. 



■■▶ (慕容廆) 曾祖莫護跋魏初率其諸部立居遼西從宣帝伐公孫氏有功拜率義王始建國於棘城之北   <진서晋書 권108 재기載記8 모용외전>


■■▶ 棘城在昌黎縣界是後慕容氏置棘城縣   <자치통감自治統鑑 권81 진무제晋武帝 태강太康 2년 조條의 호삼성胡三省 주註>



나) 조부祖父 목연木延은 관구검毌丘儉을 따라 고구려를 벌한 공으로 좌현왕左顯王이 되었고 아들 섭귀涉歸는『전유성지공全柳城之功』이 있어 서진西晋 성립 후 <진배선비선우進拜鮮卑單于>로서 요동遼東 북쪽(이 시기의 정세 변화와 모용씨慕容氏의 이동방향으로 보아 상곡上谷에서 조금 더 진입한 어양漁陽 부근이다)으로 이거移居한다(魏書*北史*晋書*自治統鑑 참조).



■■▶ 莫護跋生木延 木延生涉歸 遷於遼東之北世附中國   <자치통감 권81 진무제 태강 2년 조>


■■▶ 祖木延從毌丘儉征高麗有功加號左賢王父涉歸以勤進拜鮮卑單于遷邑遼東   <위서魏書 권95 열전83 사하모용외전徙河慕容廆傳>


■■▶ 正始5年(AD 244) 9월 鮮卑內附置遼東屬國立昌黎縣以居之   <삼국지>


후한後漢 무렵에는 요동속국遼東屬國에 창요昌遼가 있는데 위魏에 와서 처음으로 [입창려현立昌黎縣]하고 있다.   이 시기엔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입하지 않았다(정시正始 7년 AD 246 침공).   그러므로 요동遼東은 한漢시대 그대로의 위치였다.



다) 진晋 무제武帝는 유주幽州를 나누어 평주平州를 두었다 하는데(AD 274-AD 276 사이  진서晋書*자치통감 태강 원년 조와 송서宋書 주군지州郡志) 관구검毌丘儉의 침입 이후 요동遼東의 일부가 위魏에 속했다가 진晋으로 넘어갔으므로


  관할하게 된 요동遼東 지역을 발판으로『幽治涿 分遼東爲平治昌黎』했다는 <두우杜佑>의 해석이 가장 옳다고 보여 진다.   한漢의 창요(昌遼-천요天遼)나 위魏의 창려昌黎와 같거나 혹은 비슷한 다른 지역에 진晋에 비로소 창려昌黎가 설치된 시점이다.



■■▶ 分幽州5郡置平州   <진서晋書 권3 무제기武帝紀 진시秦始 10년 조>


■■▶ 咸寧 2년(AD 276) 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君國置平州   <진서 권14 지리지 평주 조>


■■▶ 太康 元年 天下統一凡16州...後分...分幽爲平...二十矣   <송서 주군지>


■■▶ 幽治涿 分遼東爲平治昌黎   <두우杜佑의 주석註釋>



라) 따라서『AD 283 秋7月 罷平州寧州刺史三年一秦事-자치통감 태강太康 3년』의 기록을 믿는다면(하지만 함령咸寧 5년인 AD 279년의 주注에는 평주平州나 평주자사平州刺史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다) 한때 없어졌던 평주平州가 진서晋書에서는 태강太康 3년 이후에도 나타나니 탈취한 [난하灤河 남부-영정하永定河 남방 일부] 사이에 위치해 있던


    요서遼西의 창려昌黎*요동속국遼東屬國*현도玄菟*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을 관할했을 것이다(허나 [진태강3년지기晋太康3年地記]엔 요동군遼東郡과 현도군玄菟郡이 없다.   이미 고구려의 소유였기 때문이란 추측이 강하게 든다).   바로 평주平州가 <모용외慕容廆>의 주 활동영역이었다는 반증이 되는데 이 때문에 이 무렵 북방 세력의 격돌과 각축으로 지명기록의 산란散亂이 유난히 심한 걸 추정케 해준다.



■■▶ 咸寧5年(AD 279) 舊都督有四今幷監軍乃盈於十...禹分九州今之刺史幾向一倍   <자치통감>



마) 섭귀涉歸가 죽은 후 동생인 산刪의 난을 제압하고 자리를 이은 모용외慕容廆는 우문선비于文鮮卑와 단선비段鮮卑의 압박에 못 견디어『(遼東避遠)徙河之靑山-자치통감 태강 4년과 10년 조*진서晋書 태강 10년 조*16국 춘추春秋 태강 10년 조 등』을 하고 있다.   분명히 섭귀涉歸가 이거移居한 [요동遼東의 북쪽]에서 사하徙河로 옮겨 대극성大棘城(막호발莫護跋의 극성棘城과는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지명 비정比定에서 착각이 일어나지 않는다)을 짓고 정도定都 했다는 것이다(AD 289-AD 296).



■■▶ 太康 6年(AD 289)又遷于徙河之靑山廆以大棘城(AD 294)卽顓頊之墟也   <진서 권108 재기8 모용외전>


■■▶ 漢徙河之靑山在郡城東190里 棘城卽顓頊之墟在郡城東南170里   <통전通典 권179 주군전州郡典 영주營州 유성현柳城縣 조>



❶ <모용외>의『又遷于徙河之靑山廆以大棘城卽帝顓頊之墟也』란 기록을 [진서晋書*16국 춘추春秋*자치통감]과 대조해 보면 [전욱지허顓頊之墟=사하徙河=창려昌黎=대극성大棘城=자몽지읍紫夢之邑]이다.


❷ 사하徙河는 전한前漢의 요서군속遼西郡屬이며 후한後漢의 요동속국遼東屬國이고 위魏*진晋 무렵엔 창려군계昌黎郡界로 군郡의 변방이었다.   그런데 정시 5년에 <立昌黎縣>하였으므로 그곳이 [帝顓頊之墟]이며 [紫夢之邑-晋書 武帝記 모용외載記]으로 보인다.


❸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주注에서 <전욱지허>를 [군국지君國志의 변주汴州 옹구현雍丘縣*일통지一統志의 개봉부開封府 기현杞縣과 보정부성保定府城*외기外紀의 복양濮陽*상부相傳의 하간부河間府 임구현任丘縣]으로 다양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요서遼西가 상간하桑干河-영정하永定河 계선系線 남쪽임을 감안할 때 [보정부保定府]가 사하徙河이며 창려昌黎지역으로 가장 알맞다(후일의 창려昌黎 지역보다는 훨씬 남쪽이었던가? 넓은 영역이었던가? 하였음을 추정케 한다).


❹ 모용황慕容皝이 천도遷都한 [용성龍城]이 유성柳城에 있었는데(...築龍城構宮廟改柳城爲龍城縣=진서晋書 모용황전慕容皝傳) 이 지명은 분명히 당唐 이후부터 대릉하大凌河유역으로 옮겨졌다(古柳城在河間府鹽山縣東70里一名柳亭城-大明一統志).   따라서 한漢-진晋 시기까지는 하간부河間府 염산현鹽山縣이었으니 결국 이곳이 [고양지허高陽之墟-유성柳城-용성龍城]이며 요서遼西 지역임이 재확인 된다.


※ 이 무렵 용성龍城 안에 화룡궁和龍宮을 지어 모용씨의 도읍지를 용성龍城과 화룡和龍으로 두루 사용한 계기를 만들었다.



아무튼 [산상왕山上王-동천왕東川王] 시기까지 고구려는 거듭 실책을 범하여 대륙 동남부 진출의 입지가 약간 위축됨으로서 [미천왕美川王]이 자리에 오를 무렵에는 한족漢族의 군현郡縣이 적지 않게 확장되어 요동군遼東郡과 현토군玄菟郡이 영정하永定河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었고 요서군遼西郡이 서남쪽에 있었다는 점을 잘 명심하기 바란다.


※ 모용외慕容廆(자치통감은 모용섭귀)가 요서遼西 우문씨宇文氏를 치자(AD 281) 진무제晋武帝가 노해 유주제군幽州諸郡으로 파破하였으며 이듬 해 창려昌黎를 침범하니 평주자사平州刺史(선우영鮮于嬰)와 유주제군幽州諸郡이 협력하여 토벌하고 있어 이 무렵 유주幽州에서 분리된 평주平州가 명목뿐인 미약한 주州였음을 짐작케 해준다(晋書*晋書載記).



결국 모용외慕容廆는 공손씨公孫氏의 영역(필자筆者가 말하는 평주平州 지역)을 확보하면서 전연前燕을 개창開倉하고 있다.   이어 후조後趙를 멸하고 그 지역을 흡수하여 영정하永定河 남쪽 일부와 산동山東 지역에 이르는 황하黃河 남북부 지방을 주主 강역으로 삼은 다음


 

출처 : 하나가라 우리나라
글쓴이 : 대수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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