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앵무새 죽이기】유사역사학이 지명 찾는 엉터리...열수를 찾아라...반론

2011. 1. 30. 00:14한민족고대사

 

 

【앵무새 죽이기】유사역사학이 지명을 찾는 엉터리 수작, 재야의 망상사학 5 - 열수를 찾아라...반론



유사역사학에서는 대동강은 죽어도 열수가 아니라고 한다. 무슨 이유일까?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없다. 그냥 자신들이 내려놓은 결론, 고조선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것에 위배되기 때문에 아니라고 할 뿐이다. 정말 그럴까?


대동강도 매우 큰 강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대동강을 이루는 강은 꽤 많다.   사기 조선열전에 주석을 단 장안은 "열수는 습수(濕水), 산수(汕水), 열수(洌水)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이것을 대동강에 끼워맞춰볼 수도 있다.


대동강은 한강처럼 두 개의 큰 강줄기가 평양 조금 전에 합류하게 된다.   북쪽 낭림산맥에서 기원한 것이 대동강의 본류다. 이 북쪽 강에 합류하는 강을 주워섬겨보자.


금성강, 내창강, 애창강, 맹산강, 마탄강, 시량강, 정천, 금천강, 신천


또한 이 북쪽 강에 합류하는 큰 강이 비류강이다. 이 비류강도 여러 지류를 가지고 있다.


평원천, 기창후천


남강의 지류는 또 이렇다.


두무강, 곡산천, 남강, 약수천, 송강천, 봉명천, 용천, 율리천, 상원강


이렇게 두 강이 합류하고 나서도 여러 지류가 대동강에 합류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평양성을 끼고 흐르는 보통강이다. 그외에도 이런 강들이 합류한다.


순화강, 곤양강, 매상천, 황주강, 청천


대동강 하구에서 합류하는 재령강은 워낙 하류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마치 다른 강처럼 보인다. 재령강의 지류는 다음과 같다.


문암천, 염탄강, 서강, 은파천, 서흥강


대동강이라는 이름의 대동(大同)이라는 말 자체가 이렇게 많은 강들이 합류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습수 , 산수, 열수는 남강, 비룡강, 대동강일 수도 있고 보통강, 남강, 대동강일 수도 있고 남강, 재령강, 대동강일 수도 있다.


사실 재령강은 너무 하류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이 강들이 모여 열수가 된다는 장안의 주석에는 위배된다 하겠다.  아무튼 강 줄기가 어떻다 하여 대동강이 열수가 아니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하겠다.   고려 문인 최자는


洌水所匯名爲大同  열수는 물이 돌고 돌므로 대동이라 이름하였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저기서 열수는 사기집해에 나오는 열수일 수도 있고, 여러 강물이라는 뜻일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사기집해의 열수 자체가 여러 강물이 모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고지도 하나를 보자. 동국여지도 평안도 지도다.



대동강 본류인 북쪽 강을 순천강이라 쓰고 있다. 그 아래 비류강이 보인다. 비류강은 북쪽 강에 합류하는 것인데, 이 점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남강에 합류하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그럼 환○들은 열수를 어디서 찾을까? 이 사람들이 열심히 중국 땅에서 열수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름불변의 법칙을 믿는 이들이 기어이 하나 찾아낸 이름이 습수. 그럼 이들이 주장하는 열수의 증거를 보자. [우적도]에 나오는 습수가 열수라고 주장한다.



이 강은 지류가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습수 자체는 고수(沽水)라는 강의 지류에 불과하다. 지금 북경, 천진 아래를 흐르는 강에서 열수를 찾는 것인데, 세 강이 합해서 열수가 되었다는 기록에도 위배된다. 지류의 이름에 불과한 습수를 하나 찾아놓고는 열수라고 우기는 것이다.



[앵무새들의 합창]


[토르끼]     큰 강에는 쪼그만 찌질이들이 많군요 'ㅅ' 

[초록불]     토르끼님 / 대동강이 열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습수가 열수일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하겠습니다. 

[非狼]      뭐, 재야는 어쩔수 없는 재야일까요.   증거 보다는 직관!! 이란건지... 

[초록불]    非狼님 / 직관이 아니라... 망상일 뿐입니다. 우적도에 보이듯이 저 지역, 지금은 상건하, 해하, 영정하 등이 흐르는 저 지역은 고만고만한 강들이 수없이 밀집한 지역입니다. 그런 곳에선 세 개의 강이 합류하네 어쩌네 하는 말이 나올 이유도, 필요도 없지요. 직관만 있어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답니다. 

[해양]      습수 선수 열수가 있는데, 이 삼수가 합쳐져서 열수가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경우...옛날에 강이 각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불렀던 경우에서도 "또하나의 추측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세 물줄기는 습수와 선수가 "남강과 합류 하기 전의 대동강", 그리고 "남강본류", 그리고 열수가 "두 강이 합류하여 남포로 빠져나가는 강"....


            물론 이 경우는 이수(二水)가 합쳐져서 열수가 된다(爲洌水)라는 표현에 가까울 수 있지만, 표현의 차이일 수 있지 않을지...추측의 단서는, 강원도 춘천이 북한강과 소양강의 합류지점에 있는데, 조선시대에 이 북한강을 각 지역에 따라 "대체로" 소양강과 합류지점 이북은 "모진강", 그 이남은 "신연강"으로 불렀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누선장군이 거슬러 올라온 열수는 바로 남포로부터 대동강 남강 합류지점까지를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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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筆者 반론】


1.  예족濊族의 지명 고찰考察



호불여지국이 있는데 성이 열烈이며 기장을 먹는다.  有胡不與之國 烈姓 黍食   <산해경山海經 권17 대황북경大荒北經>


청장수는 장무현 옛 성 서쪽인 옛 예읍을 돌아 흐른다.   강물의 한 갈래가 나오는데 예수라 한다.   淸漳巡章武縣故城西 故濊邑也 枝瀆出焉 謂之濊水   <수경주水經注 청장수淸漳水 조條 력도원酈道元의 주석註釋>



필자筆者는 앞선 글에서 [단군조선]의 양대 산맥인 예인濊人들이 하북성河北省에서 예수濊水와 예읍濊邑을 중심지로 삼아 넓게 퍼져 정주定住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이들을 한족漢族 사서史書에서는 그들이 인식 한대로 [예濊*예穢*예薉]로 표기했다.



❶ 왕회해王會解*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삼국지三國志*후한서後漢書*통전通典은 예濊

❷ 사부비요본四部備要本*한서무제기漢書武帝紀에는 예薉

❸ 사기흉노전史記匈奴傳*한서식화지漢書食貨志*왕망전王莽傳*진서晋書*위서魏書는 예穢



이쯤에서 주목할 사실이 있다.   우리 민족은 결코 스스로를 [예濊]라고 하지 않았음을 염두에 둘 때 부족명部族名으로서의 [예濊]가 한족漢族의 음차音借라면 한음漢音으로서 <후이>라고 한다는 부분(사해辭海의『예濊』 소리 값 참조)을 유념해야 한다.


그렇다면 순수한 우리말은 무엇이었을까?   음가音價가 비슷하다고 가정할 경우 [후~위夫餘]가 이자동음異字同音이 된다.  단군조선 부여계扶餘系의 일지一支가 예족濊族임이 분명한 사실과 절묘하게 일치되는 것이다.



❶ 고리국槀離國 왕자王子 동명東明이 [부여夫餘]에 가서 개국開國했는데 그 지역을 한족漢族 문헌들은 [예지濊地]라고 기록했다.   분명히 동일 지역에 대한 다른 명칭이다.   아래 기록을 보아도 동명東明이 예지濊地로 가서 부여夫餘를 건국하고 있음을 잘 알려준다.



북이北夷 탁리국槖離國 왕자王子 동명東明이 부여왕夫餘王이 되었다.   <논형論衡 권2 길험편吉驗篇*후한서後漢書 부여전扶餘傳>


그 도장의 글에 예왕지인이라 하고 나라 안에 옛 성이 있는데 예성이라 한다.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  其印文言 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삼국지三國志 부여전>


부여는...본래 예의 땅이다.   夫餘國...本濊地也   <후한서後漢書 부여전>



즉 부여夫餘란 명칭은 동명東明이 처음 사용한 게 아니라 이미 거주하고 있었던 예족(濊族-부여인夫餘人)들이 부르고 있던 지명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부여지夫餘地에서 [예왕지인濊王之印]이 나왔다는 진하秦夏 사서史書의 기록이 증명해준다.


그 지역은 부여夫餘 사람들의 말로서는 부여夫餘 땅이며 화하인華夏人들이 기록한 예지濊地였다.   동명東明이 부여夫餘를 개창開倉하면서 같은 지역 이름으로서 국명國名을 삼았는데 이를 음차音借한 한인漢人들이 [예濊와 부여夫餘]로 달리 기록한 듯하다.    왜냐하면 모두 동음이자(同音異字-후이*후~위)이기 때문이다.



※ 우리말로 예濊와 부여夫餘의 소리 값은 동일한 고대 단군조선 어군語群이며 한자漢字로 예濊라 기록되어진 까닭은 동명東明이 나라 이름으로 부여夫餘를 썼기 때문에 그 음가音價를 취하는 과정에서 과거부터 인식하고 있었던 예인의 관념을 받아들여 [예濊]로 기술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무렵에 부여왕은 장례로 사용한 옥갑을 전세의 보물로 여겼다.   거기 새겨진 글에 예맥의 왕이라 말하였다.   나라에 옛 성이 있는데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  漢時夫餘王 葬用玉匣傳世以爲寶 其印文言穢貊之王 國有故城蓋本穢貊之地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사람들이 스스로 예인濊人이라고 하지 않은 바에야 그리고 부여왕夫餘王 자신도 한족漢族의 호칭呼稱을 빌어 예왕濊王으로 칭稱했을 리도 만무하니 [부여夫餘]가 고대 우리말의 이두식吏讀式 표기인 이상


한인漢人들이 그 소리 값을 [예濊]로 음사音寫한 것이라고 보여 진다(원래 부여왕지인夫餘王之印이란 표기를 한인漢人들이 예왕지인濊王之印으로 인정하여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왜냐하면 한인漢人들은 [동방민족]을 노골적인 명칭으로 비하卑下하여 기록했는데 구태여 그런 멸시적인 명칭을 스스로 붙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 맥족貊族    오랑캐라는 의미인 맥貊

2) 예족濊族    더럽다*거칠다*잡초란 뜻인 예濊*예穢

3) 흉노匈奴    오랑캐 노예라는 말인 흉노匈奴

4) 선비鮮卑    천하고 저속한 무리라는 선비鮮卑

5) 유연柔然    꿈틀거리는 징그러운 벌레로 표현한 유유蠕蠕



2. 부여계夫餘系 어군語群과 열(列-열烈*열熱)과의 상호관련성



부여夫餘의 의미는 [불*벌*부리]로서 이두吏讀로는 [불이不二*불이不而*부리夫里*불여不輿(與)*비리卑離*부리夫犁*부려夫黎*발發*벌伐]이라는 다양한 언어형태소를 가지고 나타난다.   단군조선족이 예로부터 [밝고 환하다는 의미]의 언어군言語群을 지니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말소리 값은 매우 다양하게 전화轉化하였는데 [밝*박*붉*불*벌*환*한] 등으로 진화하는 가운데 우리의 이두문吏讀文이나 진하인秦夏人들의 인식체계 안에서 뜻 옮김과 소리 옮김으로 다시 재생산 과정을 거쳐 기록되어진다.


특히 [붉과 불과 벌]은 [부루夫婁*부리夫離*불不*불이不而*비리卑離*벌伐]와 같은 소리 옮김과 [단檀*단丹*주朱*적赤*홍紅*자紫*화火*열熱*해解*해奚*나那*내奈*라羅]등의 한자어漢字語 뜻 옮김으로 즐겨 사용되었는데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동의이사형同意異寫形인 [불-열熱-열烈-열列]의 형태소가 만들어졌다.   이를 입증해주는 여러 기록들이 보인다.



❶ [산해경山海經]의 기록에서도 불여국不輿國의 성씨姓氏를 [열烈]이라 했다.



<곽박郭璞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주注>에『부여夫餘는 불여不輿라 하는데 호(胡-부여)와 이(夷-단군조선)의 말로는 서로 통한다.  有胡不與之國(一國復名耳 今胡夷語皆通然)』라 하고 있다.


아울러『...열성烈姓인데 <학의행郝懿行>은 열성烈姓이 모두 염제 신농의 후예이며 좌전에서는 열산씨를 여산씨라고 했다.   <정강성>은 여산은 신농씨가 정착한 곳으로 다른 이름으로 열산이라 한다.  烈姓(懿行案烈姓皆炎帝神農之裔 左傳稱烈山氏祭法作厲山氏 鄭康成注云厲山神農所定一曰有烈山)』라 하며


부여夫餘를 <불여지국不輿之國>으로 그 족성族姓을 <열씨列氏>로 시조始祖를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로 적고 있으니 부여夫餘의 기원이 매우 오래됨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여夫餘를 <호胡>로 부른다하여 <부여夫餘*부여扶餘*부려扶黎*불여不與*호胡>가 모두 같은 집단을 지칭함을 알 수 있다.



❷ 같은 부여계夫餘系 예족濊族의 정착지 지명으로서 영동예嶺東濊에서 동일한 음가音價인 [불이不而-불내不耐]와 [불여不黎로서 화려華麗]가 나타난다.



무열수武列水인 난하灤河를 포함한 주변 지역에서 폭넓게 단군조선계 어군語群들이 집중적으로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불령지不令支*부도하(휴)不屠河(休)*발조선發朝鮮*발식신發息愼*발인發人*불내예不耐濊 등을 염두에 두면 된다.



❸ 같은 소리 값인 [후이-예濊]로서 한자漢字 차음借音된 부여계夫餘系 정주定住 지역과 동일하게 분포되어짐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눈여겨 볼 점은 열산씨烈山氏와 여산씨厲山氏가 통하며(학의행郝懿行) 열산烈山을 여산厲山이라고(정강성鄭康成) 한 기록이다.   이 사실로 미루어 그 당시 [열烈*열熱과 여厲]는 서로 넘나들며 이는 [여黎*여餘]와도 음가音價가 같음을 알게 해준다.



❹ 동일계열의 지명고地名考로서 추정되는 [열고야列姑射*열양列陽] 등의 명칭이 발해만渤海灣을 중심으로 하북河北 지역에서 주로 등장한다.



[불*벌]과 같은 의미로서의 [화火*열熱]은 이두吏讀 표기로서는 [불*벌이나 나*라*나라]를 의미하는 동일한 음운音韻을 갖는다.   <류렬  세 나라 시기 리두의 연구>



[열혜熱兮]   나라-기   ※나*내*나라*라는 불*벌과 같은 의미이다.

[사열이沙熱伊*성열省熱]  사--리 

[매열차買熱次]  마--시

[사정화史定火]  시러-부루(불)

[비자화比自火*비사화比斯火]  비사(시)-부루(불) ※ 비사벌比斯伐

[굴화屈火]  구루-부루(불)

[상화촌上火村]  다라-부루(불)



조선은 열수列水의 북쪽에 있으며 바다의 북쪽과 산의 남방에 임한다.   열양은 (본래 조선지였으나) 연에 속했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산해경山海經 권12 해내북경海內北經>



❺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주실周室 제후국諸侯國과 접촉했던 [열인烈人]의 기록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이 모두 [단군조선 제국]의 일원一員이었다는 사실은 BC 6C 이전으로 추정되는 아래의 기록이 더욱 명백히 해주고 있다.   [왕회해王會解]는 서주西周에서 제후諸侯의 입조入朝와 주변 세력과의 회합을 기록한 편篇이다.


외부 민족이 참석하는 위치가 거주 지역에 맞게 설정되었으며 주왕조周王朝의 동방에 있던 세력들은 모두 회의장의 동쪽에 따로 앉아 서편을 향했다(西面者).   바로 동방족임을 한눈에 깨닫게 해주는데


정북방에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대리자인 숙신肅愼을 중심으로 [바로 인접한 예인濊人-양이良夷-양주楊州-해解-발인發人-유인兪人-청구靑丘]의 순서였다.   서주西周 시기의 동방 지역에 대한 인식에 매우 한계가 있음을 고려할 때 이들은 모두 서주西周 왕실王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접촉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해준다.


이를 뚜렷하게 밝혀주는 기록이 보인다.   [관자管子 규도편揆度篇]에서 발發*조선朝鮮 지역을 자신들의 관경觀境 안에 인접한 [해내海內]로 보고 있다.   현現 사학계史學界에서 주장하는 먼 한반도韓半島 지역으로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成周之會...西面者 正北方 肅愼大○ 濊人前兒 前兒獼猴 立 行 聲似小兒 良夷在子 在子乂身人首 脂其腹 炙之霍則鳴 曰在子 楊州禹貢 解隃冠 發人鹿人 鹿者若鹿迅走 兪人雖馬 靑丘狐 九尾...<일주서逸周書 권7 왕회해王會解>


환공이 묻자 관자가 말했다.   내가 듣기를 해내에 소중한 것이 7가지가 있다는데 가르침을 들어볼 수 있소?   관자가 대답하기를 음산의 옥돌이 그 하나이며 연의 자산에서 나는 백금이 하나이고 발과 식신의 문피가 하나입니다...


桓公問管子曰 吾聞海內玉弊有七筴 可得而聞乎 管子對曰 陰山之礌礝一筴也 燕之紫山白金一筴也 發朝鮮之文皮一筴也...<관자管子 규도편揆度篇>



따라서 이들은 아무리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하북河北을 넘지 않았을 것이며 결국 단군조선족의 강수江水 가운데 하나로서 [예인濊人의 강江]인 [예수濊水]가 하북성河北省 중부에 있었으니 [열인烈人의 강江]으로서 [열수烈水]도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보여 진다.



※ [왕회해王會解]에서 동시에 언급한 북방족으로서는 [고이高夷*고죽孤竹*불령지不令支*부도하不屠何*산융山戎*동호東胡]를 들고 있는데 <공씨孔氏 주注>에서 모두 [동북이東北夷-맥족貊族]로 주해註解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관자管子 소광편小匡篇도 참조).  


  따라서 먼저 언급한 세력들이 대부분 동방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예족濊族임이 밝혀지며 숙신肅愼은 이들 양대 제후국諸侯國 세력을 거느리고 주실周室을 방문한 것이다.   결국 예족濊族은 [산서성山西省-하북성河北省]중남부에 정착하고 있었다.



3. 이른바 열수烈水에 관한 문제



[단군조선계] 지명이나 관련된 동방민족의 정착지역이 모두 난하灤河 남쪽에서 예수濊水 지역까지 고르게 퍼져있으며 예인濊人들의 강江을 예수濊水*예족濊族들의 고장을 예읍濊邑이라 하듯이


열인列人들로 지칭된 사람들의 고장인 열고야列姑射나 열양列陽 등의 지명고地名考가 있는 지역에서 열인列人들의 강江인 열수列水를 찾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그럼 열수列水가 있는 지역은 어디일까?   이와 관련하여 문헌기록에 주목할 만한 기술이 있다.   원문原文을 보기로 하자.



조선은 열수列水의 북쪽에 있으며 바다의 북쪽과 산의 남방에 임한다.   열양은 (본래 조선지였으나) 연에 속했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산해경山海經 권12 해내북경海內北經>


열고야가 바다의 한 가운데에 있다(곽박郭璞 주注  바다 가운데 황하물이 지나가는 곳이라 했으니 황하黃河 하구河口의 삼각주를 가리킨다.  在海中河水所經者).  列姑射在海河州中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


야고국이 바다 한 가운데 있는데 열고야에 속하며 서남쪽을 산이 에워싸고 있다(원가袁珂는 고야국姑射國의 잘못으로 본다).  射姑國在海中 屬列姑射 西南山環之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   열은 또한 물 이름이며 지금의 대방에 위치하고 대방에 열구현이 있다.   朝鮮今樂浪縣箕子所封地 列亦水名也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   <곽박郭璞의 주석註釋>


지리지에 이르기를 낙랑군 조선이 있고 탄열과 여산을 가르며 열수가 나와 서쪽으로 점선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다시 이르기를 함자에서 대수가 서쪽으로 대방에서 바다에 들어간다.   또한 대방과 열구가 함께 낙랑군에 속한다.   진서지리지에 열구는 대방군에 속한다. 


案地理志云 樂浪郡朝鮮 又呑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 又云 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 又帶方列口並屬樂浪郡 晋書地理志 列口屬帶方郡    <학의행郝懿行의 주注>



열수列水가 예인濊人들의 주主 정착지인 하북성河北省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해주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기록을 보면 분명하게 열인列人의 고장이나 나라들도 한족漢族들이 해내海內라고 인식한 지역(한반도가 아닌 대륙 河北 지역)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다 확실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우중국이 있고 열양국이 있다.  有禺中之國 有列襄之國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


흉노와 개제국 그리고 열인국이 모두 서북쪽에 있다(오승지吳承志는 내용으로 보아 해내북경海內北經 태행산맥太行山脈 부근 설명인 태행백太行伯 절節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석註釋한다-산해경지리금석山海經地理今釋 권6).  匈奴開題之國列人之國並在西北   <산해경山海經 해내남경海內南經>


위혜왕 17년 대(비?)와 열을 공격한 후 한단에서 열인들을 거두었다.   魏惠王 17年(BC 362) 代(肥?)列邯鄲取列人   <죽서기년竹書紀年>


탄열현에 열수列水가 있는데 강의 길이가 820리이다.   <낙랑군樂浪郡 탄열현呑列縣에 대한 안사고顔師古 주注>



[후한서군국지後漢書郡國志*지명대사전地名大辭典]에서는 한漢이 열인列人들이 살던 곳에 열인현(列人縣-거록군鉅鹿郡)을 두었고 북제北齊가 없앴는데 고성(故城-열인성列人城)이 하북성河北省 비향현肥鄕縣 동북東北 15리에 있다고 한다.



[사족蛇足]



우리는 앞서 언급한 혹은 앞으로 이야기할 사서史書의 기록들을 통해 그동안의 편협한 시각을 벗어나 보다 개방된 안목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고대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결코 오늘날의 지리적인 개념이나 다소 악의적으로 함몰된 구태의연한 역사 인식에 구애를 받아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안일하고 타성에 젖은 역사관에 사로잡혀 보이는 것들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런 기술들이 왜? 어떻게 하여 정사正史에 등장하고 있는지 공정하고 합리적인 잣대를 가지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고전古典 뿐 만 아니라 한족漢族들의 사서史書에도 엄연히 나타나는 사실들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일 고래古來로부터 [동방민족]들이 그 지역에서 정착한 일이 없다면 진하秦夏의 이름 있는 인물들까지 어째서 그들의 문헌에 지속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를 먼저 연구해야 하는 게 진정한 역사학도이며 올바른 역사연구 태도이다.



4. 그렇다면 열수列水의 위치를 말해주는 기록들이 있을까?



앞선 문헌 기록에서도 잠깐 비추었지만(길이가 820리이다) 당시의 화하인華夏人이나 열인列人들에게 각인刻印된 강수江水로서 열수列水는 작은 강이 아니다.   그리고 그만한 연장延長을 가지고 있는 하수河水라면 [앵무새]가 장황하게 언급한 [샛강이나 개천을 합수合水하는...] 따위도 아니며 더구나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명칭 자체가 단군조선계 열인列人들이 [우리말 한수-대수大水]로서 지표강수指標江水로 삼은 물길이니(한족漢族의 기록 가운데 단군조선족들이 대수大水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룬다는 구절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에 걸 맞는 하수河水로서 사서史書에 등장하고 있는지?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한번 기록을 함께 찾아보자.



[기록 1]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   열은 또한 물 이름이며 지금의 대방에 위치하고 대방에 열구현이 있다.   朝鮮今樂浪縣箕子所封地 列亦水名也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   <곽박郭璞의 주석註釋>


지리지에 이르기를 낙랑군 조선이 있고 탄열현의 분여산에서 열수가 나와 서쪽으로 점선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다시 이르기를 함자에서 대수가 서쪽으로 대방에서 바다에 들어간다.   또한 대방과 열구가 함께 낙랑군에 속한다.   진서지리지에 열구는 대방군에 속한다. 


案地理志云 樂浪郡朝鮮 又呑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 又云 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 又帶方列口並屬樂浪郡 晋書地理志 列口屬帶方郡    <학의행郝懿行의 주注>


안문 음산현에서 나와 동북을 거쳐 대군 상건현 남쪽으로 흐른다.  [역도원 주석  위 토지기에 말하길 성(대곡 동성-망이 이르기를 염적정)] 안에 우물이 둘 있는데...<중략>...두개의 샘이 북으로 흘러 대수와 기이수를 이루어 다시 동북으로 [열수]에 흐른다.  


물이 능라택과 제택의 [열수정]에서 솟아 동북으로 흘러 기이수라 하고 다시 동북에서 곡수라 한다.   물이 창평현의 옛 성 남쪽에서 나와 다시 동북에 이르러 기이수가 되며 오른쪽으로 역수와 만난다.   원 줄기는 장성 동편이며 서북으로 흘러 장성 북쪽에 이른다.   대성 동북쪽 15리이다.]


出鴈門陰館縣 東北過代郡桑乾縣南 [역도원酈道元 주석註釋  魏土地記曰 城(代谷東城-莽曰厭狄亭)內有二泉 一泉有出城西門 一泉有出城北門 二泉皆北注代水祈夷水又東北(熱水)注之 水出綾羅澤祭澤有(熱水亭) 其水東北流 注祈夷水 祈夷水又東北谷水註之  水出昌平縣故城南 又東北祈夷水 祈夷水右會逆水 水導源將城東 西北流逕將城北 在代城東北15里]   <수경주水經注 유수조灅水條>



열수熱水는 곧 열수列水로서 하북성河北省 울현蔚縣 서쪽에 있다 하였고 다른 명칭 또한 [기이수祈夷水-동방족이 신성시 하는 물]로서 단군조선계 예족(濊族-열족列族)들의 지표강수指標江水임이 확실하게 드러나며 상건하桑乾河로 합쳐지는 걸 보여준다.



[기록 2]



새외에서 흘러나와 동남으로 요서 영지현 북쪽을 지난다...[주석  유수는 다시 동남으로 흘러 무열수에 들어간다.   이 강은 세 개의 줄기가 합쳐진다.   원 줄기는 오른쪽에서 계수 혹은 서장수라 하는데 동남으로 흘러 계에서 나와 반천수와 합친다. 


샘이 고을의 15리 지점에서 솟아나와 동으로 90리 흘러 서장수에 들어간다.   동남으로 다시 흘러 동장수에 들어간다...[중략]...동남으로 흘러 무열계라고 하는 곳을 지나면서 무열수라 한다...]


從塞外來 東南過遼西令支縣北...[註釋  濡水又東南流武列水入焉 其水三川派合 西源右爲溪水亦曰西藏水 東南流出溪 與蟠川水合 泉發州東15里 東流90里東注西藏水 西藏水又東南流 東藏水注之...[중략]...又東南流逕武列溪謂之武列水...]   <수경주水經注 유수濡水의 주注>


옛 무열수는 열수이다.  열하 평천현 100리에 있다.  古武列水熱水也 在熱河平泉縣東北100里   <지명대사전>


열하는 옛 무열수이다.   수원은 모두 열하의 경계에 있다.  그 하나는 위장현 찰한타라해 서쪽에서 하나는 평천현 객라심우기 서쪽 경계에서 나머지 하나는 평천현 객라심우익 서남쪽 변두리에서 나와 승덕현에서 합친다.   온천이 흘러 처음 열하라 이름 했다.   남쪽으로 흘러 [난하]에 들어간다. 


熱河古武列水有之源皆在熱河境 一出圍場縣東南察罕陀羅海之西 一出平泉縣喀喇沁右旗西境 一出平泉縣喀喇心右翼西南境 合流入承德縣 有溫泉注之始名熱河 南流注於[灤河]   <지명대사전>



한마디로 해석하자면 승덕承德 북쪽 삼원三源 지역을 흐르는 물길을 [무열수武列水-우열수*상열수][1] 라 했고 승덕承德 아래 부근에서는 [열하熱河*열하列河*열수列水]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난하灤河]라는 이야기이다.


[1] 무武를『우Wu』로 발음하므로 동방민족들은 흔히 이두문吏讀文에서 상(上-우*윗)이라는 소리 값을 대신하였다.   <류렬의 세 나라 시기 리두의 연구>


[열하특별구경熱河特別區境]을 보면 춘추시대春秋時代 산융지山戎地*한초漢初에 흉노속匈奴屬*무제武帝 무렵엔 새경塞境*후한後漢 시 오환烏丸*선비지鮮卑地*동진東晋 때 모용씨慕容氏의 지역이라 하였으니 아마 모두 열수列水를 기댄 서북과 서남 지역을 말한 듯하다.



이상과 같은 모든 관련 기록들을 훑어보아도 진하秦夏의 이름 있는 역사학자들 또한 한결같이 [단군조선족]들의 고유 지명고地名考였던 열수列水의 위치를 대동강大同江으로 인식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족蛇足]



[양웅楊雄의 방언方言]에는 동북변의 연燕 외교外郊와 열수列水 지역 사이에서 사용된 26개의 방언方言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말로 명확하게 풀어지는 언어군言語群들이 한족漢族 학자들에 의해 그들의 방언方言으로 기술되어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을 요한다.



※ 우북평右北平에 <흑수黑水>란 강이 있다.   이를 설명하는 [영평부지 권4 산천山川 조條]에서『府治內有黑水...或曰 燕謂水曰龍黑曰盧 縣名取此 非也』라 했는데 특히 주목할 부분이 있다.  


   연燕의 방언方言으로 [물을 용龍이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방언方言이 아니라 단군조선계 어군語群이기 때문이다.   [용龍은 미리*미루]이며 [물 또한 무루*밀*미]로서 서로 상통相通하는 형태소이다.



방언方言은 동일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정주定住하였던 세력 집단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체계이다.   이 지역에 그나마 라도 한족漢族의 영향력이 미친 시기는 겨우 한무제漢武帝 이후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오늘날 대륙 각 지방의 방언方言들이 서로 잘 통하지 않는 고유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변경에서 서로 접촉한 한漢*한韓의 언어가 차별적임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 방언方言의 성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오랜 세월 열수列水 지역에 단군조선계가 정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입증이다).



※ [단군조선] 세력이 불과 1백여 년 동안(양웅楊雄 BC 58-AD 18)에 화하인華夏人들의 영향을 깊숙하게 받아 고유의 언어를 버리고 한어漢語를 사용했다고 볼 수 없다.   더욱이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연燕과 단군조선 사이에는 사람들이 희소했다는 기록과 결부시켜보면 확연해진다.



5. 그렇다면 열수列水와 유수濡水와 난하灤河는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무열수武列水는 고대 <단군조선계열의 강수명江水名>이며 <유수濡水>는 한인漢人들이 부른 명칭이다.   역사상 선주족先住族의 지명을 후에 그들의 인식관념 안으로 끌어들인 타민족他民族이 자기 나름대로의 근거를 기반으로 표현하여 이름 지은 예가 허다하기 때문이다(퉁구스인의 아무르강이 한식漢式 표기인 흑룡강黑龍江으로 개명改名된 사실 등


[열하지熱河志]의 기록에서도 한漢 이전에는 [무열수武列水]를 <유수濡水>로 역도원酈道元이 다시 <난수難水>로 썼다가 당唐 시기에 비로소 [난하灤河]로 고정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아무튼 세 강수江水의 명칭에 관해서는 앞서 말한 문헌 기록을 다시 들어 설명을 대신한다.



가. 유수濡水와 무열수武列水



새외에서 흘러나와 동남으로 요서 영지현 북쪽을 지난다...[주석  <유수>는 다시 동남으로 흘러 <무열수>에 들어간다.   이 강은 세 개의 줄기가 합쳐진다...[중략]...동남으로 다시 흘러 동장수에 들어간다...[중략]...동남으로 흘러 무열계라고 하는 곳을 지나면서 <무열수>라 한다...]


從塞外來 東南過遼西令支縣北...[註釋  <濡水又東南流武列水入焉> 其水三川派合...<중략>...西藏水又東南流 東藏水注之...[중략]...又東南流逕武列溪謂之 <武列水>...]   <수경주水經注 유수濡水의 주注>



나 유수濡水와 난하灤河



난하灤河가 고대의 기록에서 한인漢人들에게는 유수濡水로 불려졌음은 여러 번 언급했으니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수경주水經注 유수濡水 조條*고금지명대사전古今地名大辭典 1281-1282P 등).   참고로 <먼 강>이라는 의미를 담아 [요수遼水]라는 이칭異稱으로 불려졌을 때도 있었다.   


다. 무열수武列水와 난하灤河



열하는 옛 [무열수]이다.   수원은 모두 열하의 경계에 있다...[중략]...온천이 흘러 처음 열하라 이름 했다.   남쪽으로 흘러 [난하]에 들어간다. 


[熱河古武列水]有之源皆在熱河境...[중략]...有溫泉注之始名熱河南流注於[灤河]   <고금지명대사전古今地名大辭典>    ※ 지금도 난하灤河 지류에 무열하武列河가 있다.



[사족蛇足]



그런데 [렬(열)수洌(列)水-대동강大同江]이란 주장은 어떻게 나왔을까?   원인이 된 기록은 [반고班固의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낙랑군樂浪郡 탄열현呑列縣 조條]에 기술되어 있던 주석註釋이었다.  



...탄열현의 분여산에서 열수가 나와 서쪽으로 [점제]에서 바다로 들어간다..又呑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낙랑군樂浪郡 탄열현呑列縣 조條 학의행郝懿行의 주注>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제日帝 시대에 대동강大同江 유역에서 <점제평산군신사비秥蟬平山郡神祠碑>가 돌연히 나타났다.   일본관학자日本官學者들은 마치 이때를 기다린 듯이 [점黏과 점秥]의 음이 통한다는 사실을 들어 바로 이 지역이 [점제현黏蟬縣]이며


따라서 부근을 흐르는 대동강大同江이야말로 [열수列水]라는 주장을 각인刻印시켰다.  하지만 검증 결과 이 비碑는 동한東漢 시대(AD 85)에 건립되었으며 최근에는 대륙에서 옮겨졌다는 관련 자료가 속속 출현하고 있다(서한西漢은 점제현黏蟬縣*동한東漢의 점제현占蟬縣이라 했다).


관련 사료를 보아도 금방 잘못이 들어나는데 [산해경山海經]의 기록(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대로라면 열수列水 동쪽인 열양列陽 지역의 동편이며 동시에 바다 북쪽에 조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동강大同江 동쪽에서 이런 지역을 비정할 수 없으며 바다 북쪽은 더더욱 아니다. 


이렇게 [일제관학자]의 앵무새 노릇에 충실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의 이론적 근거는 허망하다.   꼭 <이병도>의 우스꽝스러운 지명고증을 연상케 하는 또 다른 망령을 그대로 보는 듯하여 여간 씁쓸하지가 않다.


  

6. 열수列水의 위치를 확고하게 뒷받침해주는 다른 문헌 사료는 있는가?



필자筆者의 추정을 더욱 재확인해주는 기록들은 의외로 많다.   고래의 문헌 또한 한결같이 단군조선의 지표강수指標江水인 습수濕水*산수汕(鮮)水*열수列(洌)水의 위치를 대동강大同江으로 인식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록 1]  삼수여합三水與合으로서의 열수列水



조선에는 습수와 열수와 산수의 세 강물이 있어 열수에 합쳐진다.   생각건대 낙랑조선의 이름이 그래서 얻은 듯하다.  朝鮮有濕水洌水汕水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사기조선열전史記朝鮮列傳 집해集解의 위魏 장안張晏 주注>


조선에는 천수와 열수와 산수의 세 강물이 있어 열수에 합쳐진다.   생각건대 낙랑조선의 이름이 그래서 얻은 듯하다.   朝鮮有泉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통전通典 권185 변방1 조선 조條의 장화張華 주注 인용>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한족漢族들의 관념체계를 엿볼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단군조선]의 영역이 결코 반도가 아니었음을 명명백백히 해주는 분기점分岐點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필자筆者는 대동강大同江과 합류하는 작은 개천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❶ 조선朝鮮이란 국호國號가 분명히 수명水名에서 유래하였음을 알려준다.   이 대목은 반드시『그들은 대수大水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기록과 상호 결합하여 검토해야만 한다.


❷ [단군조선] 영역에는 틀림없이 삼수三水가 합류合流되어 열수(列水-열수洌水)를 이루는 강들이 존재한다.


❸ 삼수三水가 결국 합쳐지는 열수列水만 하더라도『길이가 820리 되는』그래서 한반도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강이다(더구나 그 지류支流 가운데 한수汗水 등과 같이 단군조선계의 강물임을 드러내는 수명水名이 적지 않다-수경주水經注 유수濡水 조條).



※ 그런데 현존 자료들을 모조리 살펴보아도 우리나라의 강 가운데 이런 전제를 충족시킬만한 강수江水가 없는데다가 이를 합리적으로 고증考證해줄 만한 기록조차도 없다.   물론 고대 지리지에서도 전혀 단서를 찾을 수가 없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서 기록 가운데 하나의 수명水名으로서 [열수列水]가 당당하게 등장하여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지금까지 언급한 단군조선계 [열인列人의 물]로서 동시에 하북河北 지역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마지막 재확인 자료가 엄연히 나타나고 있다.  


하북河北 지역에서 열수列水를 이루는 삼수(三水-습수濕水*산수汕水*열수洌水)를 찾을만한 고증考證 자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해註解한 학자들은 모두 [무열수武列水]를 [난하灤河의 일부]로 비정하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은 앞서 열수列水 부분에서 언급한 [우열수-열수列水]라는 관계와 상호 정합성整合性을 찾는다.



濡水...又東南流逕武列溪謂之武列水...   <수경주水經注 권14 유수濡水의 역도원酈道元 주注>


행궁 안에 온천이 있어 물이 흐르는데 그래서 처음 열하란 이름을 얻었다.   남으로 흘러 동쪽에서 꺾어진 다음 다시 굽이쳐서 흐르는 가운데 남쪽에 이르러 하영에서 난하로 들어간다.  바로 옛 무열수이다.  行宮內有溫泉 流水注之 始名熱河 南流折而東 復折而南至下營 入灤河 卽古武列水   <열하지熱河志 권69 열하熱河 조條>


열하가 무열수임은 의심할 바가 없다.  熱河之武列水 無疑   <동서同書 건륭황제乾隆皇帝의 열하고熱河考>


열하의 물길은...즉 수경주에서 말하는 무열수이다.  熱河之水...卽水經注所謂武列水也   <동서同書 개신하기開新河記>



[기록 2]  습수濕水



습여수는 상곡의 거용관에서 나와 동으로 흘러 군도현 남쪽을 지나 다시 동편으로 소현 북방을 거친 후 북쪽으로 굽어져 흘러 동남쪽으로 고노현 서편에 이르러 고하로 들어간다.  濕餘水出上谷居庸關 東流過軍都縣南 又東流過蘇縣北 又北屈東南至孤奴縣西 入於沽河   <수경주水經注 권14 경문 습여수濕餘水 조條>


고하...남쪽을 지나 어양 고노현 북쪽을 거쳐 서남에서 습여수와 합쳐져 로하라 한다 [역도원의 주에 고수의 남쪽에서 왼편으로 포구수와 만난다]  沽河...南過漁陽孤奴縣北 西南與濕餘水合爲路河[역도원酈道元 주注-沽水之南 左會鮑丘水]   <수경주水經注 권14 경문 고하沽河 조條>


유수는 동남으로 흘러 낙안정 남쪽을 돌아 동쪽에서 신하의 옛 개울과 모아진다.   개울은 옹노현에서 포구수를 받아들인다. [습여수와 포구수가 합쳐진다는 뜻이다]  濡水東南流巡樂安亭南 東與新河故瀆合 瀆自雍奴縣承鮑丘水   <수경주水經注 권14 유수濡水 조條 주注>



위 기록들을 비교해볼 때 습여수濕餘水는 <습수濕水>로서 포구수鮑丘水를 통해 이윽고 유수濡水와 연결되므로 결국 유수濡水인 열수(列水-난하灤河)와 합류合流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기록 3]  산수汕水



봉대수가 신안평현에서 나와 서남으로 흘러 지리지에 요서의 속현인 신안평의 옛 성을 서편으로 돌아 다시 동남으로 흐르다가 용선수에 들어간다.  封大水出新安平縣 西南流 巡新安平縣故城西 地理志遼西之屬縣也 又東南流 龍鮮水注之   <수경주水經注 권14 유수濡水 조條 주注>



용선수龍鮮水가 <선수鮮水*산수汕水>인바 봉대수封大水가 용선수龍鮮水에 들어가 신하新河에 합쳐지면서 신하新河를 통해 유수濡水와 합수合水하므로 결국 선수鮮水도 <유수濡水>와 합류合流하게 된다.  



[따라서] 



유수濡水는 현現 난하灤河이며 옛 무열수武列水의 하류下流인 열수列水이니 습수濕水*선수鮮水*열수列水가 모두 유수濡水 즉 난하灤河에 합쳐진다는 걸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아울러 고대에는 한인漢人들이 강수江水의 이름을 즐겨 줄여서 기록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통용되어 비일비재하였음을 인식하면 곧바로 해답이 열린다.   즉 [청장수淸漳水-장수漳水]와 [압록수鴨綠水-압수鴨水] 등의 예例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무열수武列水-열수列水]*[용선수龍鮮水-선수鮮水]*[습여수濕餘水-습수濕水]라는 일관된 한식기명漢式記名이라는 흐름이 마지막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선鮮과 선仙과 산汕]의 음가音價가 같다는 사실은 구태여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기록 추가]



[조선의 소리 값은 조와 산인데 강의 이름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었다].  혹은 선은 밝음인데 땅이 동방에 있어 아침의 광명을 상징하므로 조선이라 하였다.  朝鮮音潮汕 因水名爲名 又云 鮮 明也 地在東表日光明 故曰朝鮮   <안정복 동사강목東史綱目 잡기雜記 조선명칭고朝鮮名稱考의 국조보감國朝寶鑑 인용>


연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 [색은 조선의 소리 값은 조수와 산수의 두 강물 이름에 따랐다]  燕東有朝鮮遼東 [색은 朝鮮音潮汕二水名   <사기소진열전史記蘇秦列傳 색은索隱>



1) 기록 내용으로 보아서 조선朝鮮의 [선鮮]과 산수汕水의 [산汕]이 분명하게 대응하고 있다.


2) 특기할만한 점은 조선朝鮮의 명칭을 이루는 강수江水의 하나로 다른 기록과는 달리 [조수潮水]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조하潮河는 백하白河와 합쳐져 하류下流에서는 [조백하潮白河]를 이루고 있다.


3) 앞선 다른 글에서 필자筆者가 주장했던 [백하白河-우리 민족 고유의 강물 이름인 비류수沸流水]라는 추정을 모두 고려해 볼 까닭이 있는 대목이다.   [단군조선계] 부족들의 정착지대가


  조백하潮白河 지역 남쪽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지명고地名考로서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는 근거 자료이며 그 때문에 조선朝鮮 지역이라는 이름을 각종 기록상에 각인시켰음이 입증된다.



※ 주목할 부분은 상기上記의 인용 기록에서 명확하게 [조수潮水와 산수汕水에서 조선朝鮮의 이름을 얻었다]라고 하여 반드시 두 강이 합수合水해야 한다는 [필요충분조건]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해석을 감안할 때 고래古來로부터 [단군조선계] 세력들이 두 강江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넓게 정착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조선朝鮮이란 명칭이 생겼음을 반증해주는 귀중한 내용이다.



결론結論을 겸하여】



한 마디로 단정을 짓자면 이 같은 [단군조선계] 정착지대를 흐르는 중심 강물로서 [열수列水]는 곧 [난하灤河]였으며 이를 한족漢族들은 고대古代에 [유수濡水]라 칭稱했고


또한 [습여수濕餘水-습수濕水]와 [용선수龍鮮水-선수鮮水-산수汕水] 그리고 [무열수武列水-열수列水]가 정확하게 세 강줄기로서 합쳐진다는 사실이 기록 검증을 통하여 모두 확인되었다.



[마지막 TIP 하나 더 - 정말 웃기는 코메디 한편]



[민족사학계]에서 주장하는 열수列水의 증거는 명백하다.   먼저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주석註釋을 단 장안張晏의『열수列水는 습수濕水*산수汕水*열수洌水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기록에 주목한다.


그리고는 필자筆者가 상기上記에 설명한 분석 방법을 이용하여 다양한 문헌 기록을 대조하고 비교 검토한 다음 관련 사료들까지 명확하게 인용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우적도]에 습수濕水가 명시된 사실을 문헌적 검증에 대한 재확인 자료로서 활용하여 열수列水임을 밝힌다.


이어서 역시 필자筆者가 언급한 대로 이 강줄기에 흘러드는 지류支流에 관한 사서史書의 기술들을 바탕으로 [용선수龍鮮水-산수汕水]와 [무열수武列水-열수列水]를 면밀한 기록 분석을 통하여 하나하나 입증하는 전형적인 사료검증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 분석결과는 세 강江이 합해서 열수列水가 되었다는 장안張晏의 기록에도 정확하게 일치된다.   지류支流의 이름에 불과하였던 습수濕水 하나를 발판으로 그동안 파묻혀 있던 열수列水의 진정한 실체가 강한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다.   정작 우기는 사람은 따로 있는 듯 하다.



반면에 [유사식민사학자]들은 열수列水를 어디서 찾을까?   그냥 자신들이 하느님 말씀처럼 신봉하는『고조선은 한반도에 처박혀있었다』는 믿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열심히 우리나라에서 열수列水를 찾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한족漢族들의 사서史書에서 까지 온전하게 살아있는 문헌 기록조차 깡그리 무시하면서 기어이 하나 찾아낸 강수江水가 대동강大同江이다.   그러자 이게 웬 떡이냐?  싶었는지 괴이한 망상이 날개를 펼치기 시작 한다.


여타 문헌 기록에 대한 면밀한 분석 과정도 생략한 채 그냥 죽어도 대동강大同江이 열수列水이므로 버젓하게 습수濕水가 표시되어 있는 [지리도]조차 아니라고 우긴다.   정말 그럴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까?


그런 것 따위는 아예 없다.   자신들이 내려놓은 결론인『고조선은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아니라고 할 뿐이다.   과연 그럴까?   그럼 이들이 주장하는 열수列水의 증거를 보자.   겨우 댄다는 이유가 다음의 두 가지 뿐이다.



❶ 대동강大同江이라는 이름의 대동大同이라는 말 자체가 이렇게 많은 강들이 합류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이걸 열수列水라는 명칭과 대응시키려 했을까?).

 

❷ 고려高麗 문인文人 <최자>를 끌어대어『洌水所匯名爲大同  열수는 물이 돌고 돌므로 대동이라 이름하였다』라 인용하면서「저기서 열수列水는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나오는 열수列水일 수도 있고 여러 강물이라는 뜻일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열수列水 자체가 여러 강물이 모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는 한편의 희극 같은 드라마를 만든다.



초등학생조차 웃다가 배꼽을 빠뜨리고 갈만큼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과연 이런 행태가 진정한 역사학도로서의 자세이며 정직한 역사연구 태도일까?    더욱 가관인 것은 이에 발맞추어 손뼉을 치는 [앵무새 추종자]들의 골 때리는 파닥거림이다.


아무튼 이들은 대동강大同江의 본류本流에 합류合流하는 강江들을 동네 개천까지 끌어다 주워섬긴다(금성강*내창강*애창강*맹산강*마탄강*시량강*정천*금천강*신천).   그것도 모자라 이 북쪽 강에 합류하는 비류강의 지류支流도 다 쓸어 담는다(평원천*기창후천).


어디 그 뿐이랴!   이번에는 남강의 지류도 살아남지 못한다(두무강*곡산천*남강*약수천*송강천*봉명천*용천*율리천*상원강).   결국 나머지 다른 물길도 이들의 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보통강*순화강*곤양강*매상천*황주강*청천).  


여기에 약방의 감초격인 재령강의 지류支流라고 어찌 빠질 수 있겠는가(문암천*염탄강*서강*은파천*서흥강).   허나 결국 이런 샛강들이 넘겨줄 수 있는 이름이라야 [대동강大同江]이라는 어원語原 뿐이다.   영문도 모른 채 애꿎게 끌려 나온 개천들이 불쌍하기만 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리고 나서 이 샛강들을 대동강大同江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코메디이다.   자랑스럽게 [습수濕水*산수汕水*열수列水는 남강*비룡강*대동강일 수도 있고 보통강*남강*대동강일 수도 있고 남강*재령강*대동강일 수도 있다]는 어이없는 바보놀음을 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인정할 근거?   그런 것 따위는 이미 내팽개친 지 오래이다.   그나마 [민족사학진영]에서는 지리도地理圖에 명시된 [습수濕水]를 밝혀 내여 기록 분석의 입증자료로 보충하고 있지만


[유사식민사학계]는 이와 비슷한 강수江水의 명칭조차 대동강大同江 유역은 그만두고라도 한반도 안에서도 전혀 찾아내지도 못하고 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는 실마리를 처음부터 스스로 만든 탓이니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랴!



그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 [유사식민사학자]들이 지명地名을 찾는 엉터리 같은 수작을 눈뜨고 보자니...정말로 강물과 실개천도 구분 못하는 [왜곡사관歪曲史觀]의 전형典型인 [궤변망상사학]이 따로 없다!


 

 

 

 

[첨부] 그림.hwp

출처 : 하나가라 우리나라
글쓴이 : 대수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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