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대중국의 북방과 서방을 누빈 이족(夷族)의 역사-단군조선의 후예[4]

2010. 9. 3. 13:12한민족고대사

[고대중국의 북방과 서방을 누빈 이족(夷族)의 역사-단군조선의 후예 : 후(後) 아리안족(白族), 견이(田犬 夷), 흉노(Hun), 선비(鮮白), 돌궐(투르크 Turk), 몽골(元), 거란(遼), 여진(金), 만주(淸)]
-고대중국의 북방과 서방을 중심으로 한 역사




8. 흉노, 고구려, 돌궐 땅에서 일어난 거란의 역사

거란(契丹)은 서기4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기록되는데, 원래 서기전2400년경의 사람이 되는 제곡고신씨의 아들 설(契)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거란은 키타이라고도 불리는데, 스키타이와 연관성이 있는 말이 되어 거란과 스키타이의 후신이 되는 흉노족과의 관계가 고찰 대상이 된다.

거란의 발흥지는 단군조선의 구려국의 서부지역으로서 서안평이 되는데, 거란의 요(遼)나라는 이곳을 서경 임황부라 하였다.
이 서안평은 고하의 최상류와 난하의 최상류가 있는 곳으로 요수의 동족에 있어 요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요수는 원래 지금의 북경부근을 흐르는 영정하가 대요수가 되며, 영정하의 상류에 합류하는 강으로서 동북에서 서남으로 양하에 합류하는 청수하가 소요수가 되어,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요수로 된다.

거란의 발흥지는 구려국 땅이며, 돌궐이 활동하던 땅이고 그 이전의 흉노가 활동하던 땅이기도 하다. 거란은 서방으로 고대중국의 북방을 장악하였고, 야율대석이 세운 서요는 카라키타이로 불리며 서기10세기경 키르키즈스탄을 지배하기도 하였다.서기1130년경에는 거란이 카자흐스탄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1) 거란의 시조 설(契)과 연혁

서기전2400년경 배달나라의 제후국이던 유웅국(有熊國)의 왕이던 제곡고신은 아들로 지(摯), 요(堯), 설(契) 등을 두었다. 지는 제곡고신을 이어 왕이 되었는데 서기전2383년부터 전쟁을 좋아한 요가 제지를 서기전2357년에 멸하고 천자자리를 차지하여 배달나라처럼 땅을 9주로 나누고 배달나라의 역법을 마음대로 폐하고 제왕이라 참칭하였다. 이리하여 서기전2333년에 동북이 아사달에서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하자 요와 단군왕검의 나라가 병립하게 되었고 서기전2324년경에 요가 단군조선의 사자 유호씨에게 굴복하여 단군조선의 정식 천자가 되었다.  

설(契)은 은나라 시조 탕의 선조이기도 하다. 은탕은 동이족으로서 단군조선의 군사적 후원을 받아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은나라를 건국하였다. 거란은 설의 후손으로서 또한 동이족이 되며, 그 근거지는 후대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구려국의 서부지역이 된다. 구려국은 지금의 대동에서 적봉시를 중심으로 서요하에 걸치는 나라이며, 춘추시대에는 산융으로 기록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구려국은 고죽국의 북쪽에 위치하고 선비와 흉노의 동쪽에 위치하며, 몽골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진번의 서쪽에 위치하며 번한의 북쪽에 위치한다.

설의 후손에 은나라 시조 탕이 나오고 또다른 갈래에서 거란족이 나온 것이 된다.


(2) 스키타이와 흉노와 돌궐과 거란(키타이)

스키타이는 서양사에서 철기를 사용한 족속으로 기록된다. 결과적으로 흉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데, 인종적으로 깊은 연관성성을 지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스키타이와 키타이로 불리는 거란과의 관계로 인하여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스키타이는 흉노의 선조로서 키타이와 연결되고 흉노족은 단일족이 아니라 부족으로서 돌궐의 전신인 견이와 연결되며, 서기전2400년경부터 시작된 거란의 뿌리는 키타이라는 말에서 스키타이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에 스키타이, 흉노, 돌궐, 거란이 혼잡된 부족으로서 어느 부족이 세력을 가졌느냐에 따라 흉노냐, 돌궐이냐, 거란이냐로 기록되는 것이 된다.

흉노가 돌궐, 거란 등을 병합하여 고대중국의 북방에서 세력을 떨칠 때는 흉노라 기록되고 돌궐족이 흉노, 거란 등을 병합하여 세력을 덜칠 때는 돌궐의 역사로 기록되고, 거란이 북방에서 흉노와 돌궐 등을 병합하여 세력을 떨칠 때는 거란의 역사로 적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스키타이, 흉노, 돌궐, 거란 등은 모두 단군조선의 후예로서 부족이 되며, 서방으로 진출하거나 고대중국의 북방를 무대로 할 때 그 중심 세력을 적은 것이 될 뿐이다. 기자의 후손인 선우가 흉노의 왕이 되어 흉노, 돌궐, 거란을 병합하여 대제국을 이루고, 돌궐이나 거란의 가한이 흉노, 돌궐을 병합하여 대제국을 이루는 식이 된다.

 
(3) 거란과 구려, 고구려와의 관계

거란은 서기4세기경에 활동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거란의 발생지가 원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구려국 땅이며, 고구려의 광개토황에 의하여 고구려에 복속되었는데, 이후 고구려가 망하고 대진국(발해)이 건국된 후 세력을 차츰 키워 서기926년에 대진국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후계국이라 자처하였다.
  

(4) 요(遼)의 역사

가. 요의 건국

거란의 시조인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서기907년에 거란을 일으켰고,서기926년 2월에 대진국을 멸망시키고, 제3대 세종이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원래 고구려 고씨의 후예가 된다. 거란의 왕족인 진국공주 묘의 묘지석에 의하연 야율씨는 원래 고구려 고씨의 후예라 기록되고 있다[요(遼) 진국공주(陳國公主) 묘(墓)에서 발굴된 묘지명(墓志銘) : 公主姓耶律氏 ........本其姓高之裔 乃六葉
帝王之族矣 http://cafe.daum.net/LOVEGANDO/Bba3/83].

그래서 거란이 고려에게 고구려의 정통성을 주장하여 땅을 요구한 것이 된다.

나. 요의 팽창과 대진국(발해)의 멸망

야율아보기는 서기926년에 대진국을 멸망시키고 야율배를 동단국(東丹國)의 인황왕으로 봉하였고, 동단국은 제3대 세종 대 폐지되었다. 

야율아보기는 대진국을 병합하였는데 대부분 대진국의 제도를 따랐다.

서기927년에 열만화(烈萬華)라는 자가 대진국이 망하자 정안국(定安國)을 세웠는데, 서기985년에 요의 출병으로 망하였다. 

또 서기1029년에는 대연립(大延林)이라는 자가 연호를 천경(天慶)이라 하고 동경에 수도를 두어 흥요(興遼)를 세웠으나 자세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요나라는 서기1125년에 천조제(天祚帝) 때 여진의 금(金)나라 제2대 태종 때 망하여 9대 219년간 존속하였다.

다. 고려와의 관계

거란은 대진국을 멸망 시킨 후 고려에 대하여 고구려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고구려 땅을 내놓으라고 위협하였는데, 이는 거란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자신들이 이었다는 것이 된다.

거란이 고구려 계승권을 주장한 것에는 영역으로 따져서 고구려 땅을 차지한 것만이 아니라, 거란의 왕족이 바로 고구려 출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요나라가 세력이 강해진 때는 고려에 대하여 군신의 예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9. 여진(金)의 역사

금나라는 여진족의 아골타가 서기1115년에 세운 나라이다. 아골타의 선조는 신라인으로서 왕족 김씨이다. 서기1125년에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서기1127년에는 송나라를 공략하여 남송으로 축소시켰다. 서기1234년에 몽골의 원나라 제2대 태종에게 망하였다.

여진족을 말갈, 읍루, 숙신 등으로 부르는데, 이는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

(1).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숙신

서기전2333년에 개국한 단군조선은 삼한과 기본 8봉후국을 두었는데 숙신국은 지금의 송화강 동족 지역에 봉했다. 신지씨(愼誌氏)는 단군조선 시대 문자를 담당한 직책이며, 위치적으로 구족 중 방족(方族)의 땅에 봉해진 것이 된다. 방족은 황족에서 파생된 족이다. 특히 단군조선 전기의 수도가 아사달인데, 이 아사달이 소재한 곳이 숙신 땅이므로 단군조선을 숙신이라고 적기도 한다.

숙신은 그 서쪽에 부여가 있고, 남쪽에 옥저와 예가 있으며, 북쪽에는 현이(玄夷)가 있었다. 서기전1122년경 숙신이 주나라 무왕에게 고시와 석노 등을 조공하였다라는 식으로 적고 있는 중국의 기록은 당시 주나라는 단군조선의 천자국에 불과한 바, 숙신이 사자로 가서 주무왕의 즉위를 축하한 것을 왜곡하여 적은 것이 된다.


(2) 고구려 시대 여진

고구려 시대에는 말갈로 불리었다. 읍루라고도 불리었다. 흑수말갈은 흑룡강 유역의 현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단군조선이 북부여로 접수된 후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은 스스로 왕을 칭하거나 하면서 독립을 시도하였고, 통상적으로 자치를 한 것이 된다. 고구려는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로서 서기전58년 졸본에서 시작하여 서기전37년에 고구려를 창건하였고, 서기전28년에 다물(多勿)이라 연호를 내세워 본격적인 고토회복에 나섰다.

서기전27년 10월에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서기전26년에 수도를 졸본에서 상춘(눌현, 눌견, 늘봄, 장춘)으로 옮겼다. 이후 서기1년경에 유리명제가 국내성으로 천도하였으며, 서기22년에 동부여를 멸하여 병합하고, 서기37년에는 대무신열제가 평양의 최씨 낙랑국을 멸하여 병합하였다.

이후 서기50년경 모본제 대 요동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으며, 서기55년경 태조무열제는 졸본, 국내, 제1환도성의 3경제도를 두고 요동을 회복하고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켰으며, 요서에 10성을 축조하였고 서기전105년이후에는 현도군과 낙랑군을 공격하였다. 이렇게 고구려는 단군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서기391년 이후 광개토경호태황은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하고, 서기392년에 백제의 10성을 점령하였으며, 서기395년에는 패수에서 백제를 격파하여 8000명을 전사시켰고, 이후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을 확보하였으며 읍루를 정벌하였고, 서기400년에는 왜를 격퇴하고 삼가라를 복속시키는 등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거란, 백제, 신라, 가락, 임나, 이왜를 모두 복속시켰던 것이다.  

장수홍제호태열제는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하고 서기414년에 광개토황비를 건립하였으며, 서기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서기전475년에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전사시켰으며, 서기480년에는 신라를 정벌하여 죽령이북을 탈취하고 말갈을 정벌하였다. 장수황제호태열제 시대에 동진, 송, 북위와 통교를 하고 북연과 거란을 복속시켰으며 고구려의 전성기가 된다.  

(3) 대진국(발해) 시대 여진

원래 여진(女眞)이라는 말은 고구와 대 끝자를 딴 말이다. 즉 여진(麗震)이 여진으로 글자가 달라진 것이다.

서기720년에 대진국 제2대 무황제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고 구다, 개마, 흑수, 신라가 조공을 하였으며, 서기734년에 구다, 개마, 흑수 등을 정복하여 5경(京) 60주(州) 1군(郡) 38현(縣) 을 두었으며 당, 왜, 신라가 조공을 하였다. 이대 흑수가 복속되었으므로 말갈은 당연히 복속한 것이 된다. 대진국의 주체세력이 말갈족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 말갈족이 중오한 역할을 한 것이 된다. 

(4) 고려 시대 여진

신라왕족 김씨가 신라의 마지막 왕이 되었는데 경순왕이다. 경순왕에게는 마의태자가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김일(金鎰)이었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이 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설악산으로 들어가 부흥을 꾀하였다. 이을 두고 마의태자가 세상을 비관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 슬퍼하며 죽엇다라는 식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설악산 부근의 강원도 인제로 들어가면 마의태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즉 마의태자는 이곳에서 신라의 부흥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는 두아들을 두었는데 둘재 아들이 고려초에 여진으로 간 김함보(函普,金俊,金幸)이며 김함보의 아들이 김극기(克己,克守)라 한다. 함보는 김준의 법명이라 전한다.

김함보가 여진으로 가서 여진의 왕족(완안부)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진은 초기에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대우하엿다. 그러다가, 여진이 힘을 키워 고려왕 형제관계를 맺고 고려를 아우의 나라로 대하였다.

김함보의 후손에 아골타라는 자가 있어 금나라 시조가 되었다. 아골타는 이두식표기로서 아버지와 같은 말이다. 즉 아골타는 가장(家長)이라는 말로서 당시에는 족장으로서 왕이 된다.


10. 몽골(元)의 역사

(1) 단군조선의 봉후국 몽고리

(2) 흉노와 함께한 몽골

(3) 고구려와 함께한 몽골

(4) 돌궐과 함께한 몽골

(5) 세계대제국 몽골(元)

-징기스칸
-테무친(鐵木眞)은 철뭉치라는 의미

(6) 몽골과 고려의 관계



11. 만주(淸)의 역사

(1) 만주족은 여진족

(2) 만주족 성씨 애신각라(愛新覺羅)와 신라, 신라왕족 김씨와의 관계

(3) 청나라 시조 누루하치는 금아지(金의 후손)라는 말

(4) 청나라와 조선의 관게



12. 단군조선 시대 족속과 언어 및 문자

(1) 단군조선의 문자 신전과 가림토

(2) 신시(神市)를 통한 언어와 문자의 통일

(3) 순행(巡行)의 역사와 언어문자 등 문화의 전파
-서기전2200년경 유호씨의 서방과 인도지역 전교(傳敎)



13. 단군조선 이후 제족의 언어와 문자의 역사

(1) 사방풍토의 구별

(2) 아리안족의 이동과 단군조선어, 고대중국 하(夏)나라 말의 관계
-아리안의 조상 : 서기전2220년경 하우(夏禹)의 반역으로 단군조선 영역에 피난한 무리 중 서방으로 이동한 무리

(3) 달라진 언어와 문자-가림토의 후신

-티벳문자
-인도 브라미 문자
-돌궐문자
-일본 아히류문자(신대문자)
-몽골 파스파 문자
-여진문자
-알파벳과 가림토의 관계


14. 결



15. 여론

-배달나라 문자와 수메르문자
-단군조선 가림토 문자 전파, 계승,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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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고 천산 태백의 7만년 역사
글쓴이 : 천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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