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임나,즉 대마도설의 부당성과 기성학계의 그릇된 인식체계

2010. 7. 17. 09:23한민족고대사

임나는 가야 연방체가 아니며,전체 대마도설의 부당성과 기성학계의 그릇된 인식체계

 

 

정광산인 김문배

 

 

 <대마도 와다쯔미 신사를 들어오는 곳에 세워진 도리이,대륙문화가 들어온 해상 루트,계지가라가 있던 곳으로 고구려계통이 지배한 지역이다>촬영:글돋선생

 

 

일본서기 충애8년 9월조의 다음기사를 보자.

 

[......군신에게 상의하여 웅습(구마소)를 토벌할 것을 의논케 하였다. 그때 神이 있어 황후에게 붙어서(신들러서) 가르쳐 훈계 하기를,[천황은 어찌하여 구마소가 불복하는 것을 걱정하시오, 이는 여육의 가라쿠니(旅肉之空國)입니다. 거병하여 토벌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이 나라보다 훨씬 나은, 보물이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비유컨대, 처녀의 눈 곱게 뜨는 모양(處女之(目綠), 같고, 나루터를 향한 나라가 있습니다.

(目綠, 이를 麻用珥枳라 한다) 눈부신 금.은. 채색이 많아 그 나라에 있습니다. 이를 楮衾(저금)(다꾸부스마>다꾸후스마)新羅國이라 합니다.]

 

 위에 인용한 楮衾新羅國(저금신라국/takubusuma-siragi-kumi)의 위치를 명확히 알아내는 것이 문제의 관건이다. 충애 8년 9월 조의 이 楮衾新羅國가 곧 이듬해 신공后에게 정벌당한 그 신라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한일 양국 사학자들이 이 다꾸후스마-시라기(신라)의 정확한 실체를 모르고 막무가내로 불합리한 줄 뻔히 알면서도 이를 당시의 韓地 신라로 믿었던 까닭에 본의 아니게도 고대 한일 관계사의 인식체계에 엄청난 편견과 곡해를 낳았던 것이다.

 

 사카모토타로(坂本太郞) 등에 의한 <일본서기 補註>에 따르면, [楮(다쿠)는 한국어 닥(tak)에서 왔다]고 하였고, [衾은 夜具]를 가리킨 것으로 설명하였다. 또 [楮衾은 신라의 枕詞(마쿠라 고또바)가 되었다]고 해설하고 있다. 즉 新羅(신라)라면 으레 楮衾을 앞에 쓴다는 말인데 도대체 세상에 이처럼 에매모호한 설명이 어디 있겠는가, 참으로 아리송한 해명이다.

 <와다쯔미 신사 경내,이곳은 해신을 모시는 신사로서 일본서기 신대기에 나오는 신사이며 오랜 역사를 가진 신사이다. 일본천황 사진이 모셔져 있어,천황의 조상들과 연관된 사연의신사이다>

 

 한국어 [닥(tak)에서 유래했다는 [楮(다쿠)]가 무슨 뜻을 지녔다는 설명인지도 알 수 없고, 夜具(이불이나 베개 등속의 침구)를 의미하는 衾(후스마)가 결합된 楮衾(저금)이란 말이 어째서 신라라는 국명 앞에 으례 관형어처럼 올라 붙어야 하는지 전혀 짐작할 도리가 없다. 요컨대 신라를 수식하는 [楮衾(일본음으로 다꾸후스마)]이 정작 무슨 뜻인지 조차 모른 채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결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고대 한일 관계사의 해석이 애초부터 지리멸렬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최초의 실마리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아무튼 일본의 사학계는  楮衾新羅든 그냥 신라든 간에 <신공기>의 이 재보의 나라를 고대 한국의 동남방에 위치했던 신라국와 동일한 국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면 <일본서기>의 기록 자체가 터무니없이 불합리하고 황당무계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에 반하여, 한국측 연구자들의 설명은 어느 정도 합리적 측면을 중시한 편이다.

 가령 문정창은 그의 연구서<일본고대사>p.263에서 신공이 정벌코자 한, 충애 8년조의 다꾸후스마-시라기는 큐슈에 있었던 신라계의 많은 부족국가들 중 한 나라의 국명일 것으로 보았다.

 

 <와다쯔미 신사 주위로 대륙계 상록수가 심어져 있어 대마도 자생식물이 아니고 대륙인들이 심었다고 한다.천연기념식물로 정해져 있다.필자>

 

 

 그런가 하면 이병선(전 부산대학 교수)은 楮衾(takuhusuma)은 卓淳(takutsun:신공 46년조에 처음 나오는 지명)의 이표기로 대마도에 비정하였다. 佐護의 與良原(요라바루)이 그곳이란 설명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 卓淳(流布本 흠명 5년기의 표기)]도 같은 것이며, 차음에 의한 takutsun 이 tokutsun으로 약간 달리 표기되었을 따름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이는 <만엽집>권 3에 보이는 [楮角乃新羅國(takutsunu-no-siragi)] 다 같은 지명의 異표기로서 대마도에 비정한 그 佐護의 與良原= 楮衾新羅을 가르킨 것이라 하였다.

 

그와 같은 근거로서 이병선은 卓.啄 .楮의 어원이 현재 대마도에 세군데 있는 多久頭魂神社(takutsu-tama-no신사)의 多久(taku)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또 이들 당시 韓地에 있었던 신라탁부(啄部(啄評)와 同系 지명일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임나국과 대마도>p.263

 <이즈하라 번화가,대마도 시청이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조선통신사들이 머문지역이다.이즈하라는 삼한시대에는 계지가라가 있는 지역으로 백제가 지배한 곳이다. 대마도 인구는 15000여명으로 평지가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닌 지역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병선의 이러한 언어학적 추론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대마도에 위치 비정하는 데에는 전적으로 반대한다. 그 까닭으로 첫번째는 다꾸후스마-시라기의 위치가 <일본서기>에서 명백히 西方(서쪽지방)으로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서 대마도는 어디까지나 규슈의 북방 혹은 북서방이기 때문이다.

 

 <신공기>이른바 신라 정벌 기사를 대마도에서의 사건으로 비정 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로는 대마도의 지리적 조건을 들 수 있다. 고대 [國 ]이라는 명칭이 오늘날의 개념과는 달리 부족장이 웅거 했던 소규모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해도 <위지>에 기록된 것 처럼 섬 전체가 평지보다 거의 험준한 산비탈로 이뤄진 대마도의 그 좁은 면적 안에 <일본서기> "임나" 관련 지명에 해당하는 30여 국이나 산재했다는 발상은 무리이다.

 

 이병선은 任那(임나)  관련 기사 속의 30여 국의 위치 뿐아니라 도합 50여개의 관련 지명들을 모조리 대마도에 비정함으로써 웅략,계체,흠명 연대에 걸쳐 연속되는 임나 흥망에 따른 대소의 빈번한 쟁탈전이 순전히 대마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대마도는 <위지 왜인전>에 의하면 [사는 곳은 絶島(절도)로,넓이는 대략 4백 여리이다. 토지는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도로는 겨우 새나 사슴이 다닐 만한 길과 같다. 1천여호가 있다.좋은 밭은 없고, 해물을 먹으며 자활하는데 배를 타고 남북으로 쌀을 사들인다]라고 묘사되어있다.

 

3세기의 이 기록은 대마도의 자연과 인문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대마도는 3세기 위지 왜인전의 기록처럼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겨우 새나 사슴이 다닐 만한 길과 같다.한 것처럼 지금도 평지는 얼마 없다. 현재 인구도 15000명 정도이다. 필자의 사진>

 

 

 대마도는 한국의 남단에서 약 53km, 일본 큐슈 본도에서도 제일 가까운 나고야로 부터 147km에 위치하여 오히려 일본보다는 한국에 훨씬 가까운 해상에 떠 있는 섬이다. 남북 72km,동서 16km, 면적 714km2 로서 섬이라기 보다 바다에 떠 있는 산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중 백악(518.2m),원견산(375.5m),홍엽산(328.6m) 등 높은 산들은 남쪽에 있고 전 섬이 무수한 산의 연속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산과 골 간과 일부 해안 지대에서만 농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험난한 자연 속에서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 것인가가 대마도에서의 생존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척박한 곳에서 <일본서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규모의 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천황은 또 이곳을 손해 넣기 위해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다는 임나(任那) 관계사의 해석은 온당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선이 임나를 대마도에 국한 시켜 관련 지명 전부를 여기에 비정하게 된 까닭은 일찍이 문정창의 임나=대마도설의 제기에 전적으로 찬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文定昌은 <일본서기>숭신65년조를 그 근거로 들고, 임나가 대마도라는 명쾌한 해석을 내린 장본인이다. 물론 <일본서기>上의 그 해석 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그의 논거는 아무래도 미심쩍은데 어째서 그런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와 큐슈의 3천 리(중국식 리수)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대마도.일기.기타 도서 중에서 대마도는 사방 4백리에 달하여 땅은 넓으나 산이 많아서 주민은 1천호에 불과하였는데, 일기도는 사방 3백리이지만 평야와 밭이 많아서 주민이 3천호에 달아였다고 한<위지 왜인전>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대마도에서의 삶이 훨씬 어려워서, 주민의 수도 오히려 일기도가 세 배나 많았던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추정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역사 방법론

 

 이런 엄연한 증거 기록을 부정하는 근거를 내세우되, 한낱 개인적 추정과 상상력의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는 것은 정당한 사학 방법이 아니다.

 

 魏의 사신 장정이 대마도 내의 戶數를 일천호라고 한 것은 좌호,인위,계지의 세 평야에 위치한 신라,고려.백제만의 주민의 호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대마도의 외곽 지대에는 이 시기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많은  해변 거주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탁순,남가라,탁기탄,졸마,사이기,.산반하,.....등이 있었다(한국사의 연장 고대일본사/문정창)

 

 마치 3세기에 직접 대마도의 섬 전체를 두루 답사하며 확인이라도 해본 듯이 주장하는 이런 식의 논리 전개는 결코 신용할 수 없다. 이렇듯 명확한 근거 제시도 없이 자기 혼자만의 추측이나 상상력의 발동으로 고대사를 논한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역사 왜곡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정창이 [임나 10국 중 加羅가 대마상도,安羅가 일기도,多羅가 오도열도 지방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것이 명확한 史實의 논거를 제시하지 못한 공허한 주장과 독단적 편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李炳銑(이병선)이 문정창의 설을 좇아 임나를 대마도에 국한시켜 관련 지명 전부를 여기에 비정케 된 또 다른 근거로서는 <일본서기> 숭신65년조 기사외에도<<환단고기>>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기인한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계에 있었는데,북에는 바다로 막혀 있다.(北沮海),다스리는 곳이 있어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기 황폐한 촌락들이 있어 어떤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모반하였다. 나중에 對馬의 두 섬(상도,와 하도)은 마침내 任那가 통제하는 바 되어 그 때문에 이때 부터 任那는 대마도 전체를 일컫게 되었다.(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제 6)

 

 위의 <환단고기>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 이병선은 동일 문헌에서 분명히 임나10국이 바다뿐 아니라 육지,즉 큐슈까지 포함되었음을 보이는 기사가 있는데도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오로지 대마도에 국한시켜 지명 비정한 것은 잘못이다. 어차피 <환단고기>를 인용 문헌으로 삼았다면, 같은 책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좀더 철저히 검토했어야 옳은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임나의 큐슈설에 대한 기록과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난 기록들

 

 

 예부터 큐슈와 대마도는 곧 3韓(신라,백제,고구려)이 나누어 다스리던 땅으로 본래 왜인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가 또 갈라져 3가라가 되었다. 이른바 가라란 것은 가장 중심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때부터 三汗(汗:수장,혹은 군장)은 서로 다투고 싸워, 세월이 오래 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현재 대마도에 지명이 남아있다.),인위가라(현재도 지명남아있음)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현재도 지명남아있다)는 백제에 속함이 바로 그것이다. 영락 10년(영락은 광개토왕 때의 연호로 400년),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광개토왕비에 나와있는 신라,백잔(백제가 아님),임나가라 정벌이 대마도를 비롯한 큐슈 정벌/결코 한반도 신라,백제,임나가라,정벌이 아님) 이때 부터 (海陸諸倭)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큐슈에 있는)는 다 임나에 통제되었으니,10국으로 나누어통치하면서 연정(연합체제)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광개토왕을 가리킴)의 명하신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제 6)

 <지역 박물관에서, 사가패총유적으로 대륙계통의 인골 발견-한반도에서 유입된 인종>

 

 여기서 [海陸諸倭(해륙제왜)]라 하여 임나 연방10국이 바다뿐만이 아니라 육지, 즉 큐슈까지 포함되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더욱이 인용된 <환단고기> 속에는 그 임나 연방 10국의 위치에 대해 언급한 기사까지 나온다.

 

 광개토경 호태왕은 융공성덕하여 여러 왕들보다 탁월하셨다. 사해 안에서는 모두 열제라 칭한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일단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인들을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介)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왜로 하여금(使之) 시라기(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케 하였다. 호태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모두 평정하여 굴복시켰다(일본열도의) 임나와 伊國(伊勢라고도 함)과 倭國의 무리들은 신하로써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번성함은 이때가 최전성기였다. ....뒤에 (다파라국:이칭 "다라한국" 을=용성국=석탈해가 있었던곳) 임나에 병합하여 聯政(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였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사국(구야국/삼천포늑도(구라도))의 사람들이 한 집단으로 모여 산 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사한국(구야한국/큐슈로 이주)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忽本(홀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주:광개토왕비에 일찍이 신하로서 조공을 받치고 나오는 대목에 주목) 있으므로 늘 열제(호태왕)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큐슈에 있지만,한국학자는 합천이라고 함:식민사관)은 안라국(광개토왕 비문에 신라성을 지킨 안라군사가 나온다/큐슈)과 함께 이웃하며 姓이 같다. 옛날에 熊襲城(웅습성)을 갖고 있었으니, 지금 큐슈의 熊本城(구마모토성)이 그것이다

 <한국계 무문토기가 발견된 곳은 계지가라-고구려가 지배하던 지역>

 

 이처럼 <환단고기>의 기록에는 임나 10국 중 [3국은 바다에,7국은 육지에 있었다]고 명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狗邪韓國(구사한국:구야한국),多羅國(다라국:일본학계는 합천:옥천고분군일대).安羅國(*역주:기성학계에는 "아라가라"라하여 함안/광개토왕비에 안라가 자주 나옴)이 모두 큐슈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 흠명 23년기의 註에서 이를 임나10국 (가라국,안라국,사이기국,다라국,졸마국,고차국,자타국,산반하국,걸찬국,염례국)의 위치를 모조리 한국 땅에 비정하려 했던 종래의 몇몇 일본 학자들의 시도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자행된, 이른바 황국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 해석이었기 때문에 이들 지명을 韓地에 옮겨 놓고서는 도무지 <일본서기> 내용의 문맥이 통하지 않았던 것도 알았다.

놀라운 일은 아직도 김해 대성동 박물관에 있는 가야 소국중에 임나10국의 지명들이 창원을 비롯한 경남 남부지방에 비정되어 안내판에 게시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광개토왕이 가야를 정벌한 것 처럼 기록되었있는 왜곡의 현장을 목격하였다.

 

 기왕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는 다는 점에서 임나 10국의 새로운 위치 비정의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환단고기>를 인용할 바엔 위에 필자가 제시한 임나 10국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이 같은 기록들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병선은 어째서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지 따지고 싶다.

 

요컨대 같은 문헌 속에서 어느 한쪽의 기사에 대한 바른 인식은, 최초의 임나는 대마도<일본서기>숭신65년조와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였으나, 영락 10년(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의 일본열도 침공의 결과로 인하여 임나연방이 결성되고 이때부터 임나는 [3국은 바다에,7국은 뭍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파악해야 옳다는 점이다.

 

이러한 하나의 결론이 실증적 타당성을 얻어 무리없이 고대사 인식체계로 정립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이 연구서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임나신론의 저자 김문배,김인배 주장)

 <원래 엄밀히 말하자면 대마도는 한섬이었다. 일부 인공해협을 뚫어 지금은 두 섬으로 되었다. 산이 깊어 해변가에 부락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편이다. 만관교 위에서 찍은 사진-이 해협을 통하면 길이 80킬로 돌아 가야한 배가 바로 통과하니 시간의 단축이 된다. 도고함대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하기위해 판 인공해협> 

 

마무튼 임나=대마도설의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가 임나 관련 지명에서 己汶(일본음 고몽)의 위치 비정이다.[참고로 <梁織貢圖:양직공도>記의 叛波國(일본서기 상에는 伴跛國으로 나옴)에서 上己文(상기문)이라고 한것도 이 己汶일 것이다. 후대의 저작으로 <신찬성씨록> 左京皇別下吉田連條下에 보이는 임나 동북의 땅으로서 上巴汶(상파문),중파문,하파문, 삼백리의 땅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 역시 [기문]의 잘못으로 보며, 이처럼 기문의 지역을 상,중,하의 3城으로 나누어 칭하였던 것을 알려 주는 것 같다]

 

<일본서기><계체기> 10년 5월 조에, 백제가 전부 "목협불마감배"를 사신으로 보내,야마토 조정으로부터 오는 物部連(모노노베)들을 "기문"에서 영접하여 노고를 위로하고 인도하여 백제의 조정에 입국시켰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이어서 9월조에는 백제가 "주리즉차" 장군을 보냈는데,"물부연"과 같이 와서 "기문의 땅"을 준 것을 감사하였다고 되어있다.

 

이보다 앞서 계체7년기에서 [백제가 오경박사 段楊爾를 왜에 보내,"반파국"으로부터 약탈당한 臣의 나라인 [ 己汶.帶沙의 兩地를 백제에 주었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병선은 이의 위치 비정에 대하여 [반파.기문.대사.는 모두 대마도 등지에 비정된다.]고 하고는 '기문'을 전라도 '거문도'라고 믿고 있고 이 점은 문정창,고두동 학자들도 마찬가지다(문정창,<한국사의 연장,일본상고사P326)

그런데 과연 이 기문 지방을 거문도로 봄이 타당한지, 아니라면 실제 어디쯤이냐 하는 것이 문제의 관건이 된다.

 <대마도 다카마쯔(高松)유적에서 발굴된 비파형동검,토기,조개장신구 대륙계유물-한국계통유물>

 

 

일본의 <신찬성씨록> 가운데 "좌경 별황"에 있는 길전연(기찌타-노-무라지)조에는 그 위치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신의 나라 동북쪽에 三巴汶의 땅 (上巴汶.中巴汶.下巴汶)이 있습니다. 지방이 3백 리이고, 토지와 인민들이 또한 부유하고 풍요합니다. 그런데 신라국과 서로 다투어 피차가 다스릴 수 없게 될 만큼 싸움이 되풀이되어, 백성들은 생업에 편안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장군을 보내어 이땅을 다스리면 귀국(즉 왜국)의 部로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巴汶=己汶 땅은 임나의 동북방에 위치하며 지방이 3백 리의 방대한 영역이다.

만약 임나의 위치를 일본 사학계의 통설대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김해 혹은 고령)로 비정하고 또 己汶 땅을 아유가이(鮎貝房之進)의 견해대로 경북 開寧으로 본다면, 계체 7년(513년)에 일본(倭)이 方3백 리의 己汶 땅을 백제에 하사했다는 말은, 결국 신라 땅 거의 전부를 이때 백제가 불하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또 이 己汶과 함께 하사한 帶沙 땅을 일본 학계의 통설로는 경남 하동(섬진강 유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왜가 이 兩地를 백제에 준 가장 큰 이유로서는, 계체 23년기에 [백제 왕이....가라의 다사진은 신의 조공의 津路로 삼으려 합니다]라고 함으로써, 왜의 조정에 대해 백제가 조공을 위한 손쉬운 항로를 요청했기 때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韓地에 비유한 任那의 방향과 己汶,帶沙 지방의 모순 투성(일본 사학계와 우리사학계 견해)

 

요컨대 백제가 왜에 조공하기 쉽도록 하동에 들렀다가, 다시 경북 개령까 우회하여 왜(일본)로 가는 경로를 설정한 셈인데 이는 상식 밖에 이야기다. 그 때문에 또 다른 일본 학자는 이 己汶을 基汶川에 비정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삼국사기> <지리지> 康州縣 下에 [하동군 本韓多沙郡]이라 한 것을 근거로 帶沙는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고, 또 己汶은,<翰苑> 蕃夷部 백제조에 [백제를 동남류하여 入海하는 강으로

基汶川이 있다] 한 것을 들어 이마니시류(금서룡)는 이것이 己汶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스에마쓰(末松保和)도 이것을 지지하면서 대사가 섬진강 하구임에 대하여 己汶은 섬진강 중류의 전북 남원 지방으로 추정하였다.

 

이마니시류는 <신찬성씨록>의 吉田連條에서 임나와 관련있는 설화를 상대할 가치가 있는 사료로 보고, 여러가지 고증을 덧붙여,여기에 巴汶을 己汶으로 보고 이것은 甘文 지방이라고 하였으나, 스에마쓰는 이것이 吉田家에서 꾸민 후대의 조작으로 보아 문제 삼을 것이 못 된다는 입장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신찬성씨록>의 위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땐 <일본서기> 관련 기사와의 대조를 통해서 전후좌우의 문맥이 통하지 않게 되는데, 무엇보다 이들 지명의 韓地 비정 자체에서 커다란 모순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신찬성씨록>에서는 기문을 임나의 동북부라 했고, 그 임나를 일본 사학계의 종래 주장처럼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동남부라 한다면, 이마니시류의 주장처럼 대사(섬진강구의 하동 한다사)와 기문(섬진강유역으로 백제를 동남류하는 기문천)이 任那=加耶의 동북부일 턱이 없으므로, 위치상 정반대가 되는 모순을 스스로 범하고 있어 억지 비정이 된다.

 

스에마쓰 역시 대사는 섬진강 하류, 기문은 섬진강 중류의 전북 남원이라 했지만, 그렇게 되면 당시의 임나가 김해나 고령의 어느쪽이든 상관없이 지리적으로 임나의 동북부와는 정반대이므로 사리에 어긋나기에 마찬가지다.

 

이와 똑 같은 이유로 임나를 대마도에 ,기문을 한반도 남쪽 해상의 거문도에 각기 비정한 이병선. 문정창의 견해도 지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기는 한가지이므로 믿을 수 없다. 거문도가 임나(대마도)의 동북방에 있다는 말은 실제의 위치상 맞지 않는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목이긴 하지만, 거문도는 대마도의 서남방에 있어 기록과는 정반대이다. 설령 기문 지방을 거문도로 보는 설을 취소한다 하더라도, 따라서 계체 7년(513년) 무렵의 임나는 대마도가 아니라는 결론이다.

 

오늘날 한일 사학계의 고대사 연구 실상이 대체로 이 지경으로 엉성하여 늘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그러면서도 고작 한다는 궁색한 변명이,[일본의 <신찬성씨록>의 길전연조의 三巴汶(三己汶) 운운한 것은 모두 길전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조작된 설화이므로 상대 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일축함으로써, 문제가 다 해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가령 그것이 조작된 설화일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巴汶=己汶의 위치가 任那의 동북방이라는 내용에서 그 위치와 방향까지 일부러 조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으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었겠는가? 기성 사학계에 따져 묻고 싶은 것은, 자신의 논지 전개에서 불리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이를 조작된 설화 또는 후대인의 가필 따위의 용어로써 일축하여 핵심에서 비켜가는 바람직하지 못한 학문 태도에 대해서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임나관련 지명들은 고스란히 한반도에 설정해놓고 소위 임나흥망사를 논하게 되면 <일본서기><계체기>에 나오는 반파국과 백제.신라. 왜 조정과의 관계사는 실재하지 않았던 허무맹랑한 소설적 차원에 머물고 만다. 이리하여 일본 사학계가 허구를 바탕으로 조작해 낸 거짓 역사가 오늘날엔 마치 하나의 기정 사실인 양 인식되고 있다. 그 이면에는 식민지 시대에 일본식 교육을 받았던  세대가 광복 후에도 여전히 한국 역사학계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동안 소위 강단사학의 중추적 인물들이 대거 식민사관에 깊이 침윤된 그릇된 역사 인식의 굴레에서 탈피하지 못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따라서 李弘稙(전 고려대학 교수)이<양직공도론고>에서 반파국에 관한 서술한 그의 다음과 같은 논지는 그대로 일본 사학계의 주장이나 다름 없다고 보아도 大過가 없다 .

 

[.....중략~~ 이홍직은 반파국을 지금의 경북 성주로 비정하고 있다. 伴破國(반파국)에 관해서는 <일본서기> 계체 7년조(백제 무령왕13년,513년)에 백제가 오경박사를 일본에 보내온 기회에 별도로 同國이 백제의 소속국으로 주장하는 己汶之地를 약탈함을 호소한 데서부터 그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성주는 경북지방에 있어서 낙동강 중류의 서안에 위치하여 후대있어서도 이 지방이 정치적,경제적. 군사적으로 중요성을 지녀온 데 비추어,고대에 있어서도 이 나라는 임나북부의 대표적 세력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백제가 동남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서 이 강성한 반파국의 반발을 받게 된 것은 자연의 일이며, 그 양상이 이후 수년동안의 일본서기 계체기에 잘 나타나고 있다.

동년 冬11월에 일본 왕정에서는 백제.신라.안라.반파 등의 사자를 모아놓고 기문, 대사를 백제에 돌릴 것을 선포하였는데, 한편 같은 달에 반파는 사자를 일본에 보내어 보물을 바치면서 기문의 땅을 소망하였으나 용납이 되지 않았다. 여기에 반파국은 원한을 품고 다음해 3월에는 子呑.대사에 성을 구축하여 滿溪에 연결지어서 일본에 대비하고, 다시 爾列比,麻須比에 성을 쌓아서 麻沮溪.推封에 連하고 士卒.兵器를 모아서 신라에 육박하여 맹위를 떨쳤다.<일본서기>의 이 기사는 백제측에서 제공으로 보이며...(이홍직,양직공도논고,pP409~410)]

 

 

위 인용문에 나오는 지명들 중 자탄(子呑)이 어디인지 그 명확한 위치도 모르면서 酒井改藏은 원문까지 무시해 가며 己呑(기탄)의 誤(잘못)이라 단정하고, 이를 거창의 옛 이름 [居陀:거타]에 비정하였다. 또

滿溪는 [함양군 안의의 옛이름 馬利에 溪를 붙였다]고 제멋대로 추정하는가 하면, 爾列比는 경북 달성군 현풍의 古名인 [三良火]에 비정했는데, 스에마쓰는 이를 경산군 [慈仁]으로 비정<임나흥망사P127>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酒井改藏은 麻須比를 慈仁의 고명인 [奴斯火]에 연관지어 위치 비정함으로써, 가히 반파국의 세력이 경남의 서부 지방에서 경북의 동북까지 광범하게 뻗어 있었던 양 멋대로 설정해 놓았다. 그렇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위치 비정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오는 가를 보자.

 

김해 대성동 고분 박물관의 가야 소국들의 위치 비정을, 일본인들이 멋대로 설정해 놓은 임나 지역비정을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사태(오늘날 식민사학계의 독이 남아있는 현장)

 

 

<가야 소국이라 적은 다라,탁기탄,산반해,다사,탁순 등의 지명들은 임나10국 지명들이며,모두 일본 큐슈에 있어야 할 지명을 일본사학계를 추종한 한국 사학계의 식민사관으로 오염시켜놓은 현장> 

 

어처구니없는 위치 비정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를 살펴보자

 

반파국(기존 설에 따르면 경북 성주=本彼縣)이 己汶(섬진강 중류의 남원)의 땅을 소망하였으나, 일본 천황에 의해 용납되지 않자 자탄(거창의 고명, 거타). 대사(섬진강 하구의 하동)에 성을 구축하고 滿溪(함양군 안의)에 연결지어서 일본에 대비하였다는 셈이다. 이것은 경북 성주에서 경남 하동의 섬진강 하구까지 자유자재로 반파국의 군사들이 넘나들며 城을 구축하였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지리산을 가운데 둔 지형지세와 고대의 교통수단 및 섬진강까지의 엄청난 거리상 이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다.

 

그리고 실은 <일본서기>의 이 기사가 백제측에서 제공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도 없다. 더욱이 기성 사학계가 <일본서기>의 반파국을 경북 성주(본피현)에 비정한는 한, 명백한 사료의 하나인 <양직공도>에 보이는 백제旁小國(백제의 소국들)에 관한 기존의 역사 해석을 전적으로 불신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기록마저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편의대로 해석하는 그들의 비과학적이고 몰상식한 역사 인식의 태도는, 최소한의 학문적 요건인 합리성과 논리적 사고마저 결여된 자들에 의해 허위가 사실로 둔갑된 거짓 역사를 제멋대로 꾸며내고 있다는 혐의를 주고도 남는다.

 

그러한 단적인 증거의 하나가 백제의 <양직공도기>중 제5로 번호를 붙인 부분에 대한 기성 사학계의 해석,특히 일본 史家들의 공통된 견해가 그렇다. 이 부분은 백제에 편입되었다는 방소국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旁小國有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己文,下枕羅, 等 附之<(梁職貢圖)百濟國使臣圖經>

 

그런데 기성 학설 체계에 따라 여기 보이는 叛波<일본서기>의 伴跛(반파)를 경북 성주(이홍직의 <양직공도론고>) 또는 현재 한국 사학계의 통설로 거의 굳어진 고령의 대가야 세력에 비정하고, 斯羅(사라) 新羅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면, 신라 영토 전체가 백제에 편입된 旁小國(방소국/예속국)이었다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온다. 이것은 아예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해석이 기성 사학계에서 별다른 저항없이 통용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일본서기> 기사 내용을 절대시하는데 따른 이들 지명의 韓地 비정을 고착화 시킨 일본 사학자들에게 무분별하게 추종해온 한국 사학계의 오랜 학풍 때문이다.

 

일본의 고서역기엔 반파국에 관하여 [任那之別種,其地未詳]이라 하였고, 문정창은 일본 학계의 한반도 비정의 억설에 반발하여 [반파국은 큐슈지방의 어느 섬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일본서기> 속후기는 [三己汶地,遂隸百濟國]이라 하였으며, 이미 반파국으 旣殿溪.竹汶至等 두 대표가 참석한 자리에서 기문의 땅을 백제국에 할양했거늘, 그 반파국이 같은 달에 기문의 땅을 요구했다 함은 있을 수 없는 일로써 이 대목은 가필자의 作亂이었을 것이다.<문정창의 <일본상고사>제 2장 일본서기역주.p.361)

 

그런데 다시 같은 책의 페이지에서 금세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듯 [반파국은 남해상의 一島嶼國(한개 도서국)이었던 것 같으며, 이때 羅.濟간에는 동성왕 7년 이래의 和好가 계속되고 있었다]라는 역주를 덧붙여 놓고 있어 스스로 착란에 빠진 듯하므로 어느 쪽도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

 

결국 혼란의 원인은, 한일 양국 학자들 모두가 <일본서기> 임나 관련 지명들의 잘못된 위치 비정에서 전적으로 기인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쯤에서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면, 소위 [임나문제]는 그 10국의 위치 비정에서 부터 한반도에 설정하는 잘못된 발상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획기적 전환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문제 해결에 이르는 지름길을 발견케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최초의 임나 위치는 대마도 였으나,영락 10년(400년)에 광개토왕의 일본열도 침공에 따른 정세 변동의 결과로 인하여 임나연방으로 재편성되고, 이 가운데 3국은 바다에,7국은 육지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임나 관계사의 올바른 인식일 것이다.

 

 <윗대마도 관망대에서 부산항구로 향해 찍은 야경, 오른쪽이 해운대 불빛 중앙동 남포동불빛이 보인다.부산에서 직선으로 49키로에 위치한 대마도>

 

 참고문헌:任那新論 1995년 고려원 간행 저자 金文培,金仁培 p.107~124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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