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韓에 관한 소고

2010. 2. 28. 22:31한민족고대사

 

<들어가는 말>

 

삼국사기에는 韓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김부식 공은 이 땅에 대한 역사인식에 있어 단군조선,辰. 震과 더불어서 韓 역시 이 땅 선조들의 나랑며

우리 역사라는 일말의 인식과 그 가치도 느끼지 못한 모양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마한이란 독립된 항목이 있지만, 그 내용은 한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커녕 오히려 혼란만

주고 말았습니다.

 

두 사서 모두 이렇다할 내용이 없기 때문에 한단고기 마한세가나 지나 정사인 후한서와 삼국지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 사서의 기록 분량은 삼국유사 것의 몇 십배에 달합니다.

 

하지만 기록이 있다하더라도 한단고기 기록은 왕명이나 계보 위주로 서술하면서 작위적인 느낌에

내용 역시 사실적 기록이 적고 타 사서와의 상호 교차 검증을 하기 어려워 신뢰하기 힘들고,

후한서.삼국지 역시 체계있는 서술이 아니고 당시의 상황에 대한 현상 기록이기에 

그 건국 연원은 물론 결말조차도 알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상황이니 한에 관한 기록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눈이 번쩍 뜨일 지경입니다.

 

체계를 갖춘 사서로 오직 삼국사기만 남은 현 상황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마치 삼국의 건국이 이땅의

최초 국가인 양 편향된 시각을 갖도록 은연중 강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 조선이라는 국명만 간신히 전하고, 조선의 유민들이 흩어져서 제대로 나라도 세우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황을 애써 만드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고, 오직 삼국만이 일찍부터 건국하여 승승장구 성장하여

이 땅에서 유일하게 정통성을 확보한 삼국이라고 광고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에 대하여 지나인들이 저들의 정사인 후한서 나 삼국지의 기록은 영 딴판임니다.

한은 저들에게는 동북쪽 땅이라고 기록하였고, 3 세기의 상황을 북쪽에서는 부여와 고구려.예.옥저의 총호수

13.5 만여호였다고 하며, 남쪽의 한은 78 개국14~15 만여호로 그중에 백제와 사로가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신라라는 국호도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서기 300 년에 등장합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한에 관한 기록이 어느 사서에라도 조금이라도 비치면 적극적으로 수용.검토하여서,

한의 위상을 제자리에 올려 놓아야하고 조금이나마 본 모습을 밝혀내야 할 숙제가 한의 후손인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 지나인들이 기록한 韓 > 

 

우선 지나 사서에 보이는 것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1. 시경 한혁편

 

시경 한혁편은 기원전 9 세기 서주 선왕(기원전 828~782) 때의 작품으로 전해옵니다.

한후韓侯가 서주를 방문하는데 방문의 목적은 주 왕실과의 결혼이였으며,

이때의 상황을 묘사한 시귀가 남겨져 내려온 것입니다.

 

대략적 내용은

    `높고 큰 양산은 우왕이 다스리던 곳, 밝으신 그 도를 따라 한후가 명을 받았다....

     커다란 저 韓의 城은 연나라 군사들이 쌓았고,

     선조들이 받으신 천명을 따라 백만을 다스리신다.

 

     주왕은 韓侯에게 追族과 貊族까지 내려주셨다.

     북쪽의 나라들을 모두 맡아 그곳의 패자가 되었다.

     성을 쌓고 해자를 파며 농토를 정리하여 세금을 매겼다.

     예물로 총휴 가죽과 붉은 표범 누런 말곰 가죽을 바치였다.` 입니다.

 

여기의 한후가 마한,진한,변한의 선조가 확실하냐구요?

의문이 없을 수 없겠지요.

윤내현은 <고조선연구>에서 한후를 고조선의 단군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저는 조선의 단군이 아닌 한왕의 서쪽 제후로 보고자 합니다.

 

시경 한혁편에 나오는 梁山양산은 섬서성 서안과 하북성 방성 두 곳에 있다고 합니다.

연나라 가까이에 있는 것은 하북성 방성라는군요.

 

2. 잠부론

 

     ` 옛날 주의 선왕 때에 또한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燕에 가까왔다. 그러므로 시경에서

       말하기를 `` 커다란 저 한의 성은 연의 군사가 완성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

       또한 姓을 韓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나라를 잃고 해중으로 들어가 살았다.`라는 내용입니다.

 

잠부론은 후한시대 왕부가 저술했다고 합니다.

위만에게 나라를 잃고 해중으로 들어간 주인공은 조선왕 준입니다.

준왕의 후예들이 조선땅에 눌러 살면서 성을 한씨로 하였다고 기록한 삼국지 한조 주석으로 인용한

위략의 글은 있을 수 있는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한씨들의 동쪽에 동천한 한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이라는 국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 비록 짧은 글이지만 조선의 준왕 보다도 대략 500 여년 전에 지나의 주국과 국제 결혼까지 하고,

저들 지나인들에게는 위협적인 이종족이였을 추,맥족에 대한 통제력 행사를 부탁받는 상황으로 볼 수

있는 정도의 당당한 한후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내려왔습니다.

 

한편 한국인 대다수는 삼국유사,삼국사기 기록에 의존하여 심하게 축소되고 왜소한 모습의 한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 역사에서 한은 무시된 것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한을 시기적으로 기원전 1 세기 전후하여 존재하였던 나라들이였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

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9 세기부터 기록에 올랐으니 최소한 1000 년을 넘긴 나라였습니다.

 

한편 단재는 삼한을 한반도 남반부에 비정한 후조선시대 구암 한백겸을 극찬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암이나 단재의 삼한의 위치 비정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삼국지에 기록된 한의 위치

 

단적인 예로 삼국지 왜조에는 대방군에서 왜국으로 가는 이정을 기록해 놓았는데,

 

`군에서 뱃길로 해안을 따라 한국을 지나는데 남쪽으로 또 동쪽으로 가면 도착하는 북쪽의 해안가인

 구야한국까지 7000 여리이고, 다시 또 1000 여리 바다를 건너 대마국에 이른다. ...

 다시 남쪽으로 1000 여리 澣海한해라는 바다를 건너면 큰 나라에 도착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위 기록에서 `남쪽으로, 다시 동쪽으로 간다`라는 것은 현 대한민국의 서해안과 남해안을 말한 것입니다. 

또 대마국은 대마도를, 구야한국은 삼국지 한조의 78 개 국중 변진구야한국을 지칭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변진 구야한국은 지금의 경상남도 부산 지역 부근을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방군에서 출발하여 뱃길로 해안을 따라 한국을 지나는데 방향이 남쪽으로 또 동쪽으로 가서 지금의 부산지

역까지 7000 여리라는 거리로 보아 출발지인 대방군이 강단에서 주장하는 현재 북한의 황해도일 수는 없다고

각합니다.

 

실제 조위 조정에서 정시원년인 서기 240 년에 대방태수 궁준은 제왕 방의 조서와 인수 및 하사품을 왜국으로

전하기 위하여 건중교위 제준등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낙랑군 남쪽 대방군에서 구주의 왜국까지 이정이 12,000 리라는 나름의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강단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 대동강 평양이 낙랑군 치소이고 황해도가 대방군이라면,

황해도에서 부산 부근까지 7000 리, 구주 내륙 야마대국까지 12,000 리라는 기록은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한

엉터리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후한서 군국지에는 낙양에서 각 군까지의 거리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낙양에서 북경 북쪽인 상곡군까지 3200 리

낙양에서 난하 하류인 요서군까지 3300 리

낙양에서 연사 부근인 요동군까지 3600 리

낙양에서 승덕 부근인 현토군까지 4000 리

낙양에서 대릉하 부근 낙랑군까지 5000 리

 

실제로 항해한 조위 관리들이 기록한 7000 여리를 충족시키려면 대방군의 위치를 황해도에서 훨씬 더 북쪽으로 올려야 됩니다.

따라서 구암이 삼한을 한반도 중부 이남에 배열한 것은 그른 것입니다.  

 

< 한의 위치와 영역 > 

 

1. 서쪽 영역과 근거 기록

 

그러면 샛길은 그만 가고, 

위에서 말한 연나라 가까이 있다는 한성과 한후가 명을 받아 다스린다는 양산이 있는 하북성 방성은 대체

어디일까요?

그 답은 의외로 수경주에 보입니다.

북위시대 사람인 력도원이 수경에 주석을 달아 수경주를 저술하였는데 권12 聖水 巨馬水조에 한성이

등장합니다.

 

       聖水出上谷故燕地 秦始皇二十三年置上谷郡...

       又南逕良鄕縣故城西 王莽之廣陽也 

       聖水又東逕長興城南 又東逕方城縣故城北...

 

       聖水又東南逕韓城東 <詩韓奕章>曰 박彼韓城 燕師所完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鄭鉉曰 周封韓侯 居韓城爲侯伯 言爲험夷所逼 梢梢東遷也

       王肅曰 今탁郡方城縣有韓侯城...

 

       聖水又東南流 右會淸淀水 水發西淀 東流注聖水 謂之劉公口也 又東過安次縣南 東入于海

       聖水又東逕渤海安次縣故城南 漢靈帝中平三年 封荊州刺史王敏爲侯國

       又東南流注于巨馬河而不達于海也

 

대략 

성수는 진시황이 설치한 상곡군의 서쪽 성수곡에서 발원하여 동남류하여 대방령의 동쪽에 있는 수산

아래를 지나...남류하여 양향현 옛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왕망이 광양이라 하였다...

또 동류하여 장흥성 남쪽을 지나고 계속 동류하여 방성현의 옛성 북쪽을 지난다.

성수는 또 동남류하여 한성의 동쪽을 지나고...

동쪽으로 안차현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고 기록하였군요.

 

성수와 거마수는 지금의 양정하의 남쪽 지류를 설명한 것입니다.

수경주 권 13 루수조는 루수가 안문 음관현에서 발원하여 동북류하며 대군 상건현 남쪽을 지난다라고

시작하여 순임금의 도성과 묘, 요임금 묘, 황제와 치우가 싸운 탁록의 들을 지나고 끝에는 동류하여 어양군

옹노현 서쪽에 이르러 사구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루수의 입해처를 규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리적 상황이 변경되었을 수도 있고, 설명이 부정확했을 수도 있습니다.

확률이 높아보이는 것은 기록할 당시 강의 물량이나 해수면의 높이가 현재보다 많았고 높았을 것이라 봅니다.

그러한 연유로 기록상의 물줄기가 중하류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입해처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발원지,흐름방향, 경유지 지명등을 볼 때에 수경주에서 성수,거마수,루수로 제목을 달아 설명한 

물길은 지금의 양정하를 설명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수경주의 편집 순서를 눈여겨 보면 권 1 ~5 까지 황하를 시작으로 권 7~8 에서는 산동의 제수, 그리고 북쪽

으로 오르며 권 11~13 에서는 이수,성수,루수를 설명하고 권 14 에는 연의 북쪽과 동북쪽 물길인 습여수,고하,

포구수,난수,대요수,소요수,패수를 기록한 다음 권 15 부터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락수,곡수,위수...강수

등을 설명하였습니다.

지나인들이 저들의 영역 안에 있는 물줄기만을 설명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단고기에서 조대기를 인용한 한성의 위치는 탁현 방성현의 한성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탁현 방성현의 한성은 사실 서쪽으로 너무 치우쳤습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정현이 설명한 것처럼 한성에 거하던 한후가 세력이 약해져서 그러했는지 험이에게

핍박을 받아 점점 동천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동천하는 한후가 새 근거지에 세웠을 성이 한두개가 아니었을 것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중에는  새로 축성한 이름이 한성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며, 이렇게 동천하며 세운 한성이 조대기의 한성일

것으로 추측되며 그 위치는 현재의 옥전 부근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시경, 잠부론, 수경주 등에 기록된 한성과 한후를 근거가 약하다고 논외로 한다면 한 혹은 삼한의 연원과

그 외연은 아마 영원히 찾지 못할 것입니다.

떡을 쥐어주어도 먹는 떡인지를 모른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아닐런지요?

그래서 실현 가능할 만한 추측을 사서 기록 범위 내에서 계속해 보겠습니다. 

 

`점점` 동천하는 한후나 혹은 한후를 제후로 삼았던 한의 토착세력이 본격적으로 기록에 오른 것이 

 

후한서와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입전된 것이라고 봅니다.

연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끼고 해중으로 피난간 주인공을 왕부는 성이 한씨라고 했지만, 사마천의 사기나

어환의 위략에는 한후가 아닌 조선왕으로 기록하였고, 피난가지 않았던 조선왕의 후예들이 한씨 성을

모성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위만이 조선의 준왕을 내쫓고 얻은 땅이나, 한나라 유철이 우거를 내쫓고 설치한 낙랑군 땅이 이글의

주인공인 한후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잠부론에서 말한 것의 일부처럼 한후가 있는 곳에서 서쪽의 일이였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왕부는 `한의 서쪽에서`라는 설명을 하였는데,

여기의 한을 하북성 탁군 방성현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한후가 동천하면서 세력을 유지한 한후의 후예들인지

혹은 한후를 서쪽 제후로 봉할 정도의 세력을 가진 토착 한왕인지는 구별이 어렵지만 아무튼 시기적으로 한의

최종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2. 동쪽 영역과 근거 기록

 

그렇다면 한이 있는 곳, 즉 도성이나 한왕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은 조선 땅과 어떻게 구별이 되었을까요?

이것을 짐작케하는 기록들은 이시기부터는 무궁무진합니다. 

가장 단적이고 극적인 기록은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백제가 남하할 때 마한왕이 동북 100 리 땅을 주었다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조 기록,

        박혁거세가 호공을 마한왕에게 보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조 기록.

        마한과 예맥의 군사를 동원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 기록으로 보면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고구려,백제,마한이 자리하고 있었고, 신라가 마한왕을

서한왕으로 호칭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는 마한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북성 방성현에서 동천한 한후의 후예들은 인종적이던 복속관계이던 간에

조선보다는 삼국사기 기록의 마한과 더 가까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예조에

 

      `예의 북쪽에는 고구려,옥저가 있고, 남쪽에는 진한이 있다. 동쪽으로는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낙랑이 있다. 예,옥저,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 땅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예의 남쪽에 있는 진한은 조선땅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서나벌국 혁거세거서간이 신하에게 서한왕이라고 했던 마한 역시 옛 조선땅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옛 조선땅이였던 고구려에서 분가하여 남하한 백제는 마한땅에 들어와 마한왕으로부터 거처할 땅을 얻었던

것입니다.

 

3. 남쪽 한계와 그 영역

 

한에 관하여 가장 많이 기록한 진수의 삼국지 오환선비동이 한조를 보겠습니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고 동과 서쪽이 모두 바다로 경계하고 남쪽으로는 왜와 접했다.

      방 4000 리이고, 세 종이 있는데 마한,진한,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고 백성은 토착민이다....

      ... 총 10 여만호이다. ...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의 이야기로는 자기들은 진나라의 부역을 피하여 한국으로 오니

      마한이 동쪽땅을 나누어 주어 살고 있다고 한다.... 진나라 사람과 비슷한 점이 있다.... 낙랑에 잔여인이

      있으며 지금은 진한자라고 하며 처음에 여섯나라였는데 점차 나뉘어 열두나라가 되었다.

 

      변진 역시 열두나라이고... 변진한은 합하여 24 개 나라이다... 총 4 ~ 5 만호이다. 12 개국은 진왕에

      속하였으며 진왕은 마한인이 승계하였다....

      변진은 진한과 잡거했는데 역시 성곽이 있었고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았고 언어와 법속은 서로

      비슷했다.

 

      제사와 모시는 귀신은 달랐으며 굴뚝은 집의 서쪽에 있고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이어졌다.

      열두나라 모두 왕이 있고 체격이 크고 의복은 깨끗하였고 머리는 길었다. 넓고 촘촘한 포를 만들줄 알고

      법속은 특히 엄했다.

 

문득 삼국유사 기이 마한조가 생각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의 역사가 우리 역사서 보다 지나 정사 귀퉁이에 더 많이 기록이 되었는지...  

 

위 기록에서 대방군의 위치 파악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시발점이 될 것인데 그간 그릇된 선지식이 있어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한국 고대사의 핵심 쟁점인 한사군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회해서 보겠습니다.

한은 삼국지 왜조 기록을 근거로 설명했듯이 현 한반도 전체가 그 영역이였습니다.

문제는 동천하는 한후와 한반도 전체의 한과는 어떤 관계인지가 될 것입니다. 

 

한후가 동천했다면 그 진행 방법은 아마 육로를 따랐을 것이고 각종 사서에 출현하는 세력들과 전쟁을

벌이거나, 틈새를 따라 피하거나 하며 동천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동천과정에서 기록에 남은 것이 조대기의 한성이였습니다.

 

조대기의 한성은 현재 북경 동쪽의 옥전 부근이였고, 잠부론의 한은 조선왕 준의 동쪽이였습니다.

사실 조선왕 준의 동쪽에 있다는 한의 위치는 강단의 주장을 따른다면 한반도 평양지역에 조선왕이 있었으니

한은 동해안 원산 부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한의 동쪽에 있었다는 진한의 위치를 설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선왕 준의 영토에 한나라 유철이 낙랑군을 설치하였고 공손씨가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나인들의 기록인 삼국지 왜조에는 다행스럽게 대방군에서 출발한 사신이 현재 일본의 대마도와

구주 내륙까지 뱃길로 다녀온 이정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방군에서 변진구야한국인 지금의 부산지역까지 7000 여리 뱃길이고, 뱃길의 진행

방향이나 경유하는 지명을 기록하였습니다.

 

후한서는 군국지 상곡군 주석에서 낙양에서 북경의 약간 북쪽인 상곡군까지가 3200 리라고 한 것을 감안하면

동시대에 한반도 황해도에서 부산 부근까지 뱃길로 7000 리라 할 수는 없습니다.

 

군국지는 요서군은 3300 리, 요동군은 3600 리, 현토군 4000 리, 낙랑군까지는 5000 리라 했습니다.

가늠하기 힘들지요?

지금 중국의 지도를 펴놓고 보면 북경 바로 위쪽인 창평이 상곡군의 속현이였습니다.

  

그리고 요서군과 요동군 사이에는 요수가 흐른다는 것은 상식이지요.

자. 낙양에서 상곡군까지 3200 리와 비교하여 불과 300 리 더 멀고, 요수 동쪽에 설치하였을 요동군이

과연 어데 있었겠습니까? 

상곡군보다 불과 100 리, 500 리 더 먼 요서,요동군을 장성과 갈석산이 있는 현재의 난하 부근을 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즉 정사 기록에 등장하는 요수와 낙랑군,대방군은 현재의 난하와 대릉하 사이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한서의 거리 기록이 착오가 있었다고요?

물론 우북평과,어양군의 기록은 잘 못된 기록입니다.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누군가 짧게 기록한 것이죠.

 

우북평에서 발원하는 백랑수가 동북류하여 요동군의 방성현에서 요수와 합류합니다.

수경주의 기록입니다. 물길을 설명하면서 무슨 이득과 영화를 누리자고 거짓을 기록하겠습니까?

당연히 상곡군의 동쪽에 있었던 우북평군은 상곡군 거리인 3200 리 이상이어야 하지만

후한서에는 2300 리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리수들은 이후의 지리지에서 그대로 이어집니다.

당 시대의 통전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리수를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명과 역사 사실은 리수의 모순을 극복합니다.

단재는 당 태종이 곡필을 일삼았다며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시경의 한후가 영정하 하류 유역에서 동천하였다고 하였고,

조대기의 한성이 하북성 옥전 부근에도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낙양에서 5000 리 떨어진 낙랑군이 난하와 대릉하 사이로 추정되는 그 곳 부근이

한후의 이동 경로상 자연스럽고 납득할 만한 곳이 아닐런지요?

 

또 낙랑군 땅의 전 주인인 조선 준왕의 동쪽에 한후가 있었다고 하고,

한반도 부산지역에서 해안을 따라 뱃길 7000 리의 종착지 역시 황해도를 넘어 발해 북안까지 보아야

하는 그 곳에도 한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즉 발해만 북안 내륙이고 해안가인 곳에 마한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한반도 전체가 역시 한이였다고 볼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삼국지 한조에는 위략의 글을 인용하여,

우거의 시대에 조선상 역계경이 2000 여호를 이끌고 동쪽 진국으로 망명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조선의 동쪽에는 예가 있었다고 하였고, 예의 북쪽에는 동옥저가 있다고도 삼국지는 기록하였습니다.

 

역계경이 간 곳은 예도 아니고 동옥저도 아닌 진국이라 했는데, 삼국지 한조에는 마침 진국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진국이 진한으로 바뀌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계경은 예,동옥저를 지나 진국에 도착한 것이고 대략 300 여년이 지난 진국의 상황은 진한으로

바뀌였는데, 이는 한의 예속을 최근에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변진과 진한이 잡거하고 24 개국이 있는데 그 중 12 개국이 진왕에게 속해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진왕은 마한인이 세우고 세세토록 승계한다고 하였습니다.

변진 12 국도 역시 왕이 있다고 기록하였지만 진왕에 속한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변한이 아니고 변진이라고도 불리우는 것은 변진이 마한의 예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마한, 진한, 변한의 세 종인 한이라는 말은 종족적,문화적으로 조선,예맥,동옥저,고구려,백제와 근소한

차이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다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거주영역의 차이 뿐이였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먼저 기록상으로 확실한 변진 구야한국 부터 검토하자면,한반도 부산지역에 변진 구야한국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또 변진독로국이 왜와 경계를 접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대마도 일부도 점거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부산

지역인 경상도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는 변진의 영역이었 것이라 봅니다.

진한 12 국과 섞여 있다는 기록과 동시에 진한의 남쪽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 한조에는 마한은 10 만여호였고 진한과 변진을 합친 호수는 4 ~5 만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부여는 8 만호, 고구려 3 만호, 예 2 만호, 동옥저 5 천호였습니다.

1 호를 5 명으로 계산하면 마한 50 여만명, 진한과 변진 25 여만명, 옛조선 땅에 있는 고구려,부여,동예,동옥저

모두 65 만여명이 됩니다.

총 140 만여명입니다. 

후한서에 기록된 낙랑, 현토군민 29 만여명 보다는 훨씬 많습니다.

 

낙랑,현토군의 29 만여명은 우거왕의 조선 부근을 차지하여 거주한 인구였을 것이고, 북쪽에 있었던 부여,

고구려와 낙랑군의 동쪽에 있었던 예맥과 동옥저 인구의 합이 65 만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의 인구는 75 만여명이였습니다.

자 75 만여명 중 마한의 인구인 50 여만명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위에서 발해 북안 내륙 해안가에 50 만명이 모두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위에서 변진은 한반도의 남반부에 비정을 하였습니다. 즉 4~5 만호의 반인 2 만여호로 보고 10 만여명이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가정합니다. 

변진의 5 배에 달하고 낙랑,현토군의 2 배에 이르는 인구가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옛조선땅에서 일어났다는 부여,고구려,예,동옥저의 총인구수 65 만명과 필적하는 그 백성들이 삶을

영위하는 땅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요?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조를 보면 마한왕이 백제의 초기 건국지인 대방고지도 떼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백제본기 고이왕조에는 낙랑군의 변방을 기습하여 변민을 약탈했다가 태수가 화를 내자

돌려주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낙랑군과 백제 사이에는 바다는 없었고 육지로 인접하였던 것 같습니다.

 

백제의 초기 건국지는 낙랑군과 아주 가까이 있었고 그 땅의 원 주인은 마한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백제가 낙랑의 서쪽에 있었다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는 기록하였으니,

마한 땅 일부 역시 낙랑의 서쪽에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 한 기록에 대한 검증 >

 

1. 요서백제론의 기록을 통하여

 

중국의 정사인 남사에는 이해하기 힘든 기록이 있지요.

북위의 로병이 침입해 온 것을 백제가 격퇴하였다는 내용입니다.

김부식 공도 백제본기 동성왕조에 기록한 이 사실은 현재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의문의 기사입니다.

소위 요서백제론의 근거 기록으로 설왕설래하며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남사 권 79 열전 제 69 백제조 기록입니다.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 삼한국인데 그 하나는 마한, 둘은 진한, 셋은 변한이다.

        변.진한은 12개국이고 마한은 54개국이 있다. 큰 나라는 만여가이며, 작은 나라는

        수천가에 이르고 총 10 여만호이다.

      

        백제는 그중 1 개국이고 후에 점차 강대해져 여타 소국을 병탄하였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와 같이 요동에서 동쪽으로 천여리 거리에 있다.

        진시대에 고구려가 요동을 약유하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 2 군 땅에 백제군을

        두었다.

 

위 기록이 요서 백제설의 근간이 되는 기록입니다만 요서백재설은 백제의 초기 건국지나 당시의 영토를

한반도 중부에 정치시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사는 백제가 요동에서 동쪽으로 1000 리 떨어져 있다고 하며, 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함께

1000 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즉 삼국사기에서 본 것처럼 낙랑군의 서쪽에서 건국한 백제는 한반도 한강 부근이 아닌 발해 북안 내륙이고,

역시 낙랑군 또한 발해 북안 내륙에 있었습니다.

낙랑군의 북쪽에 있었을 고구려와 같이 백제도 요동에서 1000 리 떨어져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백제가 서진말에 서쪽으로 요서군에 진출한 것입니다.

 

요서백제설? 우습지요.

고구려가 요동을 약유했는데 그렇다면 이 현상을 요동고구려설이라고 해야 합니까?

 

또 한가지

어떻게 고구려와 같이 1000 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기록을 무시하자구요?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선지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많은 기록들이 지금까지의 한국인의 역사상식을 뒤엎어놓잖아요.

언제까지 동쪽이 아니고 남쪽인데 잘 못 기록한 것이다...라는 등의 구차한 변명인지 두둔인지 모를

소리들을 늘어놓을 심산입니까? 

눈 딱 감고 `백제 건국지가 발해 북안 내륙에 있었다`고 자수하면 모든 기록이 아귀가 맞아 떨어집니다.

아귀 맞추자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말갈.물길 기록을 통하여

 

또 꼭 검토해야만 하는 것으로 말갈이 있습니다.

강단에서는 말갈을 춘천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종족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말갈은 중국 정사에서 일정하고 뚜렸하게 그 계보가 설명됩니다.

숙신의 후예, 숙신 땅에 사는 종족으로 시작하며 위서에는 물길로 기록되었고,

물길은 고구려의 부용종족인 백산, 속말말갈과 종족 중에서 최강인 흑수말갈이 일관되게 기록되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와 신라 초기 기록에는 말갈이 자주 공격하여 두 나라가 곤욕을 치룹니다.

또 위서 물길전에는 서기 471 년경에 사신 을력지를 북위에 파견하는데, 그 나라 즉 물길에서 출발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 난하 부근에 이르러 육로로 거란의 서쪽 경계를 따라 화룡에 도달하였다고 기록하고는,

이때 사신이 말하기를 `백제와 공모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겠다`고 하며 북위조정에 그 허락을 구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를 보면 백제의 땅이 신라와 발해말갈의 소유가 되어 나뉘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백제를 한반도 중부 이남에만 있었다고 한다면 백성이 아닌 땅이 발해말갈의 소유가 되었다는

기록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김부식 공이 말도 되지 않은 글을 남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公의 가장 큰 功은 `述以不作`이라고 나름 판단합니다.

즉 고기와 지나사서를 편년대로 짜집기 작업에 충실하였고, 다행히 역사를 만들지는 않았다는 말이지요.

 

또 말갈과 관련한 기록은 구당서와 통전에도 있습니다.

사실 통전은 한술 더 뜹니다. 백제의 성 주위에 있던 뭇 백성들이 돌궐과 말갈로 나뉘어 투항했다는군요.

강단은 아마 이렇게 해석할 것 같습니다.

한반도 중부 웅진에서 배타고 북쪽으로 갔을 거라고...

 

물길의 사신이나 위서,구당서,통전의 저술가와 편찬자를 정신이상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저 기록들이 충분히 석명되지도 않고 사장되었지만, 북위의 백제 공격과 물길이 백제와 공모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겠다는 기사에서 보듯이 백제의 영역을 발해 북안으로 추정해야만 가능한 기록들입니다.

 

이것은 백제에게 동북땅 100 리를 떼어준 마한 역시 발해 북안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하북성 탁군 방성현에 있었다는 한성의 한후가 점차 동천하여 백제의 초기 건국지 부근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역시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착 한이라고 보아야겠지요.

 

3. 고구려와 관련하여

  

한가지 더 보겠습니다.

고구려 태조대왕이 현토군을 공격하면서 마한병사를 동원합니다..

마한의 일부였을 병력을 고구려가 현토군을 공격할 때 동원한 그간의 과정은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정을 모른다고 결과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강단 주장대로 대동강의 낙랑군을 넘어 고구려가 경기도,충청도에 있었다는 마한병력을 포로로 획득했건,

마한병력이 자진해서 월북을 했건 고구려는 마한병을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한반도 전체를 넘어 발해 북안 내륙에서 조선의 남쪽에 있었으며,

백제에게 초기 건국지를 떼어준 나라는 마한이였습니다.

 

백제는 대수가 흐르는 대방고지에서 건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땅은 마한왕이 떼어준 것이고,

고구려는 패수 남쪽으로 진출하며 대수, 한수 지역의 백제에게서 내몰린 마한병을 흡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고운 최치원의 말이 옳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삼국지에 기록된 마한 54 개국 50 여만명은 발해 북안 내륙에도 존재했었습니다.

 

이러한 마한의 영토를 백제가 성장하면서 서진말부터 병탄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조금 자세하게 추정하자면 발해 북안에 있는 마한 영역과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서부도 마한의 영역이였는데 역시 이 지역도 병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초기에 마한의 동쪽인 秦韓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곳 역시 발해 북안인 현 요동만 북안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곳에서 서나벌이 건국하였고 다른 계퉁의 세력들과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동쪽의 진국 후신인 진한을 병탄하며 성장하며 남쪽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은 한반도 경주에서 북상하며 획득한 승리의 비문이 아니라

거꾸로 남하하면서 꽂은 깃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샛길로 갔군요.

백제는 마한의 영역을 차근차근 착실하게 접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천하는 한후의 영역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개국지에서 세력을 서쪽으로 뻗어 요서를 약유하고,

또 역시 마한의 고지인 요동반도 서부와 한반도의 서부에서 일정부분의 북부를 점유 확대해 나간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에서 백제가 멸망할 당시 전쟁 현장은 발해 북안으로 보아야 합니다.

위례성과 한성과 웅진성이 그 곳에 있었고 성왕 23 년인 서기 538 년에 남한으로 옮겼다는 기록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 곳의 남한이 충청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발해 북안 해변가 가까이에 있었을 웅진에서 천도하며 남한이라고

할 정도라면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추측할 만한 기록 역시 몇가지 됩니다.

 

첫째  인구수로 볼때 백제 76 만호, 고구려 69 만호로 백제가 훨씬 많습니다

        구당서는 고구려 영토가 동서 3100 리 남북 2000 리라고 하였고, 백제의 기록은 하지 않았는데 수서에는

        동서 450리 남북 900여리라고 하였습니다.

        고구려보다 인구 밀도가 훨씬 높았더라도 발해 북안에만 있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발해 북안 내륙에서 고구려 남북 2000 리 남쪽에 백제의 남북 900 여리가 온전하게 있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둘째  구당서에은 백제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소해의 남쪽이고...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려에 이른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강단에서는 소해를 경기만이라고 해석하나 봅니다.

        

        그런데 경기만이라고 해석한다면 다른 기록들을 제대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경사에서 6200 리 떨어졌다는 구당서 기록을 납득시켜야 하는데 아마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고구려는 경사에서 동쪽으로 5100 리 떨어졌다고 하였고, 왜국은 기냥 14000 리, 거란은 동북으로 5300,

         해국은 동북 4000리, 실위 동북 7000 리, 말갈 동북 6000 리, 진국인 발해말갈은 영주 동 2000 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대에 영주에서 작란을 쳤다는 거란이 동북 5300 리 거리인 것과, 영주가 현재의 란하 부근인 것을

         감안하면 5100 리의 고구려와 6200 리의 백제가 어디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지금의 대릉하의 이북 지역에 있었고, 백제는 대릉하 이남 지역에서 위례성, 한성, 웅진성

         으로 천도하는 양태를 보면 점차 발해 해안가로 쫒겨나는 상황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삼국사기 기록에 서기 538 년 국호를 남부여 수도를 사비라 하는 것을 지나인들도 사서에 기록

         하였는데, 남사.북사.위서.수서.통전.구당서 등에 나타나는 `소해`라는 표현입니다.

 

         이 이후의 백제의 역사는 거꾸로 가기 시작합니다.

         북에서 남으로 천도하면서 드디어 요동만을 건너 요동반도인지 충청도인지 모를 사비성으로 내려온

         남부여를 오히려 강성하여져서 요서군에 백제군을 두었을 정도라고 말합니다.        

 

세째   지나 북망산에서 출토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숭의 묘지석에 `辰朝人`이라는 글귀가 있답니다.

         이것은 부여숭의 종족 계보를 밝히려는 문구라고 보며, 아마도 辰國, 진한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봅니다. 

 

         백제의 남한 천도를 북사 열전 백제조에서 도성인 거발성, 고마성 외에 5 방성이 있다는 기록과

         연결하여 보자면, 사비성은 백제가 이미 진출하여 거점을 마련한 동방의 득안성이거나 남방의

         구지하성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즉 득안성은 요동반도에, 구지하성은 한반도 충청도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합니다.

 

         남사 열전 백제조에서 지나의 군현격이라는 22 개의 담로는 왕실 자제 종친이 나누어 점거한 大城들일

         것이라고 봅니다.

         발해 북안에서 건국하고 성장한 백제는 서쪽 요서지역은 물론이고, 남쪽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서해안

         내륙과 도서들을 장악하였을 것이라 여겨지며, 나아가 탐라, 왜 지역으로도 진출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이였기에 발해 북안 내륙에서 고구려에 쫒기면서도 별 어려움 없이 천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진출한 요동과 한반도에는 전 세력인 진, 진한의 영역이였고, 벌해 북안의 부여계통이라고

         자부하는 왕족들과는 계보가 다르다는 표현인 `진조인`이라는 글귀가 묘지석에 새겨진 것 같습니다.

 

4. 요사 지리지 기록의 韓과 관련하여

      

백제가 멸망하고도 한참을 지나서 또 이상한 기록이 보입니다.  

거란족의 나라인 요국의 역사인 요사 지리지 중경도에는 중경도 대정부의 속주인 고주에 1 개의 현을 설치하였는데 

               당나라 신주의 땅이고 만세통천 원년에 거란 실활부로 (신주를) 삼았다. 개태중에 성종이 고려를

               정벌하고 포로를 고주의 백성으로 삼았다. 평정산, 난하가 있고 중경에 속하게 하였다.

               1 개현을 통할하는데 三韓縣이다. 진한을 부여로, 변한을 신라로,마한을 고려로??? 삼았다.

               개태중에 성종이 고려를 정벌하고 삼국의 유민을 데려다 현을 설치했다.

               호수는 5 천이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요국의 중경은 옛 한나라의 우북평군의 동쪽과 요서군 지역입니다.

즉 우북평군의 속현이였던 무종,토은,서무,창성현과 요서군의 신안평,유성,빈종,교려,용산,도하,임유,무려,

해양,양락,루현이 있었던 지역이랍니다. .

기록 중에는 난하가 흐른다고 하고 고죽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사 지리지 중경 대정부의 기록입니다.

 

저곳에 삼한현이 왜 설치가 되었겠습니까? 언제쩍 삼한입니까?

조대기의 한성이 고하와 포구수가 함쳐져 남류하여 밀운수고를 지나 발해를 향해 남류하는 중간 지점의

동쪽이 옥전이며 이 부근일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고주의 삼한현 역시 이 부근인 것 같습니다.

 

요 성종이 한반도 고려 내륙에서 고려인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이라구요?

저들이 무엇때문에 그리 하겠습니까?

발해 북안 어느 구석에 옛 마한,진한,변한의 후예임을 고수하는 한 백성들이 남아있다가 포로로 잡힌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까?

꼭 한반도 내 고려 백성들을 끌고 간 것이라고 보아야 속이 시원합니까?

 

한가지 궁금한 것은 대정부의 직할 9 현 중 첫번째인 대정현의 설명에 `白口故地`라 기록되어 있는데

`口`의 원글자가 무엇인지 또 왜 이 글짜만 괄호표시하였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저는 이 숨겨진 글자가 `濟`자인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5. 기타 기록

 

또 관련되는 사서기록이 송사에도 있습니다.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들인데 요나라에 망하니 그 족장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서쪽 변두리에 나라를 세우고 정안국이라 하였다.

 

이 기록은 이맥의 대진국 본기에도 기록된 것으로 추가된 기록을 보면

         개보 3 년(970) 왕 열만화는 입공하는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 때 그 왕 오현명은 다시 여진을 통해 표문을 올렸는데 그 글에서

         `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고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 한쪽 구석을 보존 운운...`

         태종은 답장에서 ` 경은 마한의 땅을 모두 남김없이 보존하고...`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한이 강단의 주장처럼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에서 서부에 있었다면

저러한 기록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 맺음말 >

 

백제와 마한은 그 영역이 공교로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역이 거의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또 신라 역시 진한의 영역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마한과 진한을 대상으로 기록한 사서의 시선은 한반도 중부 이남이 아닌 발해 북안 내륙이며,

북쪽은 조선과 그 후예국들이였고 남쪽인 해안가와 동쪽의 요동반도와 한반도는 마한과 마한에 예속된 진한,

그리고 변진의 영역이라고 중국의 정사들이 진저리치도록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김공의 삼국사기로 인하여 우리들은 한을 버릴 수 밖에 없었지만

지나의 사서들은 고맙게도 편린이나마 기록해 주었기 때문에 백제,신라,고구려의 전신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최치원이 말한 고구려는 마한이고 신라는 진한이며 백제는 변한이라는 말은 근거가 있는 말이며,크게 틀리지는 않았지만 불충분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노력한다면 정확한 사실을 알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최초의 한국인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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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經 大雅 湯之즙 韓奕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출처 : 역사 독립
글쓴이 : 백랑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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