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문화비평] 한국 당랑권의 고향, 부산 화교마을

2009. 12. 15. 08:46기천국자랑태권도국술합기도검도우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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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0일, 부산 화교중학교의 모습. '부산화교 경축 중화민국 98년 쌍십 국경대회'라는 현수막과 더불어 대만 국기들이 매달려 있다. 사진=이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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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한국 당랑권의 고향, 부산 화교마을
/ 이지훈 철학박사

지난 10월 10일, 초량 화교학교에는 쌍십절 기념식이 열렸다. 쌍십절은 신해혁명(1911년)을 기리는 날로서 대만의 건국기념일이다. 해마다 이날이면 세계 곳곳의 화교들이 행사를 벌인다. 전 세계 화교들 가운데는 복건(福建·푸젠) 출신이 가장 많다지만 한국 화교는 대개 산동(山東·산둥) 출신이다. 복건 사람들이 대만과 동남아로 건너간 데 비해 산동 사람들은 한반도로 넘어온 것이다.

산동과 한국의 문화 교류는 반만년이 넘는다. 원래 산동에는 한족(漢族)과 더불어 동이(東夷)족이 많이 살았다. 장보고가 산동을 거점으로 삼은 근거도 거기에 있다. 산동은 공자, 묵자, 손자의 고향이며, 오행 이론과 도교가 태어난 곳이다. 이처럼 문화가 꽃핀 이유는 해상무역의 중심이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무역은 여러 문화를 융합하는 가마솥이니까. 부산문화와 통하는 점이 많다.

연태(烟台·옌타이)의 서쪽 항구 봉래(蓬萊·펑라이). 지금은 인구 11만명 남짓하지만, 송나라 때까지 중심도시였다. 한국 사신들도 봉래를 거쳐 장안으로 들어갔다. 봉래의 앞바다는 발해다. 중국 도교에서는 발해 너머에 신선이 산다고 했으니, 저 팔선(八仙)들이 바다 건너 선계로 떠난 곳은 봉래였던 것이다. 영도 봉래산, 신선동, 청학동이 이런 도교문화와 연관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또 '산동 사나이(山東大漢)'란 말이 있다. '수호전'의 양산박이 그렇듯이 영웅호걸이 많고 무술이 성했다. 청나라 말 '의화단'도 산동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매화장'이란 무술을 익혔는데 최근까지 북경(北京·베이징)시 경찰의 공식무술이었다. 그리고 사마귀 권법이 있다. 중국무술을 전혀 몰라도 당랑권은 들어봤을 것이다. 당랑권의 고향은 산동이며 한국 당랑권의 고향은 부산이다.

해방 이후 산동 출신의 임풍장(林品璋)과 강경방(姜庚芳)이 각각 춘천과 초량에서 당랑권을 가르쳤다. 그런데 임풍장은 한국인을 가르친 적이 없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 전국에서 당랑권을 배우러 초량을 찾아왔으니, 초량이 한국 당랑권의 고향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강경방 선생의 고향은 연태다. 내가 처음 만난 화교는 그분이었으며, 처음 배운 중국어는 '사부님 안녕하세요(師父晩)'였다. 초등학교 때 2년 동안 당랑권을 배우러 갔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가끔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화교마을이 러시아마을로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선생의 딸이 대만에서 대학을 마치고 거기서 교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량 화교마을은 국제도시 부산의 보배이며, 한국 당랑권은 그런 국제교류의 산물이다. 몇 해 동안 차이나타운 축제를 보았지만, 초량화교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알린 당랑권 콘텐츠가 부각되지 않는 게 아쉬웠다. 몸짓은 문화의 근본이다. 부산화교에 초점을 맞춘다면 산동, 부산, 대만의 교류를 생각해야 하며, 이들 간의 문화교류를 생각한다면 다시 몸짓에서 출발하는 게 좋겠다.

영도와 봉래, 부산과 산동과 대만의 젊은이들이 함께 당랑권을 익히고, 범어사 선무도와 동래학춤을 익히는 건 어떨까? 그러면서 청년들이 더불어 씩씩한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다.

부산일보 | 26면 | 입력시간: 2009-10-13 [09:10:00]

출처 : Marie의 문화세상(부산)
글쓴이 : Mari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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