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태권도 교류 확대와 태권도 철학의 발전 방향

2009. 12. 3. 08:59기천국자랑태권도국술합기도검도우슈

     

 

 

<1. 태권도 교류 확대와 태권도 철학의 발전 방향>


이창후(2003), “태권도 교류 확대와 태권도 철학의 발전 방향”, 제5차 태권도 세계화 포럼


1. 서론


태권도의 발전은 세계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권도의 발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모든 태권도인의 소망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발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은 세계적인 태권도 교류의 확대와 이를 위한 다양한 토대의 마련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상황에서 태권도 교류의 확대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 꼭 필요한 토대란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이 태권도 정신의 정립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위해서는 태권도 철학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이 글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2. 태권도 교류의 확대와 표준의 필요성


다른 모든 문화의 발전에서와 마찬가지로 태권도의 발전에는 명암이 교차하고 있다. 태권도는 단일한 하나의 조직체계 속에서 통합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현재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더라도 세계 태권도는 그 조직과 체계, 그리고 문화에 따라서 WTF, ITF, ATA, 준리 태권도 등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밖에도 미국과 유럽 현지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군소 태권도 조직들이 다수 있다. 이러한 분화와 그에 따른 다양화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으며 태권도의 발전을 위해서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조직의 통합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태권도 조직과 그에 따른 태권도 문화의 분화는 태권도의 발전에 따른 필요불가결한 과정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통합에는 다양한 어려움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현실적인 발전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먼저 첫 번째 항목부터 논의하자. 태권도 조직과 문화의 분화가 태권도 발전의 필요불가결한 과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우리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비판을 피할 수 있다. 어느 조직, 어느 문화든지 그것이 성공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다양한 분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 다양화로 인해서 그것은 더 많은 요구를 수용할 수 있고 또 서로 경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쟁은 다시 추가적인 발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분화와 경쟁을 거치지 않으면 그 조직과 문화는 내적으로 침체되고 부패하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분화와 다양화는 곧 성공의 징표이기도 하다. 왜 조직과 체계가 분열되는가? 성공에 따라서 조직과 체계가 국제적 규모로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이에 따라 다양한 유형․무형의 이익들이 생기기 때문에 그 이익을 확대하고 경쟁하기 위해서 분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문제가 생겨난다. 즉 이렇게 분열된 조직과 문화를 통합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즉 각 조직이 가진 장단점이 서로 다르므로 통합을 통해서 잃는 것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 당위론적인 어려움이고 한편으로는 각 자가 가진 기득권의 이해득실을 각자의 입장에서 저울질하게 되므로 통합은 어려워진다는 것이 현실적인 어려움이다. 그렇다고 분열과 다양화가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없다. 우선 태권도는 그것이 세계 어디에서 어떻게 수련되든 태권도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가치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절한 통합을 통해서 규모의 효율성을 성취하고 이를 계기로 다음 단계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필요성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문제 해결의 방안을 마련하는 기준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장점을 확대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은 상호 태권도 교류를 확대하고 그와 함께 교류를 위한 태권도의 표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세계 태권도 조직이 통합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겠다. 흔히 논의되는 바와 같이 WTF와 ITF의 통합과 같은 일원화된 통합에 필자는 적극 찬성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렵다면 차선책이라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필자의 논의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차선책에는 지나친 분열과 다양화를 막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된다. 이를 위해서 교류의 확대와 표준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먼저 교류의 확대를 생각해 보자. 태권도 교류의 확대는 태권도가 세계화된 스포츠이자 무예로서 갖는 장점을 활용하는 성과이면서도 동시에 태권도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교류는 현실적으로도 이미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규모의 태권도 대회가 개최되는 것도 한 예이고, 태권도 한마당과 같은 행사가 국제적인 행사로 발돋움하는 것도 한 예이다. 물론 현재 활성화된 교류는 각 태권도 조직 내적인 교류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교류가 갖는 의미는, 그러한 교류로 인해서 태권도 문화와 표준이 공유되고 지속적인 통합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한편 현재로서는 WTF와 ITF 간의 교류와 같은 서로 다른 체계 간의 교류가 많지 않은 편인데 이러한 태권도 체계 간의 교류가 필요한 까닭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동일한 태권도 문화로서의 공통점을 확대하고 발전시키며, 나아가서 발전적인 통합의 토대를 교류 확대를 통해서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태권도에 대한 표준(예를 들어 품새나 경기의 규칙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두 번째 사항, 즉 태권도 표준의 마련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성을 느낀다. 표준을 마련하는 것은 태권도 교류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이것은 WTF나 ITF 체계 내의 교류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체계 내적인 교류를 위한 표준은 그 체계 내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단지 현재의 상태에 만족한다면 문제거리가 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WTF나 ITF도 끊임없이 발전을 추구한다면 발전적인 표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고, 그런 점에서 수정하고 발전시켜야 할 문제거리는 잠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서 표준을 마련할 필요성에 공감한다면 우리는 그 내용과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3. 태권도 정신의 정립


태권도 표준이란 곧 태권도 문화의 표준이다. 단지 태권도 경기 규칙에 대한 표준만을 마련한다면 그것은 현재의 교류를 위한 것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러한 단기적인 안목에서의 표준이란 광범위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고 결국 상황이 변하면 그 때에도 표준으로서의 통합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기 규칙에 대한 표준 자체도 그 바탕에 깔려있는 태권도 문화나 정신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장기적이고 발전적인 교류와 적절한 정체성 확립, 이를 통한 통합을 위해서는 태권도 정신에 대한 표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즉 태권도 정신의 정립이 태권도의 교류를 촉진하고 광범위한 태권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인 것이다.

하지만 태권도 정신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태권도 정신을 정립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태권도의 인물들이 보여준 모범적인 행적을 통해서 태권도의 정신을 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에는 문제가 많다. 이것은 개인의 생각이나 사상을 태권도 정신으로 정립하는 것인데, 이 개인의 사상이나 생각이 얼마만큼 일반성을 갖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또 그것이 시대적인 요구에도 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개인의 사상이나 생각은 태권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경험이나 학문에 의해서 유발된 것일 수도 있어서, 태권도의 정체성과 밀접한 연관성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최홍희가 마련한 태권도의 5가지 덕목 같은 것은 오늘날 별로 많이 강조되지 않는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다 좋은 말들이 있지만 거기에서 태권도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태권도 정신을 정립해야 할 때 우리는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네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태권도 정신의 정립은 세계적인 보편성을 그 안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권도 정신의 정립은 태권도 발전을 담보로 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거나 신중한 고려 없이 도덕적 덕목들을 나열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의 특수성이나 특정 집단, 혹은 특정 문화의 특수성에 함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둘째, 태권도 정신의 정립은 한국적 문화의 장점을 살린 내용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내용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태권도 정체성은 곧 한국의 고유 무예라는 점을 배제하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은 서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과 특수라는 일반화된 기준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 미술도 그 이상형은 미술의 일반적 가치를 가지면서도 한국적인 가치를 확보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처럼, 태권도 역시 세계문화로서의 일반성을 갖추면서도 동시에 한국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기준으로 나누어서 제시한 것뿐이다.

셋째, 태권도 정신의 정립은 지나치게 많은 내용으로 구성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많은 항목으로 된 태권도 정신의 내용은 수련자들이 실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그러한 지나치게 많은 항목의 체계는 공리공론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또 다른 경우는 경험에 밀착되지 않은 개념적 미화로 태권도의 정신을 정립하려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 올바른 것이 될 수 없다. 태권도 정신이란 수련자들이 태권도 수련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지향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단순해야 한다.

넷째, 태권도 정신의 정립은 태권도 수련과 일치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태권도 수련 속에서 태권도가 지향하는 바, 곧 태권도 정신이 발견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태권도 정신이 아니라 태권도를 다른 정신 교육에 활용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태권도가 다른 인간 교육을 위해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태권도 정신이 정립될 수 있다고 믿는 한 그러한 가능성 이상의 것, 즉 태권도 안에 내재된 본질적인 정신적 이념을 정립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준들을 만족시키면서 태권도 정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바탕은 태권도 철학의 연구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방식으로 태권도 정신을 정립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 방법 중의 하나는 예를 들어 보이는 것이다. 필자는 『태권도의 삼재강유론』에서 제시된 내용을 바탕으로 태권도 정신을 정립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태권도 정신을 연구해 보았다. 이것을 예로 들어 보겠다.

그 결론은 본 책자의 내용을 하나의 도식으로 정리하는 ‘삼재강유도’(三才剛柔圖)1)의 도식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구분

태권도의 내용

태권도 정신의 내용

무극

일기예

삶의 안쪽으로의 초월

삼재

하늘

사람

경(敬)

절제

중용

성실

바름

수신

기법

강(剛)

유(柔)

의(義)

예(禮)

이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 보면, 태권도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삶의 안쪽으로의 초월”로 규정되고 이 과정에서 태권도인은 태권도를 수련하게 된다. 이 수련의 안쪽에서, 즉 수련자의 내면에서는 경(敬)의 정신으로 자신을 절제하고 이로 인하여 중용(中庸)을 지향한다. 이러한 수련은 그 외면에서는 곧 성실한 마음으로 바른 것을 추구하여 수신, 즉 자신을 갈고 닦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태권도인의 마음은 옳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정의감(義)을 일으켜 이와 맞서 싸우며 한편으로는 예법(禮)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여 세상과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義)와 예(禮)의 마음을 조합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자. 먼저 이렇게 정립된 태권도의 정신은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즉 이러한 정신적 덕목들은 동양철학 일반에서 흔히들 강조하는 것이며, 또한 그 동양철학의 덕목들을 세계 사람들이 그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는 까닭에 이러한 내용이 보편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두 번째 조건인 특수성 또한 삼재강유도에 따른 언급된 태권도 정신의 체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련의 마음 안쪽에서 강조되는 경(敬) 사상은 퇴계 철학의 핵심이며 성실로 강조되는 성(誠) 사상은 율곡 철학의 핵심이다.2) 그리고 이러한 경(敬)과 성(誠)의 사상이 삼재의 틀에 따라서 태권도의 수련에 적용된다. 삼재 사상은 전통적인 한국의 고유 사상이므로 이 전체는 한국 문화의 특수성을 잘 반영한다고 하겠다.

앞에서 언급한 세 번째 조건은 태권도의 정신이 지나치게 많은 덕목으로 구성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된 덕목들은 그 숫자가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넷이다. 그것은 ‘삶의 안쪽으로의 초월’과 ‘의’(義), ‘예’(禮), 그리고 경(敬)이자 곧 성(誠)이다. 삼재에 해당하는 경(敬)과 성(誠)의 내용들은 의(義)와 예(禮)로써 삶의 안쪽으로의 초월을 성취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토대가 된다. 즉 의(義)와 예(禮)로서 삶의 안쪽으로 초월할 수 있기 위해서는 태권도의 수련이 요구되는데 이 수련의 핵심 덕목이 곧 경(敬)과 성(誠)의 내용들이다. 실제로 이 양자는 안과 밖을 이루는 하나로서, 같은 것의 서로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말은 다르지만 그 덕목은 늘어나지 않는다.3)

네 번째 조건은 태권도 정신이 태권도 수련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권도의 수련은 그 기법의 수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기법의 틀은 삼재와 강유의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도식에 따라서 경성(敬誠)과 의(義) 및 예(禮)를 삼재와 강유의 위치에 배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역할 또한 같다. 즉 강(剛)이란 굳셈이요 그 특성이 거스르는 것이니 의로운 마음으로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과 그 특징이 같고, 유(柔)란 부드러움이요 그 특성이 따르는 것이니 예법에 따라서 세상에 거스르지 않는 것과 그 특징이 같다.

이상의 논의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장 이와 같은 삼재강유도의 도식에 따른 태권도 정신의 체계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상의 내용은 필자가 오래 동안 태권도인들의 수련 내용을 연구하고 정리한 결과에서 나온 『태권도의 철학적 원리』와 『태권도의 삼재강유론』의 내용을 토대로 제시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발상만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비판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삼재강유도의 도식에 따른 태권도 정신의 구조는 하나의 시론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시론을 통해서 우리는 적어도, 필자가 앞에서 제시한 ①보편성과 ②특수성, ③단순성과 ④태권도 수련과의 일치라는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태권도 정신의 정립이 불가능하지 않음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그러한 작업이 곧 태권도 철학 연구에 기초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구에 비추어 볼 때 태권도 철학 연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이제 그 현황을 짚어보고 태권도 철학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 논의해 보도록 하자.



4. 현재의 태권도 철학 연구 방식


태권도 철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태권도 철학에 대한 연구 실적은 그러한 요구에 부응할 만큼 충분하지도 않고 그나마 제시된 내용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서 오히려 태권도 철학이기 이전에, 철학적인 주제에 대한 연구로서 결격 사유가 많은 내용의 논문이나 서적들도 제공되고 있어서 비전공자의 혼란까지 유발할 수 있는 문제점으로 심각해지고 있다. 현재 태권도 철학의 연구 방식에 있는 문제점들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태권도 철학 연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한 책에서 이러한 문제를 비판했는데4), 한국에서의 태권도 철학 연구의 특징은 연구자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철학적 개념들로 태권도를 미화하고 포장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고 본다.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이경명의 연구5)나 안용규의 연구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한 철학”을 논의하면서도 ‘한 철학’을 제안한 김상일 박사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7) 혹은 태권도 도복의 철학적 상징성을 논하면서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혹은 3이나 9와 같은 숫자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여 태권도에 적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이란 이러한 의무 부여의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철학자들의 견해이다. 오히려 이러한 과대포장되고 근거없는 개념들을 분석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철학적 작업의 중요한 부분이다.8) 이러한 문제가 남발되고 있는 것은 태권도 철학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 하면서도 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둘째, 현재의 태권도 철학 연구는 한국의 전통철학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 있지 않다. 태권도 철학이란 유불선을 포괄하는 한국의 전통 철학에 근거한 것이라고 국기원의 기본 입장에서 표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알맹이 있는 연구는 별로 없는 실정이다. 혹은 이와 무관하게 한국의 전통철학 중에서 이퇴계나 이율곡, 혹은 정다산의 철학에서 태권도 철학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한다면 그것은 국기원의 입장과 다소 상이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의 전통철학에 근거해서 태권도 철학을 연구하려는 시도로서는 크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태권도 철학 연구자들이 대학 교수임을 감안할 때 대학 내의 학제간 공동 연구를 통해서 시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크게 어려운 시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의 흔적도 거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실정이다. 오히려 아직까지도 실적을 올리기 위한 논문들에서 “태권도란 무도인가 스포츠인가”와 같은 문제만을 따지고 있을 뿐이다.9)

셋째, 그 간에 나온 태권도 철학 연구에도 논리적 비약과 근거없는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경명의 태권도 철학 연구에서 흔히 발견되는 문제인데, 맹목적인 개념의 확대 적용으로 인해서 태권도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10) 때로는 칸트 철학을 적용하고 때로는 변증법을 적용하는데, 이러한 내용들도 칸트 철학이나 변증법에 대한 오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넷째, 태권도 철학에 대한 현행 연구에는 철학적 체계가 미약한 경우가 많다. 즉 너무 지엽적인 문제들만을 언급하거나 혹은 공허한 개념들을 언급한다. 혹은 중요한 개념들을 언급하고는 그에 알맞는 결론은 부족하다. 예를 들어서 양진방이 언급한 강유론의 경우에, 강유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설들을 분류하고는 결국 맨 마지막에 초보자들이 근육을 경직시키는 문제로 끝을 맺고 있다.11) 무예 일반에서 강유가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은 설득력 있는데, 그에 적당한 핵심 주장은 없는 것이다.



7. 맺음말


이상에서 태권도 교류 확대와 이를 통한 태권도 발전을 위한 문제점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태권도 철학의 문제점에까지 언급하였다. 이를 정리하자면, 태권도 교류의 확대와 태권도 발전을 위해서는 태권도 정신의 정립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다시 태권도 철학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언급된 태권도 철학 연구의 현행 문제점은 심각한 것이지만, 그 자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을 만큼 연구다운 연구들이 있다는 것은 훌륭한 점이다. 비교를 하자면 합기도나 택견과 같은 무예들에는 이러한 문제점을 분석해낼 연구조차도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양적인 수준에서 태권도 철학이 앞서 있다는 점에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태권도가 세계화된 한국의 문화로서 세계인이 같이 즐기는 무예 스포츠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태권도 철학에 대한 접근도 그와 같은 세계인이 같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시도해야 한다. 국내에서 몇몇 학자들이 개인의 연구실적을 올리기 위해 스스로도 잘 설명이 되지 않는 불명확하면서도 겉만 번드르르한 글을 쓰고 다른 사람들은 역시 난해하다는 이유로 이를 외면하는 사태가 반복되면 안된다. 비판도 있어야 하고 그 비판을 통해서 태권도 철학 연구의 수준을 세계인의 관점에서 설득력있게 향상시켜야 한다.

태권도는 세계화된 무예 스포츠이지만, 이에 대한 적절한 학문적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 때의 유행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하나의 옷차림 유행이 지나고 나서 그 유행이 단순한 유행 이상이 다른 어떤 의미도 남기지 못하는 것처럼 태권도 역시 그럴 수 있는 것이다. 태권도에 대한 학문적 뒷받침을 하여 태권도의 문화적 가치를 심화시키고 대중적인 인기가 시든 후에도 세계 여러 대학의 연구기관에서 지속적으로 연구되도록 하기 위한 과제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것은 태권도 정신의 정립과 더불어서 그것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철학적 연구의 질을 높여 나가야 한다는 과제이다.



<참고 문헌>

김상일(1988), 『한 철학』, 전망사.

배영상 외(2003), 『오늘에 다시 보는 태권도』, 이문 출판사

안용규(1998), “태권도 정신에 관한 연구”(대한 태권도 협회 연구개발 특별 위원회 연구 보고서)

안용규(1999), “태권도 도복의 의미 고찰”(태권도 역사․철학․정신의 가치 창출을 위한 세미나 발표문)

이경명(2002), 『태권도의 바른 이해』, 상아기획

이창후(2000), 『태권도의 철학적 원리』, 지성사.

이창후(2003), 『태권도 현대사와 새로운 논쟁들』, 상아기획,

이창후(2003), 『태권도의 삼재강유론』, 상아기획,


1) 이창후(2003), 『태권도의 삼재강유론』, 상아기획, 85쪽.

일기예: 일기예는 태권도 수련의 궁극적 목표이다. 일기예의 원리, 혹은 형식화된 모습을 가리켜 “<태권도>”라 한다.

삼재: 삼재는 일기예의 분별된 모습들이다. 삼재는 강유의 기법들을 성공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하는 토대이다.

강유: 강유는 태권도 기법의 두 가지 다른 모습, 혹은 두 가지 분별된 원리이다. 강유를 알아야 태권도의 기법으로 어떻게 강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기법: 기법은 처음에 수련자들이 실질적으로 추구하는 바이다. 기법을 얻지 못하면 <태권도>는 태권도일 수 없다. 각각의 기법은 강유의 조합으로 이루어 진다.

<삼재강유도>


2) 물론 필자의 『태권도의 삼재강유론』에 근거한 ‘경’(敬)과 ‘성’(誠)의 개념이 퇴계 철학의 ‘경’과 율곡 철학의 ‘성’과 정확히 일치하는지, 혹은 얼마만큼 유의미하게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와 정당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이 태권도 철학의 연구 초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주어진 시간과 그에 따른 성과에서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완벽한 정당화를 지금 당장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을 것이다.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3) 이와 같은 4가지 중심 덕목으로 이루어진 체계와 비교할 수 있는 한 반대 예를 찾아보면, 안용규(1998), “태권도 정신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 논문이 제시하는 태권도 정신의 체계에는 태권도 수련 행위의 중심이 되는 덕목으로만 최소한 9개가 제시된다. 곧 평화정신, 애국정신, 예의정신, 충효정신, 부동심, 호연지기, 극기정신, 정신집중, 준법정신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인격 완성을 위한 과정으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10개의 항목이 이 체계 안에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안용규의 연구가 이 까닭으로 인해서 가치 없는 것이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너무나 많은 덕목을 제시하여 현실에 적용하기에 어려움이 클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4) 이창후(2003), 『태권도 현대사와 새로운 논쟁들』, 상아기획, 148-159쪽.

5) 대표적인 예로서 이경명(2002), 『태권도의 바른 이해』(상아기획)을 들 수 있다.

6) 쉽게 접할 수 있는 예로, 안용규(1998), “태권도 정신에 관한 연구”(대한 태권도 협회 연구개발 특별 위원회 연구 보고서)와 “태권도 도복의 의미 고찰”(태권도 역사․철학․정신의 가치 창출을 위한 세미나 발표문)을 들 수 있다. “태권도 정신에 관한 연구”에서 안용규는 이경명이 적절한 고찰이나 비판 없이 연관시킨 한 철학의 불분명한 개념들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며, “태권도 도복의 의미 고찰”에서 안용규는 태권도복과 띠의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서 근거없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철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철학적인 주장을 하여 미사여구로 태권도를 장식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점은 냉정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7) ‘한 철학’을 제안한 김상일 박사의 주장에서 핵심적인 것은 원, 방, 각의 상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그 구분이 영원불변한 궁극적인 것임을 가정하는 사고방식, 즉 “시원적인” 사고방식과 대비되는 “비시원성”을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하고 이것을 한국 전통의 사고방식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연구들이 한철학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핵심적인 내용은 빠뜨리고 미신에 가까운 상징적 조형들만 인용하여 ‘한철학’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8) 물론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단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난해한 질문이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들 사고에 대한 비판적 탐구, 혹은 과학적 방법에 대한 비판, 혹은 궁극적인 것에 대한 반성 등의 형태로 주어지곤 한다. 그것은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구체적인 차원에서 다룰 수 없는 추상적이면서도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섬세하게 생각을 전개해 나가는 사고력의 산물이다. 다양한 관념들을 근거없이 관련시켜 보는 상상력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9) 여기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있는 점은, “태권도가 무도인가 스포츠인가”와 같은 주제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와 같은 질문만을 반복하면서 질적으로 발전된, 그리고 태권도 계에 던져진 다른 중요한 철학적 주제들로 연구가 확대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태권도가 무도이자 스포츠라는 공통의 결론을 내리는, 추가적인 내용이나 진척이 없는 주장을 하는 철학 논문들이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면서 양적으로만 확대 재생산되고 있음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10) 이에 대한 좀더 상세한 비판으로는 이창후(2003), 『태권도 현대사와 새로운 논쟁들』의 149-152쪽 참조.

11) 배영상 외(2003), 『오늘에 다시 보는 태권도』, 이문 출판사, 145-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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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파깨비의 태권도 연구
글쓴이 : 파깨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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