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장편 북서풍의 골짜기(제1부 제16편)

2009. 11. 26. 12:30봉사와 시,소설

범선소설-장편-북서풍의 골짜기(제1부)-월간 문학저널 11월호 연재-bumsun.kr

(이 소설은 전업작가의 작품활동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지명이나 인명은 팩트가 아닌, 픽션임을

밝혀 둡니다)     

 

장편소설

 

                               북서풍의 골짜기(제1부)

             

          제16편 원한(怨恨)의 다락산(多樂山)

 

 

                                                                                          김범선(한국소설가협회중앙위원) 

 

 

영철(영주철도청)관할 함백선은 철도 구간이 제천에서 최북단 오지인 구절역까지 이다. 영주 철도청에서 구절역으로 발령이 나면 역무원들은 귀양을 간다고 했다.

 

함백선은 제천에서 출발하여 영월, 증산, 정선, 나전, 여량을 거쳐 구절이 종착역이다. 제천역에서 밤 12시 10분에 발차하는 비둘기 열차는 밤새도록 달려 먼동이 트는 아침 8시에 첩첩산중 구절역에 도착하였다.

 

정선읍 여량리에서 구절역까지 선로는 군사정부 하에서 경제개발에 필요한 에너지 자원인 석탄을 운송을 하기 위하여 선로를 연장 한 철로이다.

 

현재의 행정구역명 정선군 여량면 구절리는 원래가 강원도 명주군 왕산면 구절리였다. 구절역은 원래가 석탄 운송을 위하여 개설하였으나 1974년2월 20일 여객열차가 다니는 보통역으로 개편하였다.

 

그 후 구절역은 1997년 간이역으로 개설하였으며 2004년 9월23일 여객취급을 중단하였다. 현재 이 철로는 아우라지역에서 구절역까지 레저용 레일 바이크로 사용하며 이젠 그 이름만 남아있다.

 

그러나 한 때 이곳은 검은 황금을 찾는 전국의 노다지꾼들과 투기꾼, 건달들이 모두 모여 들었던 곳이었다. 백두대간의 중심인 구절리에서 발원한 아우라지 강물은 경기도 양평에서 북한강과 만나 한강 본류를 이루는 중요한 강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 막 모여 든다‘

 

전국에서 구절에 모인 사람들은 정선아리랑처럼 사연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구절리에서 발원한 아우라지 강물은 노래 가사만큼이나 애절하고 슬픈 사연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담뱃불이야 반짝반짝 님오시나 했더니

저 몹쓸 놈의 반딧불이야 또 날 속이네

당신은 날 알기를 흑싸리 껍질로 알지만

나는야 당신 알기를 공상명월로 알아요.

 

그들은 구절에 모여 검은 황금을 두고 한바탕 광란의 잔치를 벌였다. 구절은 조국근대화의 과정에서 필수 에너지 자원인 석탄을 찾기 위한 격동기 사람들의 슬픈 한이 서린 곳이다. 그리고 무명의 광부들이 세운 슬픈 비망록의 광산촌이었다.

 

‘아우라지 강물이 소주약주 같으면

오고가는 사람이 모두 내 친구 일세‘

 

구절(九折)은 말 그대로 구절양장(九折羊腸)인 첩첩 산중으로 석탄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오직 철로만이 통행이 가능 했다. 차량 진입 차도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 순식간에 인간 탐욕의 극치인 탄광촌 마을로 변했다.

 

구절에는 원래 30여 호의 화전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산을 개간하여 옥수수, 매밀, 콩 농사를 지으면 살고 있었는데 검은 황금인 석탄이 발견되고 부터는 전국각지에서 광산업자들이 모여들었다.

광구소유자와 덕대광산 사장, 노동자, 광부, 술집 작부, 사기꾼, 건달, 음식점, 매춘부들이 때 거리로 모여 들어 순박한 화전민 촌을 순식간에 발칵 뒤집어 놓았다.

 

검은 황금을 찾기 위해 전국에서 투기 건달들이 모여들자 인구는 급속이 늘어났으며 다방, 여관, 여인숙, 하숙집, 술집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태워주게 태워주게 할마이 옷 좀 태워주게

저승 가서도 옷 갈아입게 옷 좀 태워 주게

오늘 갈지 내일 갈지 정수정망 없는데

세월가고 임마저 간다면 누굴 믿고 사나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나‘

 

그곳의 행정구역명은 정선군 북면 구절리였다. 구절은 그 흔한 면사무소나 지서도 없었다. 유일한 행정 기관으로는 구절역과 구절국민학교가 전부였다. 그래서 법이 없는 마을이었고 치안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광산에서 채광 중 갱도가 무너져 광부가 깔려 죽으면 그곳이 바로 무덤이 되었다. 맞아 죽어도 하소연 할 때가 없는 그런 곳이었다.

 

구절리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 다락산(1018m)과 상원산(1421m) 사이에 작은 신작로가 있다. 이 길은 원래가 평창군 대화면으로 넘어가는 산판 도로였다. 분탄으로 시커먼 개울물이 흐르는 구절교를 지나 하자개로 접어들면 그곳은 자개 골로 불렀다. 그리고 한때 자개 골에는 구절국민학교 소속인 상자개 분교가 있었다.

 

왕산광업은 다락산 우전탄전과 상원산 대한석공 나전광업 소 사이에 2,400만평의 석탄 광구를 가지고 있었다. 우전탄전의 명성광업은 동력자원부 산하 대한광진(대한광업진흥공사)의 시추자금으로 구절리 일대를 중심으로 오장산(734m)에 K2, K16, 다락산(1018m)에 K7, K14, K15에 지하 1,400에서1,700m까지 볼링을 하여 지하 탄층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오장산에는 본항, 1, 2, 3항을, 서진산에는 본항, 1,2,항을 개설하고 굴진하여 석탄을 채굴하였다.

 

 

많은 석탄이 매장된 다락산은 말 그대로 많을 다(多), 즐거울 락(樂)의 산이었다. 채탄된 석탄은 전부 5,000kal 이상의 고열량의 상등품이었다. 당시 포철은 고로용으로 4600kal 이상의 열량을 가진 석탄을 호주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국내산은 열량부족으로 수입품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절리에서 고품질의 석탄이 채굴되자 동력자원부는 나전에서 구절까지 철로를 연장하였다. 그리고 구절리 일대에 최상품의 검은 황금이 나오기 시작하자 국내산 석탄을 사용하였다.

 

1972년 제1차 연탄 파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연탄공장 사장들이 구절리 일대에 돈 가방을 싸들고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근대화 산업과정의 핵심은 에너지 자원의 확보였다. 동력자원부는 원유는 달러의 부족과 원거리 운송으로 한계가 있어 에너지 자원 확보가 가장 큰 난제였다. 그래서 화석자원 개발에 올인 하였다.

 

더구나 서민들의 난방과 산업 에너지가 목재에서 화석자원으로 전환이 되던 시기로 석탄은 검은 황금이었다. 화전민촌 구절에서 석탄이 채굴되자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니던 곳으로 순식간에 변했다.

 

황무성의 왕산광업(주)은 상자개 분교 위에 현장 사무소가 있었다. 상재분교에는 전화와 전기가 들어 와 있었다. 왕산광업 현장 사무소는 분교의 전화와 전기를 연결해 같이 쓰고 있었다.

 

그는 대한광진흥공사의 자금으로 우전탄전 중앙 본 항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다락산 해발 470m, S-1 지점에 지질 조사를 위한 볼링을 하였다. S-1 지점에서 151,5m 볼링 했을 때 폭 35m 고품질의 탄맥이 발견되었다. 탄맥은 분탄이 아닌 다락산 층의 개탄으로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 열량의 석탄이었다.

 

그곳에서 시추공이 213, 3m를 더 볼링 했을 때 폭 21m의 탄맥이 다시 발견 되었다. 그곳은 다락산 층 세일로 양질의 고칼로리의 탄맥이었다. 다락산 S-1 시추 점은 지하 800m에서 중단하였다. 그리고 황무성은 그곳을 왕산 3항으로 명명하였다.

 

황무성의 왕산광업(旺山鑛業)의 회사명은 원래가 구절리가 강원도 명주군 왕산면에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산광업(주)은 다락산 맞은편 상원산 해발 700m 지점에 S-2 시추공을 박았다. 그곳은 1,420m의 상원산 주봉 중 해발 700m 지점으로 215,5m를 시추 했을 때 484,5m에서 폭 30,0m 의 탄층을 발견 되었다. 그곳은 옥갑산 층으로 역시 양질의 탄층이 매장되어 있었다.

 

구절은 검은 황금을 찾기 위해 전국에서 이름난 건달들이 모두 모여든 곳이다. 대한광진에서 시추공을 박을 때마다 덕대 사장들이 광구 소유자로부터 하청을 받기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래서 폭력과 협박, 공갈이 난무하고 법이 없는 무법천지인 세상이 되었다.

 

석탄 1개 광구는 250핵타(약600만평)의 면적을 기준으로 한다. 광구에 볼링으로 원탄의 매장이 확인되면 덕대 사장들이 개미처럼 몰려들어 광주로부터 임차를 받기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검은 황금을 찾기 위해 삽과 곡괭이 몇 자루, 송목 동발, 발파 폭약으로 무조건 산을 굴진하기 시작했다. 자금력이 없는 영세한 덕대 사장들은 쌀 한 포대와 냄비 하나로 밥을 해 먹으며 산을 파고들어 갔다.

 

 그렇게 해서 원탄이 나오면 하루아침에 연탄업자들로부터 선급금을 받고 부자가 되었다. 채탄이 된 석탄은 바로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교환이 되었다. 수표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직 현금 다발로 거래가 되었다.

 

그러나 운이 없는 덕대 사장은 광부 3명과 아무리 굴진을 하여도 탄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양식은 떨어지고 체력은 바닥이 났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스스로 동발을 무너뜨려 자살을 했다. 아니면 광부들 몰래 야반도주를 하거나 그들에게 맞아 죽었다. 땅속 지하의 세계는 무법천지였다. 검은 황금에 미친 광산업자들은 죽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검은 황금만이 있었다.

 

구절리 다락산(1018m), 많을 다(多), 즐거울 락(樂) 뫼산(山)은 그런 산이었다. 인간 탐욕의 극치를 이루는 비극의 산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 이름이 기쁨과 즐거움이 많은 다락산으로 불리 우는지 신밀(神密)의 속삭임은 알 수가 없었다.

 

황무성은 상자개 분교 위에 다락산 왕산 3항에 갱도를 개설하고 채탄을 시작했다. 굴진 자금은 삼덕연탄에서 선급금으로 받아 운영 자금에는 문제가 없었다.

 

왕산 3항에서 채굴된 석탄은 5,100kal의 최상품 석탄이었다. 사북이나 고한처럼 분탄이 아니고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개탄이었다. 왕산 3항에서 원탄이 나오자 구절리는 발칵 뒤집어 졌다. 새로운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 어이 남 소장, 밤차로 서울 갔다가 올 거야. 안전사고 조심하라고,”

황무성이 밤차로 서울을 간다고 했다. 남규태 현장 소장은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했다.

“ 어이, 저 유리 창문이 왜 저래?”

“ 뭐가요?”“ 분교 유리창 말이야.”

“ 유리창이 왜요?”“ 금이 가 있잖아.”

“ 괜찮은 데요, 사장님.”

 

남규태 소장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장이 멀쩡한 분교 교실 유리 창문에 금이 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황 사장은 키 188, 몸무게 130kg나 나가는 거구의 사내였다. 그런 거구의 몸으로 산을 타는 데는 귀신처럼 빨랐다. 젊은 시절부터 산판에서 단련이 된 몸으로 힘이 장사였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어제도 현장 사무실에서 3항까지 400고지를 올라가는데 숨을 헐떡거리며 몹시 힘들어 했다.

“ 사장님, 서울 가시거든 병원에 한번 가보시죠.”

“ 알았네.”

 

“ 찡 좀 봅시다.”

“ 무슨 찡?”

“ 휴가증 있을 거 아뇨.”

“ 그저께 귀국했는데 찡이 어딧서.”

 

용산역 TMO에 근무하는 일등병 헌병이 황산우 병장에게 휴가증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황 병장이 휴가증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자 헌병은 소지품을 내 놓으라고 말했다. 새카만 일등병 새끼가 월남에서 이제 막 귀국한 병장에게 돈을 뜯을 생각이었다.

 

황 병장은 월남 현지에서 귀국한 병사들이 보낸 온 편지를 생각했다. 헌병들이 월남에서 귀국한 병사들을 봉으로 알고 덤빈다고 했다.

“ 소지품 좀 내 노시죠? “

“ 알았어.”

 

황산우 병장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신탄진 담배와 지포 라이터를 꺼내놓았다. 일병이 지포 라이터를 들고 만지작거리며 탐을 내는 눈치였다. 그냥 줘 버려. 자식 행동이 괘심하잖아.

“ 더 없습니까?”

“ 이거뿐인데.”

 

그는 짹 나이프를 꺼내

“ 척!”

하면 칼날을 열었다. 그리고 칼끝을 일병의 턱에 대며

“ 이걸로 콩 두 명을 죽였지, 한 명은 귀만 잘랐어. 너, 귀 참 잘 생겼다. “

하며 헌병의 귀를 잡았다.

헌병이 질겁하며

“단결”

하고 인사를 했다.

 

“좋았어, 맹호! 야 일병, 털보여인숙이 어디냐?”

“ 절 따라 오시죠?”그는 용산역 앞에 있는 매음굴로 그를 안내했다. 지린내가 코를 찌르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서 걸어갔다.

“ 아저씨, 놀다가.”

전봇대 뒤에서 젊은 아가씨가 옷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 춘자야, 이분은 손님 아이다.”

헌병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헌병과는 잘 아는 사이 같았다.

“ 월남 갔다 온 깜둥이네, 고자야?”

“ 까불지 마 이년아!”

“ 밤에 올래?”

“ 알았어, 여깁니다! 병장님.”

헌병이 황산우 병장에게 골목 안 여인숙을 가리키며 말했다.

 

“ 수고 했네, 이거 받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지포 라이터를 헌병에게 훌쩍 던져 버렸다.

“ 고맙슴다, 단결!”

헌병이 떠나자 황산우 병장은 털보 여인숙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작은 판자 쪽문 안으로 닭장 같은 방들이 꽉 차 있었다.

 

지난주 그는, 군대 수송선 가이거호(14,000톤)를 타고 귀국을 하였다. 고국을 떠나 월남에서 1년 6개월 만에 귀국을 했다. 부산 제 4부두에는 어머니 홍연희와 누이 원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혹시 아버지가 나왔나 살펴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부산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안동으로 향했다. 열차 창밖에는 낯익은 경치가 보였다. 철로변의 초가집에서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나직이 피어오르고 모깃불을 피운 마당에는 벌거벗은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황산우, 그가 밤마다 잠이 들기 전에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모습이었다. 이제 그는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3년 전, 그는 입대하여 눈보라가 몹시 부는 겨울밤에 3군단 관할 38교 부근의 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싸리비로 비상도로의 눈을 치워야 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입대 후 얼마 안 된 이등병 시절이었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아버지가 면회를 왔다고 했다. 부대 행정반에서 아버지가 지금 38교를 건너오고 있으니 가보라고 말했다. 황산우 이병은 위병소를 나와 38교로 걸어갔다.

 

38교, 38선을 가로질러 미군 공병대가 만들었다는 목재가교, 부식을 막기 위해 방카C유에 절인 시커먼 목재로 만든 다리,

 

구만리에서 관대리를 잇는 길고 긴 38도선의 목재 가교에 도착하자 휑하니 넓은 구만리에서 강바람이 불때마다 두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이 추었다.

 

목재 가교 저 끝 관대리에서 한 점 작은 그림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대학 2학년 이후 한 번도 만나 본적이 없는 아버지, 입대 할 때 어딘 있는 지도 몰랐던 아버지. 그래서 인사조차도 못하고 입대해야만 했던 아버지가 3년 만에 아들을 찾아 전방까지 면회를 왔다.

 

황 일병은 너무 반가워 구만리에 가로 놓인 38교 다리를 뛰기 시작했다. 키가 다른 사람의 목하나 보다 더 큰 아버지가 검정색 모직 낙타 코드 자락을 바람에 펄럭이며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38교 중간에서 만나 얼싸안고 포옹을 했다. 아버지 품에서는 포마드 냄새가 나고 있었다.

 

“ 지낼 만 하나?”

“ 예.”

전시 상황도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은 3년 만에 38선에서 그렇게 만났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남에서 중국 음식을 시켜서 먹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신수가 훤하고 경기가 좋아 보였다. 아버지는 식사 후 바로 서울로 떠나갔다.

 

그렇게 아버지와 헤어진 아들은 낮선 나라 전쟁터를 떠돌다가 귀국을 했고 광산을 하는 아버지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영양으로 귀향한 산우는 곡강에서 2일간을 휴식을 취하며 보냈다. 그는 일주일 동안 귀국 휴가를 보낸 후 안동 36사단으로 가서 제대를 할 예정이었다.

 

귀향 후 이튿날 곡강으로 갔을 때, 그는 신발도 벗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척금대 물속에 뛰어 들었다. 주머니에 든 신탄진 담배도 꺼내지 않은 채 강물 속에 누워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처다 보았다.

그는 전쟁터에서 살아서 집으로 돌아 왔고 이젠 그렇게 좋아했던 척금대 강물 속에 있었다. 긴 항해 끝에 더디어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지난 3년 세월이 꿈만 같았다.

 

곡강(曲江)은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모양을 본 따서 ‘굽은 갱이, 곡강’ 이라고 불렀다. 지형이 바다위로 항해하는 모습(行舟形)을 하고 있어 마을에 우물을 파지 않고 강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우물을 파면 배 밑바닥이 뚫려 동네가 망한다는 지명 유래 때문이었다.

 

휴가 3일째 되던 날, 산우는 아버지를 찾아 나셨다. 서울 용산역 앞에 숙부가 살고 있는데 매일 낮 12시에 종로3가 파고다 공원에서 두 사람이 만난다고 했다. 아버지가 서울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안동역에서 무작정 서울로 가는 중앙선 열차를 탔다. 그리고 용산역 전 앞에 거주하고 있다는 막내 숙부 황무기를 찾아 나셨다.

“ 계세요, 아무도 안계세요.”

산우가 아무리 주인을 찾아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수돗가에 있는 양철 세수 대야를 군화발로 걷어 차 버렸다.

 

“꽝!”요란한 양철 대야 소리에 닭장 같은 방문이 모두 열리며 자다가 일어난 부수수한 모습의 여자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 대낮부터 벌써 지랄이야, 개새끼!”

잠옷 차림의 창녀가 신경질을 부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 사람 찾는데요?”

“ 열녀 났네, 아무데서나 하고 가, 군발아!”

창녀가 신경질을 부리며 말했다.

“ 여기 황무기 씨라고 없나요?”

“ 한강에서 바늘 찾아라, 재수 없는 군발이 새끼!”

 

여자들이 모두 방문을 모두 닫아 버렸다. 그중에 나이가 가장 어려 보이는 한 아가씨가

“ 그분 조금 더 있어야 와요, 조짜 방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하고 말했다.

 

 산우는 구석진 방문 앞 쪽마루에 앉아서 숙부를 기다렸다. 숙부님도 고달프구나. 태양임업 상무시절 에 그분은 부족한 게 없는 삶을 살았다. 목상 시절에도 한때는 경북 최고 부잣집의 막내아들로 뻐기며 살았다. 그런데 집안이 망하니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전깃불이 켜지자 숙부 황무기가 돌아왔다.

“ 산우 아니냐? 어서 들어가자, 크윽.”

숙부 황무기는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 이번 사업만 잘되면 말이야, 집안이 다시 일어 설 거야, 걱정하지 말라고, 크윽.”

 

“ 야 씹할 새끼야, 시끄러워 임마!”

갑자기 판자로 막아놓은 옆방에서 소리를 빽 질러댔다.

“ 옛날에 부자 아인놈 어딧냐? 좆같은 새끼!”

” 뭐야, 요놈아! 넌 애비도 없나? “

숙부님이 조카 앞에서 자존심이 상하는지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 이자슥이 죽을라고?”

깡패 같은 노동자 차림의 중년 남자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숙부의 멱살을 잡고 마당으로 끌고 나갔다.

“ 요런 못된 놈이!”

숙부는 몸부림을 치며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떻게 한다? 숙부님은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하는 일에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된다고 말했다. 산우는 난처해서 보고만 있었다.

 

“ 야, 옛날에 집에 금송아지 없는 놈 어딧냐?”하며 손이 올라갔다. 더 이상 불수만 없었다.

“ 그만해라.”

“ 이건 또 뭐야 임마!”

녀석의 주먹이 날아왔다. 산우는 돌아서 피하며 녀석의 팔을 비틀며 관절을 꺾었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로 녀석의 목울대를 찍었다. 이젠 힘만 주면 녀석의 목젖이 내려 않을 것이다.

 

“ 캑캑캑.”

“ 사과 할래, 죽을 래?”

녀석의 눈이 산우와 부딪쳤다. 순간 그는, 몸서리를 쳤다.

새까만 얼굴, 하얀 이, 그리고 표정이 없는 싸늘한 눈. 무릎을 꿀이며

“ 형님, 살려주이소.”

하고 빌었다.

“ 이 어른한테 사과해라, 아니면 죽는다.”

관절을 풀어 놓는 순간, 녀석은 숙부님 앞에 끓어 않아 잘못했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꾸 빌었다. 황무기가 깡패에게 한바탕 호통을 쳤다.

 

막내 숙부 황무기는 아직도 산우에게는 강자였다. 그는 좀처럼 꺾이지 않는 용기와 기백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사업에 실패하여 용산역 전 앞에서 빈곤하게 살고 있었지만 한때 형인 일월산 호랑이 밑에서 잔뼈가 굵은 그 기백만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황무기가 조카 산우에게 한 말은 이 한마디였다.

“ 수고 했다.”

 

이튿날 두 사람은 종로 3가 파고다 공원으로 갔다. 아버지는 12시 정각에 이곳에서 만난다고 했다.

11시 45분, 아직도 아버지 황무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낙엽이 지는 벤치에 앉았다. 11시 51분, 황산우는 3년 전, 구만리 38교에서 아버지와 만나던 날을 생각했다.

 

언제나 아버지는 여유가 있고 든든했다. 비록 5년 동안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아 가족들을 기다리게 했지만 그래도 그분은 당당했다.

 

산우는 3년 전, 38교에서 만났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아들은 그 동안 전쟁터를 누비며 살아서 돌아왔다. 도대체 우리 부자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 산우 왔냐?”

갑자기 등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뒤를 돌아보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여전히 검정색 모직코드에 정장 차림의 멋진 모습으로 빙 그래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 아부지요.”

산우가 일어서며 아버지를 불렀다. 그 한마디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전쟁터에서 밤마다 무척 보고 싶었고,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셋이서 공원 옆 식당에 들어가 곰탕을 먹었다. 아버지가 막내숙부에게 얼마간 돈을 주었다. 그리고 바쁘다면 순식간에 살아져 버렸다. 아버지와 아들은 3년 만에 만나 30분간 곰탕 한 그릇을 먹고 헤어졌다.

 

산우는 객지에서 고생 하시는 숙부에게 가진 돈 모두를 털어서 주었다. 청량리역에 들어갈 입장권 살 돈 40원만 남기고 모두 주었다. 산우는 청량리역에서 입장권만 사가지고 안동까지 타고 내려 올 생각이었다. 이미 낮선 나라에 서 수많은 사선과 역경을 거쳐 귀국한 그에게, 공짜로 열차 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청량리에서 밤차로 정선으로 내려온 왕산광업의 황 사장은 이튿날 아침 식사 후 현장 소장 남규태와 함께 다락산 본 항으로 올라갔다. 왕산광업의 다락산 본 항은 70m를 굴진하여 채탄을 하고 있었다. 본 항 외 1, 2항에서는 덕대 사장들이 굴진을 하고 있었다. 2항에서는 검은 세일 층이 끝이 나고 석탄이 나온다고 했다. 황 사장은 자기 눈으로 직접 2항의 검은 황금을 보고 싶었다.

 

황 사장이 다락산 520고지 2항으로 들어가자 덕대 권오복 사장이 달려 나왔다. 그는 몹시 흥분해서

“ 사장님, 탄층이 나왔어요, 바로 이겁니다.”

하며 검은 황금 덩어리를 내밀었다.

 

수십억 년 동안 다락산에 묻혀있던 태곳적 검은 노다지가 햇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황 사장은 개탄을 들고 햇빛에 비춰 보았다. 세로로 검정색 줄무늬가 선명한 석탄 덩어리,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원탄.

 

황무성 사장은 반짝 거리며 윤을 내는 석탄 덩어리를 햇빛에 비춰 보았다. 이걸 캐내기 우해 내가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던가?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5년 동안이나 내팽겨 치고 낮선 객지로 정신없이 헤매고 다녔던가?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키188, 몸무게 130kg의 거구의 사내가 다락산 520고지에서 슬며시 주저앉았다. 그는 원탄을 광진에 의뢰하여 열량을 측정해야 한다면 밤차로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구절리에서 낮 12시에 출발하는 열차로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자기 뇌에 미세출혈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다락산, 기쁨이 많은 산은 그에게 한 많은 산이 되었다.

 

‘태워주게 태워주게 할마이 옷 좀 태워주게

저승 가서도 옷 갈아입게 옷 좀 태워 주게‘

 

황용가의 셋째 아들이며 거구에 힘이 장사였던 황무성은 일월산 호랑이답게 강원도 정선군 구절리에서 그렇게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평소 그는 ‘십년이 걸려 초가삼간을 지었더니 방에 누워 천정을 올려다보니 지붕 사이로 별이 보이더라‘ 고 했다. 그는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낮에는 활동을 하고 밤에는 꿈을 꾼다. 꿈과 생시는 어떻게 구분을 할까? 손으로 꼬집어볼까? 집착이 너무 강하면 꿈과 현실을 혼동하게 되며 착각 속에 살게 된다. 그는 꿈을 착각이 아닌 현실로 만든 사람이었다.

 

“ 새댁, 더 놀다 저녁 먹고 가지.”

“ 마이 놀았어요, 형님.”

홍연희는 투방골에 살고 있는 맏동서 집에 다니러 왔다. 손위 맏동서는 세 사람이었다. 그 중 둘째 맏동서는 나이가 10살이나 어린 사람이었으나 깍듯이 손위 동서로 대접을 했다.

투방골은 ‘투방’이 있던 곳으로 읍내 사람들은 ‘투방꺼리, 라고 불렀다 이곳은 조선말에 영양현감이 봉화군 재산방면과 수비면, 청기면에서 읍내로 오가는 행인들의 편의를 위해 귀틀나무 집을 지어 숙박을 시킨 ’투방‘ 이 있던 곳으로 마방도 함께 있었다.

수비 동서는 투방골 입구, 지금의 31번 도로 우측에 흐르는 개울 건너 동산 밑에 살고 있었다.

홍연희가 수비동서 삽짝 문을 나서는데 큰길가에서 정우가 자전거를 탄 체 소리쳤다.

“ 어무이, 아부지가 많이 아프시데.”

“ 뭐라꼬?”

                                        (제16편 원한의 다락산-문학저널11월호)091021

 

                                 --김범선의 소설이야기-북서풍의 골짜기---  

 

출처 : 김범선의 소설이야기
글쓴이 : 범선소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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