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봉 기대승 , 그는 누구인가

2009. 7. 19. 21:50대한민국 가문 탐구

고봉 기대승 . 우리는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를 아는가? 우리의 기억 속에 그는 누구라고 각인되어 있는가?


우선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고등학교 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험문제에 나온 다고 하여 외운 사단칠정 四端七情 논쟁이다. 그 중심에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있었다.  퇴고(퇴계와 고봉)라고 하는 두 거유(유학의 거두)가 8년간 편지로 논쟁을 하였다.

사단이 무엇이고  칠정이 무엇인가. 이가 무엇이고 기가 무엇인지는 너무 어려워서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사단은 측은, 수오, 사양, 시비지심이 동하여 인의예지가 되고, 칠정은 희노애락애오욕의 일곱가지 마치 무지개빛깔처럼 사람의 심정을 말한다고 통째로 외웠다. (그런데 요즘은 칠정을 희로애락애구욕으로 말하기도 한단다.)


(퇴계와 고봉에 대한 이야기는 최인호가 쓴 유림 6권에서 대충 한번 본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이 소설로 인하여 고봉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 금년 들어 나는 그에 대한 문집 <고봉집>을 읽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는 통유 通儒 라고  말하고 싶다. 통유라. 이는 퇴계 이황이 선조 임금에게 그를 소개한 말이다.



퇴계가 벼슬을 사퇴할 적에, 선조 임금이  지금 학문을 한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고 묻자, 퇴계가 답하기를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도 기대승은 널리 알고 조예가 깊어 그와 같은 사람을 보기가 드무니, 이 사람은 통유(通儒)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는 그의 나이 30에 주자대전을 독파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퇴계도 고봉의 분석적이고 예리한 통찰력에  탄복하였으니

나이가 26살이나 어린 고봉을 학문적 동지로 대하였으니 그럴만도 한다.


또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 그는 소기묘이다. 소기묘라는 말은 그가 정치에 입문하여 5년이 되는 1563년에 받은 칭호이다. 이량의 당이 신진사림들을 제거하려 할 때 그는 조광조와 같은 기묘명현으로 간주되었고, 그는 신진 사림의 거두로 지목되었다.  이 일은 이량의 당이 귀양을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기대승은 승승장구 할 수 있었고, 선조 임금때는 경연에 참여하여 제왕학을 가르쳤다. 그 글들이 고봉 사후 선조임금의 어명으로 편찬된 <논사록>이다. 정치인들은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이제 그를 만나러 길을 간다. 이 기행은  그의 흔적을 찾아서 가는 길 떠나기이다. 기행은 역사 속에서 그를 만나고, 현장 속에서 다시 그를 만나는 여정이다. 나는 먼저 그가 태어난 곳 , 그가 살던 곳, 그리고 그가 공부한 곳, 그가 후학들을 가르치고자 한곳을 둘러보고 그가 묻혀 있는 곳과 월봉서원등을 두루 답사할 것이다.  이 여정은 여러 날이  될 것이다.     



     

 

월 봉 서원 -고봉 기대승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고봉 기대승 묘소. 월봉서원 뒤에 있다.  백우산 자락이다.  앞에 보이는 산이 구룡산.

 

 

 

출처 : 국화처럼 향기롭게
글쓴이 : 김세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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