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9. 20:57ㆍ대한민국 가문 탐구
[‘杜門不出’두문동 72賢을 찾아서③|인천 채씨와 다의당 채귀하] |
산속에 묻혀 절의 지킨 한평생 |
조선 개국 세력 피해 목단산 입산 … 후손들은 팔공산 자락에 정착, 인천군 채수 등 배출 |
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게 내 품 안에 잠자주오/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가오”라는 남녀가 주고받는 농탕한 상주 민요가 있다. 삼한시대에 축조된 그 공갈못이 상주시 공검면에 손바닥만큼 남아 있는데, 곧 복원될 것이라고 한다. 공갈못 근처에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글 번역 한문소설의 작가인 인천군(仁川君) 채수(蔡壽, 1449~1515)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다. 비신(碑身)을 받치고 있는 두툼한 해태상은 무척이나 이례적인데, 경상북도 문화재 제306호로 지정돼 있다. 채수가 이 동네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공갈못 때문이다. 함창현감이던 아버지를 따라와 살던 책방도령 시절에 공갈못을 구경하러 갔다가 담 너머에 살구를 따먹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살구나무 집 딸과 혼인하게 됐다. 훗날 성균관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지낸 채수는 중종반정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들어 4등공신이 되지만, 반정이 올바르지 않다고 여겨 처가 동네인 상주시 이안면 이안리에 은거하게 된다. 이안리는 공갈못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나오는 동네다. 채수, 한문소설 지었다가 파직되기도 채수는 이 동네 쾌재정(快哉亭)에서 한문소설 ‘설공찬전’을 지었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보다 40여년 뒤의 작품인데, 1996년에 한글 번역본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은 집필 당대에 한글 번역본까지 나돌았고, 조정에서 금서로 지목해 불사르기도 했다. 또 사헌부가 작가인 채수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중종이 파직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곡절까지 있었다. 채수가 머물던 이안리 쾌재정은 지금도 잘 보존돼 있다.
채수가 이곳에 은거한 뒤로 그 후손들이 상주, 문경, 예천, 청송, 영양까지 두루 퍼져 살게 되었다. 1913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고, 17년 영남 거부 장승원(張承遠,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을 조국 광복에 협조하지 않는다 하여 처단한 항일지사 채기중(蔡基中,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함)이나, 문경군수와 국회의장을 지낸 채문식(蔡汶植) 씨가 모두 채수의 후손이다. 인천 채씨가 인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경상북도에 많이 세거(世居)하게 된 것은 인천군 채수의 고조부인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 때문이다. 채귀하는 인천 채씨 시조의 10세손이자 중시조다. 인천 채씨 문중은 시조로부터 9대조까지의 묘는 실전(失傳)하고, 그들에 관한 기록도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기록은 채귀하로부터 다시 시작한다. 모든 인천 채씨는 채귀하로부터 비롯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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