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홍씨의 유래(洪氏由來)

2009. 7. 16. 15:17대한민국 가문 탐구

 

      홍씨의 유래(洪氏由來)

홍씨의 연원(淵源)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후손인 공공궁기(共工窮奇)가 있었는데, 그는 당시의 관명(官名)이었던 공공(共工)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뒷날 중국 돈황(敦煌)(감숙성의 서북부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의 공공(共工)씨의 후손이 물의 덕으로 원수를 피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공자(共字)에 삼수변(水字)을 붙여 처음으로 홍씨(洪氏)의 성(姓)이 생겼다고 하며, 우리나라 홍씨(洪氏)의 역사는 당(唐)나라 태종(太宗)때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가 고구려 영류왕(營留王)의 요청에 의해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하고 삼한 통합(三韓統合)에 따라 신라(新羅)에서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어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진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홍씨(洪氏)의 본관(本貫)은 문헌(文獻)에 111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홍씨(洪氏)는 남양(南陽).남양토홍(南陽土洪).풍산(豊山).홍주(洪州)등 4본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홍씨(洪氏) 중에서도 대본(大本)으로 알려진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홍은열(洪殷悅)을 시조(始祖)로 하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와 전혀 근원(根源)을 달리하는 고려 고종(高宗)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將)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始祖)로 하는 「남양 홍씨 토홍계(南陽洪氏 土洪系)」가있는데, 이 두 계통은 역사적으로도 구분되어 왔다.
전체 홍씨 인구중 남양 홍씨(南陽洪氏)가 8할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토홍 제외(土洪 除外)」
그외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고려 고종(高宗)때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역임한 홍지경(洪之慶)을 시조(始祖)로 하며, 역시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익찬공신(翊贊功臣)으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진 홍 규(洪規)는 홍주 홍씨(洪州洪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이러한 홍씨(洪氏)는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시켜 「십대벌열(十代伐閱)」로 손꼽혀 왔으며, 근대에 와서도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를 비롯한 실학자(實學者)와 각계(各界)의 선각자를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어가고 있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

선시조(先始祖) : 홍천하(洪天河) 당학사(唐學士)로 신라덕산촌주(新羅德山村主). 당성백(唐城伯)·태자태사(太子太師)·당성후(唐城侯). 시조 홍천하는 고구려 27대 왕인 영유왕때 중국 당나라에서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학과 문화를 혁신시켰다. 신라 27대왕인 선덕여왕때 유학의 발전에 공을세워 당성(남양)백에 봉해졌고 태자태사가 되었으며 본관을 당성으로 하였다.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지명이 바뀌어 본관을 남양으로 하고있다.
그리고 고려 개국공신며 삼중대광태사인 홍은열을 중시조로 1세 조상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홍은열은 원래 이름이 홍유(儒)이었는데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조가 '은(殷)나라 부열(傅說 : 중국 은나라 고종 때의 명재상)과 같다.'며 이름을 은열로 하사 했다고 한다.
회인 홍씨도 후에 합본하였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남양유생통문이라는 글을 보면 "신라오주가 학사공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화를 보급한지 50여년만에 정교는 성행하고 후학은 대통하였다. 김유신 임강수 설총 김총수 등이 선생의 후학들이며 공자묘를 창설하였다"고 하였으며, 목은 이색은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예악과 시서의 발전으로 많은 군자가 생겨나게 되었으니 가히 우리 나라의 공자라 할 수 있다"고 기록하였다.

선2세(先二世) : 문명(文命) 대서발한 당성후(大舒發翰 唐城侯). 우명(禹命). 순명(舜命)

선3세(先三世) : 흥하(興夏) 대각간 시호 문현(大角干 諡文顯).

선4세(先四世) : 척해(陟海) 대아찬 시호 문성(大阿餐 諡文成). 제해(濟海)

선5세(先五世) : 득영(得泳) 사찬 시호 문간(沙餐 諡文簡). 득함(得涵)

선6세(先六世) : 협리(協理) 대도독 시호 문충 추봉당은후(大都督 諡文忠 追封唐恩侯). 정업(定業)

선7세(先七世) : 신제(愼濟) 대각간 당은후 시호충무(大角干 唐恩侯 諡忠武)

선8세(先八世) : 공우(貢禹) 삼중보국 상대부 당성백(三重報國上大夫唐城伯). 섭(涉). 서(敍)

선9세(先九世) : 경여(警汝) 내성집사 당성백(萊城執事 唐城伯). 탕여(湯汝). 용(庸)

선10세(先十世) : 주(疇) 태자첨사 삼중대광보국(太子瞻事 三重大匡輔國). 우(宇) 대각간(大角干). 책(策)

시조(始祖) : 홍은열(洪殷悅)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광익경제공신(匡翊經濟功臣)·삼중대광(三重大匡)·태사(太師)로 전하는 은열(殷悅)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의 선계(先系)는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 : 27대 왕, 재위기간:618∼642)이 덕예 문학의 선비를 뽑아 보내 달라는 사신(使臣)을 보내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여덟 명의 학사(學士)를 문화사절(文化使節)로 고구려에 파견할 때 그중의 한 사람으로 들어온 홍천하(洪天河)의 후손으로 전한다.
천하(天河)는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儒學)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했으며, 고구려가 망하고 삼한 통합(三韓統合)에 따라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유학(儒學) 발전에 공(功)을 세워 문무왕(文武王) 때 당성(唐城 : 남양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지고, 신무왕(神武王)이 태자 태사(太子太師)로 추대했으며 효소왕(孝昭王)은 당성후(唐城候)를 삼았다고 한다.
그후 당성(唐城)의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후손들은 남양(南陽)을 본관(本貫)으로 삼고 은열(殷悅)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십대명벌(十代名閥)」로 손꼽혔다.
남양홍은 홍학사(이름 天河)를 선시조로 모셔 두고 그의 10대손(족보의 기록)인 고려(高麗) 개국(開國) 공신 홍은열(洪殷悅)[초명 유(儒)]을 시조로 그로부터 세계를 헤아려 온다. 그의 손자대에서 1파 [재신공파(宰臣公派)], 증손대에서 다시 1파[예사공파(禮史公派)], 6세손대 때 1파[중랑장파(中郞將派)]가 갈리고 13세손대 에서 13파가 갈려 모두 16파조로 나뉘는데 그중에도 맏이인 남양군(南陽君)[홍주(洪澍)]파와 문정공(文正公)[홍언박(洪彦博)]파가 남양홍 전체의 70%를 차지할 만큼 수도 많고 융성을 누렸다.
그밖에 판중추(判中樞)[홍언수(洪彦修)파]·익산군(益山君)[홍운수(洪云遂)파]·예사공(禮史公)[홍복파] 중랑공(中郞公)[홍후(洪厚)파]가 버금가는 세력을 차지, 이들 6파가 남양홍 위세의 주력인 셈. 특히 남양군 홍주의 7대손인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선조조 한성우윤(宣祖朝 漢城右尹)]의 자손에서만 상신(相臣) 5명과 문형(文衡)[大提學] 2명, 왕비(王妃) 1명, 20여 명의 판서(判書)급을 배출하는 화려한 가통을 이루었다. 석벽은 천민(天民)[선조조 도승지(宣祖朝 都承旨)]· 일민(逸民)[현감(縣監)]· 성민(聖民)[대제학 참찬(大提學 參贊)]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민의 후손에서 4명의 정승이 나왔다.

홍씨의 본관(本貫)및 시조(始祖)

♤남양 홍씨·(南陽洪氏)
 일세조 휘(諱): 은 열(殷 悅), 삼중대광(三重大匡)
♤남양 홍씨·토홍계(南陽洪氏·土洪系)
 시 조 휘(諱): 선 행(先 幸),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
♤풍산 홍씨(豊山洪氏)
 시 조 휘(諱): 지 경(之 慶), 국학직학(國學直學)
♤홍주 홍씨(洪州洪氏)
 시 조 휘(諱): 규(規),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출처 : 남양홍씨 우리가족
글쓴이 : 페르세우스 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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