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남양홍씨(南陽洪氏) 다른 본관 <당홍(唐洪)>과 <토홍(土洪)>

2009. 7. 16. 15:21대한민국 가문 탐구

http://blog.daum.net/perseush 순철(淳喆)

다른 본관 당홍(唐洪)과 토홍(土洪)

서로 조상을 달리하는 두 집안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을 일컫는 성씨. 우리나라 2백 49개나 되는 성씨 가운데 그런 성씨는 오직 남양 홍씨 뿐이다.
고려(高麗), 조선(朝鮮)에 걸쳐 근 1천여 년 융성을 누리며 우리나라 10대 문벌의 하나로도 꼽혔던 남양 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의 전혀 다른 두 계보가 있다.


<당홍>은 멀리 고구려(高句麗)시절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홍학사의 후예, <토홍>은 고려 고종조(高宗朝)의 김오위(金吾衛) 별장 홍선행(洪先幸)의 자손으로 각각 일컬어 온다.


당홍·토홍이라는 속칭도 바로 이같은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했다. 그러나 정작 <토착파>인 토홍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백여 년 이상 길다는 데서 동성동본 두 집안의 관계는 역사의 미궁에 돌아가 있다.


두 집안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그 하나는, 당홍은 글자 그대로 당(唐)나라에서 귀화해온 홍씨이며 토홍은 우리나라 토착의 홍씨라는 것. 그 둘째는, 당홍은 본디 남양(南陽)의 옛 이름인 당성(唐城) 홍씨의 약어로서 또 다른 남양 홍씨가 생겨나자, 이를 구분하기 위해 당홍에 대칭하는 용어로 토홍이라는 별칭이 생겨났다는 것. 그 셋째는 당홍의 시조로 일컫는 홍학사의 후예 가운데 일파가 난을 피해 신분을 감추며 별계의 토홍을 내세웠다는 설(당홍측주장) 등이다.

 

 

남양홍씨세보(南陽洪氏世譜) 당성(唐城) 조선 선조 36년(1603)

 

 


시도유형문화재
제341호
문화재명 : 남양홍씨병신보책판 (南陽洪氏丙申譜冊板)
지정내용 : 시도유형문화재 제341호 (지정일 1998.11.13)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 목판본 > 사간본
위치 : 경남 함양군 함양읍 백천리 (98매) 경남 시도유형문화재 보기
설명 : 
남양 홍씨의 족보를 찍기 위하여 숙종 42년(1716)에 만든 목판이다. 남양 홍씨가 함양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2년(1471)에 홍인손이 이 고을을 다스릴 때부터이다. 그 후 그의 후손 홍우령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 고을에 와서 살펴..   더보기

 

                                                            

종 목 문화재자료 
제213호 (군위군)
명 칭 남양홍씨세보(南陽洪氏世譜)
분 류 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사본류
수량/면적 1책
지 정 일 1989.05.29
소 재 지 경북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795
시 대
소 유 자 홍순철
관 리 자 홍순철
조선 선조 36년(1603)에 저술한 것으로, 남양 홍씨의 계보를 모아 엮은 책이다.

남양 홍씨의 계보는 처음에 홍일동이 수록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서문만이 남아 있던 것을 이를 본 서담 홍위가 족보의 계통을 확인하여 남양 홍씨의 2차 족보를 만든 것이다.

친가의 계통과 외가의 계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후손은 7∼20대손까지 기록되어 있고 자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또다른 설 

토홍계는 시조가 홍선행(洪先幸)이다. 그는 당성(당성)에 세거한 호족이었다. 당성은 남양의 옛 지명이다. 중국계 귀화인이 아니라고 전해진 사람인데, 당홍계 측에서 자기네와 같은 뿌리라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 근거는 이렇다. 시조 홍천하의 셋째 아들 홍순명(洪舜命)이 고구려 유민과 함께 신라에 반기를 든 일이 있었는데, 신라는 이 사건과 관련된 당나라 관리와 고구려 애국투사 검모잠(劍牟岑)을 잡아죽이려 했다. 홍순명은 이를 피해서 신분을 숨기고 당성 토착민으로 행세하여 토홍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당홍계는 토홍계보다 3백여년 앞선 씨족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뒤늦게 나타난 홍씨 성의 토행계는 당연히 당홍계의 씨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토홍계에서는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토홍계의 시조 홍선행은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이날 무관(武官) 벼슬에 있었고 선대 호족이라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휘하 장수였던 홍술(弘述)이 사성받아 홍씨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홍술이 의성홍씨(義城홍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도 당홍계 홍씨 문중은 이견(이견)을 달고 있다.

홍술은 사성과 개명까지 하여 홍유(洪儒)가 되었는데 이 홍유가 그들 족보에 있는 홍은열(洪殷悅)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홍은열도 고려 초 공신이라는 점과, 현재는

의성홍씨가 존재하지 않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김정현 저 (조선일보사 발행)*

 

 

남양홍씨족보(南陽洪氏族譜) --- 1687년(토홍계 정묘중간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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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 정묘중간세보(丁卯重刊世譜), 1687년(숙종13년)간행,  목판본,  상.하 2책,  상하내향어미, 가로24*세로35cm,
 
만력(萬曆) 병자년 여름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홍섬(洪暹) 서(序)함.

상.하 2책 으로 구성 되었으며  남양홍씨 土系  始祖 洪先幸 부터 16세손  홍수(洪璲)까지 기록.
유사는 호조좌랑 洪游敬, 연산현감 洪灝,  세자익위사익위 洪淨 .   

홍유경(洪游敬)
1650년생, 자:인숙 , 숙종(肅宗) 4년(1678) 무오(戊午)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三等).




상식적으로는 두 번째의 가설이 가장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실제 본고장인 남양(南陽)(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는 토홍을 남양 홍씨로, 당홍을 당성 홍씨로 구분하기도 한다고 하나 어느 것도 입증할 문헌이나 증거는 없다. 두 집안은 오래 전에 소득 없는 뿌리 밝혀내기의 수고를 포기한 채 서로 따로 계보를 가리되 남아닌 <종씨>로 사이좋게 지내오는 터다. 조상은 다르지만 동성동본인 만큼 서로 결혼도 하지 않는다. 근래엔 각자 종친회 외에 『범(汎) 홍씨 대동친목회』(회장 토홍측 홍승만(洪承萬)변호사)까지 결성,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홍씨는 남한에만 약 40만명, 인구순위는 20위. 남양(南陽)·풍산(豊山)·부계(缶溪)·홍주(洪州) 외에 문헌에는 개녕(開寧)·회인(懷仁)·경주(慶州)·풍주(豊州)·상주(尙州)·정안(廷安)·의주(義州)· 개성(開城)·안산(安山) 등 10여 본이 전하나 현재는 위의 4본만 확인된다.


그중에도 대종은 남양(南陽), 버금이 풍산(豊山)으로 나머지 부계(缶溪) 홍씨가 1천여 가구 홍주(洪州)는 몇 백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40만 홍씨의 거의 90%를 차지하는 남양 홍씨 중 당홍과 토홍의 비율은 8대 2정도 정립했다. 이것은 또 두 남양 홍씨가 어느 한쪽에 흡수되지 않고 유지돼 온 요인이기도 하다.


조선조(朝鮮朝)에 남양 홍씨는 모두 3백 29명(당홍 206, 토홍 123)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 884명, 안동 권씨(安東 權氏) 359명, 파평 윤씨(坡平 尹氏) 336명에 이어 네 번째의 서열이지만 인구 순위를 감안하면 놀라운 강세다.


당홍에서만 상신(相臣) 8명, 대제학(大提學) 3명, 왕비(王妃) 1명[헌종의 계비(憲宗의 繼妃)], 청백리(淸白吏) 3명을 배출했고, 토홍은 토홍대로 상신(相臣) 3, 대제학(大提學) 2, 청백리(淸白吏) 3명을 배출했으니 남양 홍씨의 명성은 부동의 것이 됐었다.


출처 : 남양홍씨 우리가족
글쓴이 : 페르세우스 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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