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나라에 여러 홍씨들의 유래

2009. 7. 16. 15:19대한민국 가문 탐구

http://blog.daum.net/perseush 순철(淳喆)

 

 우리나라 여러 홍씨들의 유래

 

우리나라 홍성(洪姓)의 역사(歷史)는 서기639년 중국 당(唐)나라 태종(太宗)때에 고구려(高句麗)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으로  8학사(學士) 의 한사람인 학사공(學士公) 휘(諱) 홍천하(洪天河)께서 오시기전에는 우리나라에는 동무홍성(東無洪姓)이라 하여 홍씨(洪氏)가 없었다고 한다.

 

홍씨의 본관(本貫)은 문헌(文獻)에는 5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남한(南韓)의 홍씨 인구가 약 46만 명 인구순위(人口順位)로는 20위(位)로 남양(南陽), 풍산(豊山), 부계(缶溪), 홍주(洪州) 4 본만이 확인(確認)되고, 그중 부계 홍씨는 근원(根源)이 재신공(宰臣公) 3세(世) 휘(諱) 난(蘭)으로 확정(確定)되어 남양 홍씨 당홍(唐洪) 재신공파(宰臣公派)로 갑인년(甲寅年) 서기 1974년에 합보(合譜)하였으며, 그외(外) 개령(開寧), 회인(懷仁), 경주(慶州), 풍천(豊川), 상주(尙州), 연안(延安), 의주(義州), 개성(開城), 안산(安山)등 그리고 외(外)에도 확인(確認)이 안되고 있다.

    

 그런데 서로 조상(祖上)을 달리하는 두 집안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을 일컫는 성씨가 우리나라 249개나 되는 성씨 가운데 그런 성씨는 오직 남양홍씨 뿐이다 고려(高麗), 조선(朝鮮)에 걸쳐 근 1천여 년 융성(隆盛)을 누리며 우리나라 10대 문벌(門閥)의 하나로도 꼽혔던 남양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의 전혀 다른 두 계보(系譜)가 있다. 당홍은 멀리 고구려(高句麗)시대(時代) 당(唐)나라에서 귀화(歸化)해온 홍학사(洪學士) 휘(諱) 천하(天河),이며 토홍(土洪)은 고려(高麗) 고종조(高宗朝)의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 홍선행(洪先行)의 자손(子孫)으로 각각 일컬어 온다.  당홍, 토홍 이라는 속칭(俗稱)도 바로 이 같은 귀화파(歸化派) 토착파(土着派)의 구분에서 연유(緣由)했다. 그러나 정작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歷史)가 300여 년 이상 길다는 데서 동성, 동본 두 집안의 관계는 역사의 미궁(迷宮)에 돌아가 있다.

 

 두 집안의 관계(關係)를 설명(說明)하자면 당홍계(唐洪系)에는 선계(先系) 10세보(世譜)에 보면 신라 문무왕 (文武王) 경오(庚午)에 고구려가 망(亡)하자 검모잠장(劍牟岑將)이 보장왕(寶藏王) 서자(庶子) 안승(安勝)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왕(王)을 삼고 당나라의 관속(官屬)과 귀족(貴族)들을 모두 죽일 때 선시조 휘(諱) 천하(天河)의 자(子) 휘(諱) 문명(文命)은 당나라로 돌아가 화(禍)을 면(免) 했고, 2자(子) 우명(禹命)은 화(禍)를 당하고, 3자(子) 순명(舜命)은 토착(土着)한 홍씨라 말하여 화를 면하게 되어 그 후  토홍이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한국씨족통보(韓國氏族統譜)에 의하면 토홍은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정확(正確)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다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두 집안은 오래 전에 소득(所得) 없는 뿌리 밝혀내기의 수고를 포기(抛棄) 한 채 서로 따로 계보(系譜)를 가리되 남 아닌 종씨(宗氏)로 사이좋게 지내오는 터이다. 조상(祖上)은 다르지만 동성동본인 만큼 서로 결혼(結婚)도 하지 않는다. 근래(近來)에 각자(各自) 종친회(宗親會) 외(外)에 홍씨대동친목회(洪氏大東親睦會)까지 결성(結成) 남양 홍씨 당홍(唐洪), 토홍(土洪)은 물론 풍산홍씨(豊山洪氏), 홍주홍씨(洪州洪氏)등 홍씨를 망라해서 대동친목을 도모(圖謀)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각각 문중(門中)에 소상(昭詳)한 문헌(文獻)을 진지(眞知)하게 검토(檢討) 연구(硏究)해서 동조동근(同祖同根), 뿌리의 가능성을 밝혀내는데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홍씨중에도 대종(大宗)은 남양(南陽), 버금이 풍산(豊山)으로 홍주(洪州)는 몇 백 가구(家口)에 지나지 않는다, 약 46만 여명의 홍씨의 거의 90%를 차지하는 남양 홍씨 중 당홍과 토홍의 비율(比率)은 8대 2정도 당홍이 압도적(壓倒的)으로 많다. 두 남양 홍씨들은 고려조(高麗朝)부터 명문(名門)으로 10대 문벌(門閥)의 하나로까지 부상(浮上)했으며, 서로가 융성(隆盛)을 다투며 함께 남양 홍씨의 명성(名聲)을 드높이는 상승(上昇)의 관계를 정립(定立)했다, 이것은 또 두 남양 홍씨가 어는 한쪽에 흡수(吸收)되지 않고 유지(維持)해온 요인(要因)이기도 하다.

 

 조선조(朝鮮朝)들어 남양 홍씨는 모두 324명 당홍 206, 토홍 118,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당홍 206명중 남양군파(南陽君派) 석벽공후(石壁公后)가 99명 (해봉공후(海峰公后) 46명 포함)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 884명 안동권씨(安東權氏) 359명 파평윤씨(坡平尹氏) 336명에 이어 네 번째의 서열(序列)이지만 인구순위를 감안하면 놀라운 강세(强勢)다. 당홍에서만 상신(相臣) 8명 대제학(大提學) 3명 왕비(王妃) 1명(헌종(憲宗)의 계비(繼妃) 청백리(淸白吏) 3명을 배출했고 토홍은 상신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3명, 풍산홍씨 (豊山洪氏)는 114명 문과급제)를 배출했으니 홍씨의 명성(名聲)을 부동(不動)의 것이 되었다.

 

(1) 남양홍씨(南陽洪氏) 당홍계(唐洪系) 유래(由來)

 선시조 홍천하(洪天河)는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때 당(唐)나라에서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학(儒學)을 강명(講明)하고 문화(文化)를 혁신(革新) 시켰으며,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때 유학발전에 공(功)을 세워 당성백(唐城伯)에 봉(封)해졌고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었으며 당성(唐城)에 사관(史官)되었다. 그리고 10대 후손인 고려개국공신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인 은열(殷悅)을 남양 홍씨 시조(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고 있으며 당성(唐城)이 남양(南陽)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본관(本貫)을 남양이라 하였다.

*일파(一派)

중량장공파(中郞將公派) 휘(諱) 후(厚) 후손(후(后)孫)

고려 인종시(仁宗時) 인주도령(麟州都領)

별보(別譜) 이었다가 당홍(唐洪)과 합보(合譜)

 

*일파(一派)

예사공파(禮史公派)

예사공(禮史公) 휘(諱) 복(복) 후손(後孫)

예사禮史

별보(別譜) 이었다가 당홍(唐洪)과 합보(合譜)

 

*일파(一派)

총랑공(摠郞公) 휘(諱) 연(涓) 후손(後孫)

별파(別派)

 

*일파(一派)

서령공(暑令公) 휘(諱) 복방(福邦) 후손(後孫)

별파(別派)

 

*일파(一派)

예의정랑공(禮儀正郞公) (諱) 의원(義元) 후손(後孫)

별파(別派)

 

(2) 부계홍씨(缶溪洪氏)의 유래(由來)

시조(始祖) 재신공(宰臣公) 휘(諱)  란(蘭) 개휘(改諱) 란(鸞) 

부계 홍씨는 근원(根源)이 재신공(宰臣公) 3세(世) 휘(諱) 난(蘭)으로 확정(確定)되어 남양 홍씨 당홍(唐洪) 재신공파(宰臣公派)로 갑인년(甲寅年) 서기 1974년에 갑인보(甲寅譜) 합보(合譜) .

*일파(一派)

  직장(直長) 사정(司正)공(公) 휘(諱) 좌(佐) 후손(後孫)

  九세손 은 휘(諱) 귀달(貴達) 조선조 문과(文科) 이판(吏判) 대제학(大提學)

 

(3) 남양홍씨(南陽洪氏) 토홍계(土洪系) 유래(由來)

 시조 홍선행(洪先幸)의 선계(先系)는 고증(考證)과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상고할 수 없으나, 그는 남양(南陽)(구 당성)에 세거(世居)한 호족(豪族)의 후예(後裔)로 고려 고종(高宗)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군제인 육위의 하나로 정3품 벼슬)을 지냈으며 가세(家勢)가 크게 번창하였으며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남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온 것으로 전한다.

*별보(別譜)

 *별파(別派) 이다

(4) 풍산홍씨(豊山洪氏) 유래(由來)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서기 1242년(고려 고종 29년) 문과(文科)의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국학직학(國學直學)(국학의 종3품 벼슬)을 역임(歷任)한 후 풍산(豊山) (현; 경북 안동 풍산면)에 정착 세거(世居)하였다. 그리고 후손들은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고려 말에서 조선 헌종(憲宗)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명성을 날렸다.

 

(5)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유래(由來)

 시조 규(規) (호는 락춘정)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을 칠 때 공(功)을 세워 삼한삼중대광벽상익찬공신(三韓三重大匡壁上翊贊功臣)으로 해풍(海豊)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해풍(;홍주의 옛 지명)에 세거하며 홍주(洪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6) 안산홍씨(安山洪氏)의 유래(由來)

시조(始祖) 조선조(朝鮮朝) 교리공(校理公) 휘(諱) 만원(萬源)

 

(7) 풍천홍씨(豊川洪氏)의 유래(由來)

시조(始祖) 정승공(正承公) 휘(諱) 원열(元烈)

 

(8) 경주홍씨(慶州洪氏)의 유래(由來)

시조(始祖) 전서공(典書公) 휘(諱) 문경(文慶)

 

(9) 개성홍씨(開城洪氏)의 유래(由來)

시조(始祖) 교서권지공(校書權知公) 휘(諱) 승범(承範)

 

(10) 염주홍씨(塩州洪氏)의 유래(由來)

시조(始祖) 조선조(朝鮮朝) 영조(英祖) 때 문과(文科) 휘(諱) 낙조(樂祖)

 

(11) 의주홍씨(義州洪氏)의 유래(由來)

시조(始祖) 찰방공(察訪公) 휘(諱) 적(適)

 

(12) 합천홍씨(陜川洪氏)의 유래(由來)

시조(始祖) 재신공(宰臣公) 휘(諱) 숙(淑)

 

(13) 의성홍씨(義城洪氏)의 유래(由來)

시조(始祖)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 태사(太師) 충렬공(忠烈公) 휘(諱) 유

 

*이 외에도200년 인구주택 총조사때  "46본"의 홍씨성이 더있다,  하지만 같은 홍씨들이

난세와 풍파로 멀리떨어지고 흩어져 뿌리를잊어버리고 찾지 못하여 스스로 본을 만들고,

또 요즘들어 자기의 뿌리를 몰라 잘못 대답한 이들도 많을것이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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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남양홍씨 우리가족
글쓴이 : 페르세우스 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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