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곡부공씨 氏族史

2009. 7. 11. 19:37대한민국 가문 탐구

<氏族史>

중시조 소(紹)의 아들 여(帤)는 고려 때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 평장사(平章事)와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 등을 지냈다. 그는 俯(號:漁村) · 은(號:孤山)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부(俯)는 우왕2년에 문과에 급제,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평장사(平章事) 등을 지내고 조선왕조가 개국한 뒤 한성판윤(漢城判尹)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이태조(李太祖)의 사은사절(謝恩使節)로 明나라에 다녀왔으며, 태종16년(1416) 明나라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천추사(千秋使)로 갔다가 그곳에서 별세, 조선조 최초의 순직 외교사절이 됐다. 경기도 평택(平澤) 광덕(廣德)에 있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신복사(新福寺. 현 深福寺)는 그의 명복과 후손들의 복운을 빌기 위하여 세워진 재궁(齋宮) 사찰이다.
공부(孔俯)는 일찍이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과 깊이 사귀었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필원록(筆苑錄)의 수제(首題)가 되었고 '필랄종왕(筆埒鍾王)'(王羲之와 맞먹는다는 뜻)이라 일컬어졌으며 한산군(韓山君) 이색신도비(李穡神道碑), 이태조의 왕사(王師)인 묘엄존자무학선사(妙嚴尊者無學禪師)의 탑비(塔碑. 楊州 檜巖寺 소재) 등에 필적을 남겼다.
둘째인 은은 우왕6년 문과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형과는 달리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면서 그는 이성계(李成桂)의 쿠데타를 불의로 규정하고 새 왕조에의 참여 권유를 거듭 뿌리쳤다. 전남 여천군(麗川郡) 삼일읍(三日邑) 낙포리(落浦里)로 유배되어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그곳에서 별세했다.
스스로 호를 고산(孤山)이라 했던 공은이 운명할 때 기러기 두 마리가 그의 죽음을 애통하듯 3일간 슬피울며 그의 적소 주위를 날아다니다 그가 숨지자 바닷가에 떨어져 죽었으며 이곳 지명 삼일읍(三日邑) 낙포리(落浦里)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후손들이 1958년 삼일읍(三日邑)에 여일재(麗日齋)란 재각을 세워 그의 충절을 추앙하고 있다.
곡부공씨(曲阜孔氏)의 조선조 인물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이로 중종 때의 강직한 문신이던 문헌공(文獻公) 공서린(孔瑞麟. 號:休巖)이 있다. 그는 중종2년 문과에 장원급제, 승지(承旨)가 되었다. 일찍이 김광필(金廣弼)의 문하에서 공부를 할 때 조광조(趙光祖)와 가까이 지냈던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함께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왔다. 그후 그는 누차에 걸쳐 조정의 권신들을 공격하는 소(疎)를 올리고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주장, 한때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뒤에 경기도·황해도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공윤항(孔胤恒)은 정조 때 문과에 장원, 정언(正言), 병조좌랑(兵曹佐郞), 승지(承旨) 등을 역임했으며, 공자(孔子)의 사적에 대한 문답을 기록한 책인 '공성탄신연화(孔聖誕辰筵話)"를 편찬했다.
공명렬(孔明烈)은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우리나라 공묘(孔廟)와 공자(孔子)의 후손에 관한 기록을 수록한 '동국궐리지(東國闕里誌)'를 편찬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장군과 함께 광주(光州)에서 1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 왜군의 정예부대를 대파하는 데 공을 세운 의병장 공시억(孔時億)도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이밖에 조선조의 인물로는 공휘(孔暉. 漢城判尹), 공성길(孔成吉. 太宗朝 漢城判尹), 공사문(孔斯文. 太宗朝 刑判), 공석(孔碩. 世宗朝 韋令 檜山君), 공분(孔賁. 世宗朝 司成 檜安君), 공희(孔禧. 軍資監正 贈領議政), 공종주(孔從周. 世宗朝 戶參), 공기(孔頎. 世宗朝 大司成), 공종주(孔從周. 世宗朝 參判), 공규(孔珪. 世宗朝 提學), 공인주(孔仁周. 世宗朝 禮判), 공익(孔翼. 宣祖朝 禮參), 공경량(孔敬良. 宣祖朝 學者), 공언령(孔彦齡. 仁祖朝 內禁衛將), 공덕일(孔德一. 仁祖朝 戶參), 공시하(孔時夏. 肅宗朝 刑曹參議), 공인용(孔麟用. 高宗朝 道學者) 등이 있고, 한말의 인물로는 공수(孔洙. 항일투사), 공성학(孔聖學. 成均館大司成 독립운동후원자), 공병헌(孔炳憲. 儒學者) 등이 있다.
조선조 때 곡부공씨(曲阜孔氏) 중 문과급제자는 모두 8명이다.
공자(孔子)의 가르침인 유교는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자 국교(國敎)구실을 하게 되어, 역대 임금들의 공자(孔子)와 그의 후손인 곡부공씨(曲阜孔氏)에 대한 배려도 대단했다. 태조7년 서울에 공자묘(孔子廟)를 지어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奉行)하였으며 그 후 오늘날까지 음력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이면 서울의 성균관(成均館)을 비롯, 전국 287개소의 향교에서 공자(孔子)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가 어김없이 행해져 오고 있다. 또 노성(魯城)·화성(華城)·봉곡(鳳谷)이 3개 궐리사(闕里祠)에서도 음력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이면 공자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태조는 "공자의 가르치심이 아닌 것이 없으니 공부자(孔夫子)의 자손은 성예(聖裔)인 만큼 마땅히 애호의 은전을 받아야 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명종(明宗), 숙종(肅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등도 공자 자손들을 실속 있게 등용하고 사소한 죄는 형벌을 면제하며 잡역을 시키지 말고 성균관(成均館)에 입교시키라"는 등의 전교들을 내렸다.
특히 선조(宣祖)는 공서린(孔瑞麟)을 청백리(淸白吏)로 선정, 광국공신(光國功臣)의 녹을 주었고, 영조(英祖)는 그를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追贈)하였으며, 정조(正祖)는 그가 강학(講學)하던 옛터에 궐리사(闕里祠)를 지어 석전(釋奠)을 베풀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화성궐리사(華城闕里祠)다. 이 화성궐리사(華城闕里祠)에는 공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73세로 영면할 때까지의 성적(聖蹟)을 기록한 공부자성적도(孔夫子聖蹟圖)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문헌공(文獻公)의 자손 가운데 많은 효행자(孝行者)가 나왔으며 문과 급제자가 4명이 나왔다.
한일합방 이후 의병대장 공성찬(孔成瓚) 등 의병 4인, 공봉원(孔奉元)·공문덕(孔文德) 등 독립군, 공득평(孔得平)·공개평(孔凱平) 등 의열단(유격대), 공태훈(孔泰勳) 등 재일 항일운동가, 공국선(孔國宣) 등 4인의 임시정부요인, 공흥문(孔興文) 등 15명의 학생운동, 공달순(孔達淳) 등 3.1운동에서 옥고를 치른 16명, 기타 많은 공(孔)씨들이 대중운동, 문화운동에 가담하였다.


출처 : 곡부공씨
글쓴이 : ko162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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