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옥천군-11(우암 송시열의 출생 설화)

2009. 7. 11. 19:20대한민국 가문 탐구

 송시열(1607~1689) 선생은 본관(本貫)은 은진(恩津)이며 자(字)는 영보(英甫)이고 호(號)는 우암(右菴)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으로 1607년 선조(宣祖) 40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九龍村) 그의 외가 곽씨 문중에서 출생한 조선중기의 대유학자이다.

 

 우암의 어머니 곽씨가 우암을 잉태할 때 태몽을 꾸었는데, 월이산을 몽땅 꿀꺽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우암 선생은 처음 잉태될 때부터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예측케 하였다. 또 선생이 탄생하던 바로 그 시각에는 월이산이 웅장한 소리를 내고, 금강 물의 색깔이 잠시 변했다고도 전한다. 일설에는 월이산 초목의 잎이 마르고 금강물이 홍색으로 변했었다고도 전한다.

 

 1625년(인조 3년)부터 김장생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그는 낙향하여 10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그러나 다음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다시 사직을 하고 낙향하였다.

 

 1658년(효종 9년) 찬선에 등용되고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효종이 죽음으로써 계획이 중단되었다. 이때 효종의 장례를 두고 대비의 복상문제가 야기되자 그는 기년설(1년)을 주장하였고 남인들은 3년설을 주장하였다. 결국 우암의 안이 채택되자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판의금부사,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는 동안 서인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별세하자 다시 왕대비의 복상문제가 논의되었다. 우암은 대공설(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들이 주장한 기년설(1년)이 채택되자 실각하고 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한 죄로 이듬해 유배생활을 했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며, 이 무렵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가 일어나 서인 소장파들과 갈등을 겪게 된다. 결국 우암의 제자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이 분파하였다. 그 후 정계를 은퇴하고 화양동에 은거하던 중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안치되었다.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남인들의 주청으로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신원되었다. 시호는 문정이고, 화양서원 등 전국 70여 개소의 서원에 제향되었다.

 

 송시열이 태어난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에는 우암의 외가 곽씨댁이 있었는데, 지금 우암유허비와 경현당, 그리고 그가 태어났다는 집터임을 알려주는 유기비(遺基碑) 등이 남아 있다.

출처 : Cho~i
글쓴이 : 초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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