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원절식 명도전 고조선때 제작된 우리화폐

2009. 1. 16. 16:07명도전 문자 연구

“원절식 명도전 고조선때 제작된 우리화폐”
고대 화폐 국적 논쟁
2008년 02월 27일 (수) 전제훈
교과서에서 이제까지 중국화폐로 표시된 접는 칼모양의 명도전(明刀錢)을 남북한 고고학자들이 고조선시대 우리 화폐라고 주장, 중국측은 반대입장이며 일본은 우리 주장을 긍정 , 동양3국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

또 북한 학자들은 이제까지 중국 전국시대~한대 화폐로 보아온 일화전(一化錢) 및 명화전(明化錢)이 고조선시대 또는 고구려초기 우리화폐일 것이라는 주장을 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작년 12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강사 박선미 박사가 학위취득논문 ‘화폐유적을 통해본 고조선의 교역’에서 밝힌 것으로, 이를 토대로 고대화폐의 국적을 소고 (小考)해본다.

고조선 강역 50곳서 출토… 표면 문양 ‘明’서 기원
한·일 ‘고조선 화폐’ 인정… 중 ‘전면 부정’ 쟁점화


중국의 고대화폐 유적을 내몽고 자치구 등 5개 원역으로 나누어볼 때 압록강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이르는 권역은 그 옛날 고조선 강역으로 그곳에서 명도전(明刀錢)이 50개소에서 출토되는 등 다른 권역에 비해 가장 많았다.

다음은 포전(布錢) 8곳,일화전(一化錢) 8곳, 반량전( 半兩錢) 8곳으로 같았으며 오수전(五銖錢) 6곳의 순위였다. 명화전(明化錢) 한곳도 출토되었다. 일화전은 대부분 포전 명도전과 함께 매장된 상태에서 나왔다. 포전 명도전은 전국시대(B.C 475~B.C 221년)것이 30곳, 일화전은 전국시대 말기 4곳, 반량전은 진(秦·B.C 221~207년), 한(漢)초기 6곳, 오수전서한 (西漢·B.C 206~A.D8년)중기 6곳이었다.

시대적으로 우리나라 고조선과 고구려 초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또한 요동반도에서는 일화전 출토량이 가장 많았다.

1960년 북한 학계와 중국 고고학계는 요동반도 일대의 유적에서 공동발굴작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서북부에서 출토된 화폐중 일화전과 명화전은 고조선의 고유화폐로 파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북공정을 거치면서 이런 견해들은 중국의 부정으로 깨지고 말았다. 평양 토성동 성안에서 고조선 유민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반량(半兩)거푸집(용범·鎔范)이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 명도전

1990년 ‘북한고고민속론집’에서 손량구씨는 요동과 서북 조선에서 출토된 명도전은 고조선주민들이 남긴 화폐라는 주장을 폈다. ‘한국사’에서 윤무명위원은 청천강을 경계로 그 이북에는 명도전을 대표하는 연의 문화가, 그 이남에는 세형동검을 대표하는 고조선의 명도전 등 청동문화가 발달한 것으로 보았다.

장박천 전 길림대교수(2002년 별세)는 칼이 약간 굽은 형태의 원절식 명도전은 고조선에서 제조 사용된 것이라고 밝혔다. 연나라가 요동을 상실하기 전 조선후국(朝鮮侯國)이 제작 사용한 것이며 모양이 직선인 방절식 명도전은 연나라가 고조선을 치고 요동에 진출한 후 제작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명도폐 연구 속설) = 화동뉴스 3월호 게재

원절식 명도전 표면에는 “ ”자 문양이 방절식에는 “ ”자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 ”문양은 갑골문 “明”자에서 기원한 것이라 했다.

▨ 제명도폐

장교수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제명도폐(齊明刀幣)도 조선후국(고조선)이 제나라와 상거래를 하면서 남긴 화폐라는 주장을 했다. 제명도의 옛이름은 박산도(博山刀). 칼모양의 전면에 “ ”부호가 새겨졌다. 중국은 연나라가 제나라의 수도 임치를 점령했던 기원전 284~기원전 279년에 만들어졌다는 엇갈린 주장이다.

▨ 반량전 용범

평양 동성동 토성에서 서한초의 4수반량전과 함께 나온 활석제인 반량전거푸집 3점의 출토는 고고학팀에 의한 발굴이 아니고 농부가 발견한 것을 일본인이 수집한 것이다. 한매는 전문(錢文)이 조각된 것이고 2매는 전배면 합형편(合型片)인데 테두리가 손상된 것으로 두께는 1.17㎝~1.93㎝였다. 주화의 거푸집이 발견되면 그런 주화를 그 지역에서 제조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고고학계의 상례였다. 그러나 그 시대는 화폐제조가 문란했던 시기였고 동이나 연이 아닌 석이라는 점을 미루어볼 때 사주(私鑄)제작용 거푸집일 가능성이 있다. 또 고조선이 교역을 강화했던 점을 미루어 타지역으로부터 유입되었을 것으로도 보고 있다. 그러나 출토품을 놓고 연구해 볼만한 과제이다.

▨ 일화전·명화전

중국은 명사전(明四錢), 명화전(明化錢),일화전(一化錢)을 연나라말 제조된 3대 원전(圓錢)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화폐의 출토분포는 중국 중원지역보다 오히려 고조선 강역이었던 동북부와 압록강북안에 많았다. 독자적으로 나타나기보다 명도전 또는 후대의 반량 오수전과 함께 동반 출토되어 함께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가 작은 일화전은 모양이 큰 명도전의 보조화폐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 학계는 이 돈이 고조선에서 주조유통된 화폐로 보고 있다. 중국은 내몽고 자치구에서 거푸집이 발견됨에 따라 이 지역에서 주조된 것이라고 반대 견해다.

▨ 중국반응

명도전이나 반량전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명도전은 연의 강역 출토라는 도식이 굳어져 있다. 또 동북공정을 거치면서 고조선의 화폐제작 주장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학술지에 발표, 정설화하고 있다. 이는 화폐가 갖는 특성을 전연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중화(中華)중심, 자국중심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다.

▨ 일본

1994년 다무라고이치(고고학자)는 종전까지 명도전 유적을한족(漢族)문화로 본 일본 고고학계의 학설을 뒤집고 요하 이동의 명도전 유적은 세죽리-연화 보유형과 선(先)고구려족이 남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지역을 화이잡거(華夷雜居)지역으로 불렀다. 이는 명도전이 연과 고조선의 화폐라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고고학자 부찐이 최근에 작성한 명도전 출토지역의 지도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같은 견해이다.

중국이 특정화폐를 다각적인 검토없이 한정치체제의 전유물로 보는 것은 잘못 평가된 것이다. 과거의 역사, 지난날 강역의 경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현재 영토안의 유물을 모두 자기나라 제작품으로 보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화폐는 하나의 국가 단위를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특히 명도전이 만들어진 전국시대는 고조선과 연의 잦은 전쟁, 동호의 퇴각 등으로 혼란한 시대상황을 감안할 때 화폐의 출토를 곧바로 특정한 정치체제 내지 연과 같은 국가에만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국제적인 학술세미나 등을 자주 개최하여 반대 의견을 잠재우고 설득 이해시킬 수 있는 단계로 발전시켜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자를 잘 몰라 외면하고 있는 젊은층들에게 고화폐 수집연구를 장려하고 몇 안되는 고고학 화폐연구층을 적극 육성, 그 층이 두터워져야 한다. 또 글로벌시대에 맞는 그 분야의 학술연구가 활발해져 고화폐에 대한 실제와 연구결과가 타국을 능가하는 선진수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고조선 초~중기 동아족인 한족(韓)의 야금술과 주조기술 등은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수백년이 앞서고 있었다. 주화 제조에서도 엽전의 동그라미에 네모구멍(形圓孔方)을 가장 먼저 낸 선조들의 혁신적인 선진기술(B.C642년) 등은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자신감의 역사적 배경이 될 것이다.

글 / 한영달 언론인·한국 고전연구감정위원회장

   
   
   
   
▲ 고대의 화폐 ‘도전(刀錢)’ 사진 위쪽부터 첨수도(尖首刀), 북한 학자들이 고조선 화폐로 주장하는 원절식 명도전, 원수도(圓首刀), 반수도(反首刀)

출처 : 반석포구
글쓴이 : 나루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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