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30. 13:59ㆍ한민족고대사
입력 : 2007.07.20 22:59 / 수정 : 2007.07.20 23:06
- ▲ 조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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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에서 4대 길지(吉地)를 다음과 같이 꼽는다. 경주 양동(良洞)마을, 안동의 하회(河回)마을, 안동 내앞(川前), 봉화의 닭실(酉谷)이다. 산수가 좋고, 인물이 많이 나왔고, 살기 좋은 곳들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 4대 길지는 모두 경북에 있다. 같은 경상도인데, 왜 경상우도인 경남에는 길지가 한 군데도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인조반정 이후로 남명학파의 좌장이었던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1535~1623)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남명학파에 속해 있었던 경상우도 명문 집안들의 정치적인 입지가 크게 제약을 받았다. 더군다나 1728년의 무신난(戊申亂)에 우도 사람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경남은 결정타를 맞았다.
경남의 길지들이 인구에 잘 회자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진주시 지수(智水)는 경상우도에서 손꼽을 만한 세거지이다. 수구막이인 덕암(德岩)이 동네 어귀에 있어서 마을을 감아드는 물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동네의 안산(案山)이 밥상인데다가, 방어산에서부터 내려온 동네 뒷산도 휘감아 돌아오면서 끊어지지 않았다.
지수에서 500년 동안 끊이지 않고 천석꾼이 배출된 집안은 김해 허씨들이다. 터만 좋다고 부자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허씨들이 처신을 잘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고 살았다는 말이다. 만석꾼이었던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1844~1932)은 경주 최부자, 의령의 천석꾼이었던 백산 안희제와 함께 공동 출자하여 만주 독립운동의 돈줄이었던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다.
그런가 하면 당시 빈민들에게 800두락(斗落)의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 주고, 곡식이 비어 있던 경상도 영창을 채워 주었다. 허준의 둘째 아들이 효주(曉洲) 허만정(許萬正)이다. 허만정은 1923년에 1000석의 재산을 내놓아 진주여고를 설립한 인물이다.
허만정이 여학교를 세운다는 소문을 듣고, 허준은 아들을 불렀다. “야! 네가 여학교 세운다고 돈을 좀 썼다고 하는데, 돈을 조금조금씩 썼느냐? 아니면 한꺼번에 털어 넣었느냐?” “한꺼번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러면 잘했다. 돈을 내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허씨들의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었기 때문에 500년 동안 양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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