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구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한탄강변 유적

2016. 5. 10. 12:52한민족고대사

세계 구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한탄강변 유적

한민족 이야기(7)- 아슐란형 주먹도끼의 발견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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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만 년 전, 인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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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한 것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른 바 곧선사람’(직립원인, 호모 에렉투스)이다. 25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인공적으로 만든 석기가 250만 년 전부터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류가 등장한 지 훨씬 뒤의 일이다. 이때부터 양팔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도구를 쓴 것으로 보인다. 인류는 나무막대나 돌을 사용해 다른 동물들과의 싸움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구의 사용으로 투입노동력 대비 생산량을 늘렸다. 이것이 인류 경제사의 출발이다
 
처음에는 자연 그대로의 나무막대나 돌을 도구로 썼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돌을 용도에 맞추어 깨트려사용했다. 이른 바 뗀석기’(타제석기, 打製石器)가 만들어져 구석기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대략 70만 년 전이다. 우리 충북 단양 도담리 금굴 유적이 7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초기유적이다. 이렇게 도구를 더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돌을 깨트려쓰는 지능이 발전하는데 180만년의 세월이 걸렸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구석기 문화가 없어 우리 문화는 모두 신석기 시대에 중국이나 시베리아로부터 전파되어 온 것인 줄 알았다. 식민사관은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한반도에서 구석기 문화가 꽃 피워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로 퍼져 나갔다.
 
주로 강가에 분포된 한반도 구석기 문화  
 
한반도 구석기문화는 1963년 북한 웅기 굴포리 유적과 이듬해 미국인 대학원생 앨버트 모어가 공주 석장리 금강 변을 답사하던 중 깬석기(마제석기, 磨製石器)를 발굴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 뒤 충북 청원군 두루봉 지역에서 구석기 유적지가 대거 발굴되었다. 1976부터 10년간 발굴한 이 유적에서 6개의 동굴유적이 발견되었다. 
 
구석기시대는 인류의 진화과정과 도구의 발달정도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는 곧선사람 곧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던 시대로 다양한 기능을 가진 찍개류, 주먹도끼 등 비교적 큰 석기를 사용했다. 중기는 석기가 작아지고 기능도 세분화되면서 다양한 종류의 석기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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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베찌르개
   
구석기 후기는 슬기사람 곧 호모사피엔스가 살았던 시기로 4만년에서 1만 년 전이다. 석기 제작기술이 발달하여 슴베찌르개가 개발되었다. 돌날을 작고 뾰족하게 만들어 이를 나무나 뿔과 결합시켜 작살과 창을 만든 것이다. 이를 고기잡이와 사냥에 사용했다. 이는 대단한 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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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하화계리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 석기, 출처 국립춘천박물관
 
특히 흑요석이 슴베를 만드는데도 제격이었다. 이는 유리질이라 면이 날카롭고 만들기도 쉬워 원하는 형태로 많이 만들 수 있어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구석기 유적에서 흑요석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양구 상무룡리 유적에서는 몸돌, 좀돌날, 밀개, 새기개, 긁개 등 60여점, 홍천 하화계리에서는 834, 철원 장흥리에서는 176점의 흑요석기가 나왔다. 중심연대는 1만 년 전쯤으로 보인다. 흑요석 석기는 이처럼 다양한 용도로 만들어져 사용되었는데 주로 작은 세석기로 쓰였다. 한마디로 구석기시대의 하이테크였다. 게다가 흑요석은 모피 제작의 필수 도구로 쓰여 일찍이 모피 사냥이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흑요석은 화산 폭발 당시의 동위원소를 갖고 있어 이를 이용해 당시 교역과 이동 범위를 추적할 수도 있다.
 
구석기시대는 주거지는 동굴만이 아니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곧 두물머리 지역은 구석기 사람들이 강가에 집을 짓고 집단으로 거주했던 지역이다. 이후 구석기 집단거주 유적이 강가나 물줄기 언저리를 중심으로 발견되었다. 사람들이 주로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냥도 협동해서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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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바닷가 갯벌이나 강변 모래밭에서 사용되었던 빗살무늬 토기
 
한반도에서 중요한 구석기 유적으로는 공주 석장리, 연천 전곡리, 제천 수양개, 파주 금파리 등 전국에 걸쳐서 큰 강 주변에 분포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강을 중심으로 생활했다는 이야기다. 우리 빗살무늬 토기의 밑바닥이 편평하지 않고 V자형인 것은 당시 사람들이 토기를 주로 물가 갯벌이나 모래밭에 꽂아 놓고 사용했다는 증거다. 또한 구석기시대의 유적지에서 백두산과 일본열도의 흑요석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지역 간 거래나 교류도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구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한탄강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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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렉 보웬이 처음 전곡리 유적을 발견했던 곳, 1977년 미군 발행 신문인 성조지에 실린 사진
 
 
세계 구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사건이 한반도에서 발생했다. 경기도 연천 한탄강변 구석기 유적이 그것이다. 이 유적은 1977년 한 미군병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한탄강에 놀러왔던 글랙 보웬이라는 미군병사가 처음 이곳에서 네 점의 석기를 주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고고학과에 다니다가 학비를 벌기 위해 군에 입대해 동두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 겨울에 데이트하러 나왔다가 강변에서 한국인 여자 친구가 깬석기 하나를 발견했다. 한 눈에 보아도 분명 아슐리안 주먹도끼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전율했다. 그는 여자 친구와 함께 이곳을 샅샅이 뒤져 아슐리안형 석기 여러 점을 추가로 발견했고, 발견지점을 지도를 그려 기록했다.
 
그는 발견내역을 적어 사진과 함께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전문가 보르드 교수에게 보냈다. 이를 받아 본 교수는 이를 한국의 고고학자 김원용 교수에게 신고하라고 권했다. 이 석기들은 서울대학교로 보내졌다. 이를 계기로 10년에 걸쳐 발굴이 진행됨으로써 거대한 구석기 유적지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지금까지 8500여 점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과학적인 연대측정법을 통해 약 30~ 45천 년 전으로 밝혀졌다.
 
아슐란형 주먹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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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슐란형 주먹도끼, 전곡리 토층전시관
 
이 전곡리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에서 가장 주목 받는 것은 단연 아슐란형 주먹도끼였다. 동아시아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여겨졌던 유물이었다. 세계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는 그동안 세계 고고학계의 정설을 뒤엎는 사건이었다.
 
그 무렵 고고학계는 유럽·아프리카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지 않아 찍개류의 석기문화만 존재한다는 미국 모비우스 교수의 구석기문화 이원론이 정설이었다. 찍개류와 달리 찍고 자르는 기능을 겸비한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는 프랑스의 생 아슐(St. Acheul)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붙여진 이름이다.
 
교수는 동아시아에 주먹도끼가 없는 이유로 고인류 시대부터 이 지역은 서구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쳐진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는 서양은 주먹도끼문화권, 동아시아는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했다. 전곡리 유적은 이러한 가설을 통쾌히 뒤집었다. 보웬이 전곡리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경지정리를 하면서 중요한 유적이 모두 사라질 뻔했다. 보웬의 발견 이후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임진강 유역에서만 60여 개의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다. 그 무렵 사람들이 주로 강가에 살았었다는 이야기다. 그 뒤 전곡리 이외에도 한반도 전국의 구석기 유적지에서 주먹도끼가 빈번히 발견되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 주거지, 한반도
 
이로써 한반도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 주거지였음이 드러났다. 기원전 70만 년 전의 충북 단양 도담리 금굴유적 등 구석기시대 유적만 한반도 전역에서 수백 군데가 발굴되었다. 그 무렵부터 많은 인구가 살았다는 뜻이다.
 
주먹도끼는 전기 구석기시대를 증거 하는 대표적 유물이다. 끝부분이 뾰족하고 몸체는 둥근 형태로 석기의 양 측면에 날카로운 날이 서있다. 그래서 나무가공, 도살, 가죽가공 등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어 구석기 시대의 만능석기로 불린다. 전곡리 등 우리 구석기 유적들에서 발견되는 주먹도끼들은 유럽-아프리카 지역에서 발견되는 주먹도끼와 동일한 제작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이 자존심을 걸고 아슐라안형 구석기 유적을 찾고 있지만 아직 찾지 못한 상태다. 이는 동북아에서 한반도가 가장 오래전부터 진화된 인류가 살아 온 지역이란 뜻이다.
  
역사 콤플렉스에 빠진 일본의 역사왜곡 한 단면
 
여기에 자극을 받은 일본의 한 고고학자가 있었다. 1972년부터 취미 삼아 발굴을 시작하여 19814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기를 발견하는 등 수많은 발굴 성과를 보여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은 후지무라 신이치.
 
그 공로로 아마추어 고고학자에서 도코후 구석기문화연구소 부회장의 자리에 오르며 총 180여건의 발굴 작업에 가담해 일본 초기 주거지의 다양한 유적을 발견했다. 그가 1992년부터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던 가미타카모리에서 200010월 전기 구석기시대 석기를 발견했다. 그러자 일본 전역은 언론의 대서특필과 함께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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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역사 콤플렉스에 빠져 구석기 유물을 날조한 사건이었다. 후지무라 신이치 부소장이 구석기 유물을 스스로 파묻고 이를 발굴한 것처럼 속였다. 자신이 소장 중이던 구석기 유물을 새벽 유적지에서 혼자 구덩이를 파고 파묻는 장면을 마이니치 신문이 비디오로 촬영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세상에 폭로될 수 있었다. 다행히 언론은 살아 있었다.
 
이후 그의 지난 30년간 이어져 왔던 중요 유적 발견들을 다시 조사한 결과 약 20 곳 이상의 유물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뒤 교육부는 교과서를 재검토할 것을 지시해 다섯 개의 출판사들이 교과서의 내용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인류 최초의 토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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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몬토기 역시 바닥이 좁은 걸로 보아 주로 갯벌이나 모래밭에서 썼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 역시 우리나라처럼 구석기시대부터 시작했다는 게 정설이다. 한데 그 시기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일본의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과정에 만들어진 대표적 유물이 조몬(繩文)토기다. 조몬토기는 새끼줄 모양이 새겨진 토기를 말한다. 우리 빗살무늬토기와 궤를 같이 한다. <, , >를 쓴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 조몬토기가 지금부터 12,700년경 전에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는 우리 제주도 고산리 토기와 더불어 세계 최초의 토기로 추정된다. 인류 최초의 토기가 당시는 붙어 있었던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처음 탄생한 것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