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한민족 이야기](3) 문명의 기원, 서해 갯벌한민족 이야기

2016. 5. 10. 12:16한민족고대사

한반도 초기 문명의 발상지...서해 갯벌

 

[홍익희의 한민족 이야기](3) 문명의 기원, 서해 갯벌한민족 이야기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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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하기의 서해평원
 
2만년~12천 년 전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지금 보다 120미터나 낮았다. 그 무렵 한국,
중국, 일본은 서로 붙어 있었다. 서해는 그때 해발 약 80미터의 육지였다. 그 무렵에는 황하
강과 양자강 그리고 압록강과 한강이 서해평원에서 합류되어 바다로 흘러내렸다. 당시 세
계에서 가장 큰 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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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출처; 박용안)
 
그 주변에는 사냥하기 좋은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초목지대였다고 한다. 그래서 서해평원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이 꽃피웠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제로 13천 년 전 인류 최초의 토기가
한반도(제주도 고산리), 일본 열도, 연해주 세 지역에서만 발견되었다. 이곳이 가장 먼저 농경
문화가 시작된 곳으로 추정되는 이유이다.
 
그 무렵 북반구 육지의 30%가 얼음으로 뒤덮여있었다. 특히 북위 60도 이북은 약 3천 미터 두께
의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있었다. 12,000년 전경 빙하기가 끝나면서 지구 기온이 따듯해지자
그 많은 빙하들이 녹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해수면이 차츰 올라가 1년에 몇 mm씩 올라갔다고
하는데 기온 상승이 심했던 100년간은 1년에 무려 5cm씩 높아지기도 하면서 육지였던 서해가
8000년 전쯤 지금과 같은 바다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바다 중 하나로 평균 수심이 44미터에 불과하다. 육지의
연장인 낮은 대륙붕인 것이다. 발해만 연안은 더 낮다. 평균수심이 22미터로 세계에서 대양에
접한 바다로서는 가장 수심이 낮다. 이렇게 육지가 바다로 바뀌는 과정에서 탄생한 게 광대한
서해 갯벌이다.
 
* 유라시아 대륙에서 제일 크고 세계에서 가장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서해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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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5대 갯벌이 있다. 우리나라 서해 갯벌을 위시해 북해의 아덴해 갯벌과 아메리카 대륙에
3개가 있다. 우리 서해 갯벌이 인류의 문명이 발생한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가장 크고 다양한
생물종을 갖고 있다.
 
인류의 4대 문명은 모두 강 하류에서 발전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다른 지역보다 손쉽게
물과 식량 그리고 소금과 땔감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강 하류의 퇴적층이
비옥한 농토를 제공해 농사짓기에 좋았고 바다와 가까워 소금을 구하기 쉬웠다.
 
그런데 여기에 갯벌이 발달해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왜냐하면 갯벌에는 수많은
생물종들이 있어 농사 외에도 해산물 수렵채취 생활과 소금 획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모든
문명은 소금 획득이 가능한 곳에서만 탄생했다. 소금이 인간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갯벌에는 3가지 종류가 있는데 펄갯벌, 혼합갯벌, 모래갯벌이 그것이다. 서해의 경우 이 세 갯벌
이 함께 발달되어 있다. 썰물이 빠져나가면 육지 부근에 고운 진흙으로 이루어진 펄갯벌이 펼쳐
져 있고 그 다음에 진흙과 모래의 혼합갯벌 그리고 바닷가에 모래갯벌이 있다. 이는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 때문에 이루어진 특이한 형태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지 않은 대부분의 외국 바닷가
에는 모래 갯벌 또는 모래톱만이 있는 경우가 많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에서 생활하는 생물들은 생각보다 매우 다양하다. 갯벌은 겉으로는 색
다른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 엄청난 밀도의 생물체를 부양하고 있다. 특히 펄갯벌이 넓게
발달한 우리 서해 갯벌에 생물종이 많았다. 해조류를 비롯해 게. 조개, 낙지, , 갯지렁이 등 이
러한 연체동물들이 진흙 갯벌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갯벌 위에 구멍을 내고 있기 때문에 사람
들이 채취하기도 쉬웠다. 게다가 이런 해산물에는 짠맛이 있어 염분 섭취에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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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 먹는 염생 식물, 함초 - 사진 출처; 신안 함초)
 

더구나 갯벌에는 함초를 비롯한 짠맛을 가진 염생 식물들이 많아 당시 구하기 힘든 소금을 대신
할 수 있어 사람들은 이들 채취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게다가 펄갯벌 웅덩이와 바위 위 움푹 파인
곳이나 바위 틈에는 소량이나마 햇빛에 마른 흙소금도 구할 수 있었다. 강 하구 갯벌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살면서 문명이 발달한 이유이다.
 
 
* 동이족 문명의 발상지, 발해만 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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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특히 발해만 일대는 평균 수심이 22미터에 불과해 갯벌이 크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강이 많았다. 요하와 황허강을 비롯한 40여개의 강이 발해만으로 흘러든다. 그러다 보
니 영양염류가 풍부하고 크고 작은 섬들도 많아 어류 산란장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실제
로 발해만과 상해 앞바다의 주산군도 일대가 중국의 최대 어장이다. 어족이 풍부하다 보니 고기
잡이도 일찍부터 발달해 고대 인류가 가장 많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발해만 연안에
는 중국 인구의 21%가 몰려 산다.
 
같은 서해라도 중국측 해안은 황허강 등에서 탁류가 흘러드는 곳이고 서쪽 해안의 강들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들었다. 게다가 서해 갯벌은 경사가 완만해 조석간만의 차가 커 중국 측 갯벌보다
훨씬 좋았다. 홍산문명 이전의 초기문명이 요동반도 인근의 발해만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갯벌에서 고기잡이에 사용할 수 있는 배는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라야 했다. 그래야
썰물에 바닷물이 빠져 나가도 갯벌 위에 쓰러지지 않는다. 다른 나라 배들은 대부분 밑이 뾰족
하게 유선형으로 생긴 첨저선이다. 물을 빠르게 가르고 나갈 수 있어 운항속도 면에서는 평저
선 보다 빠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첨저선은 갯벌에서 쓸 수가 없었다. 고대로부터 우리 한선
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평저선인 이유이다.
 
그런데 이 평저선이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단한 장점을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파헤쳐 줄
열쇠이기도 하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