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동장씨 대종가(玉山古宅)

2009. 7. 12. 16:42대한민국 가문 탐구

 

 

 

 

◎宗家(종가)는 仁同張氏(인동장씨) 始祖(시조) 三重大匡公(삼중대광공) () 金用(금용) 府君(부군遺墟址(유허지)로서, 高麗初(고려초)에 創建(창건)한 後() 千餘年(천여년)동안 宗孫(종손)이 代()()로 물려가며 世居(세거)하고 있는 由緖(유서) 깊은 古宅(고택)이다.

始祖公(시조공)께서 高麗初(고려초)에 仁同(인동)에 始居(시거)하신 이후 高麗中期(고려중기)부터 朝鮮初期(조선초기)까지 25()餘派(여파)로 分派(분파)되어 現在(현재) 60餘萬(여만)의 後孫(후손)이 全國(전국) 및 海外(해외)에 散居(산거)하여 韓國(한국)의 盛大(성대)한 氏族(씨족)이 되었다.

高麗(고려)때 創建(창건)한 이 宗家(종가)는 朝鮮初期(조선초기)까지 여러 번 重修(중수)를 거쳐서 世居(세거)하여 왔으나 宣祖(선조)25() 1592()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兵火(병화)로 建物(건물)이 全部(전부) 燒失(소실)되었다.

 

◎兵亂(병란)으로 宗家(종가)가 廢墟(폐허)된 후 40() 지나 1631()(仁祖(인조)9)에 이르러 三重大匡公(삼중대광공) 20代宗孫(대종손)인 克明堂公(극명당공) () 乃範(내범) 府君(부군)께서 舊址(구지)를 다시 築造(축조)해서 宗家(종가)를 重建(중건)하셨으니 이때 旅軒(여헌) 先生(선생) () 顯光(현광) 府君(부군)께서 지으신 重創文(중창문)이 있다.

그 후 1631(仁祖(인조)9)에 다시 重建(중건)한 후 240()이 지나 1870()(高宗(고종)7)에 이르러 建物(건물)이 오래되고 頹落(퇴락)하여 築臺(축대)를 쌓고 堂()을 넓혀서 크게 重修(중수) 하였으니 이때도 都事(도사) 豊山人(풍산인) 柳疇睦先生(유주목선생)께서 지으신 上樑文(상량문)과 吏曹參判(이조참판) () 仁遠(인원) 府君(부군)께서 지으신 宗廳重修記(종청중수기)가 있다.

다시 87()이 지나 1957()(丁酉(정유))에 이르러 正寢(정침) 七間(칠간)을 重創(중창)한후 1982(壬戌(임술))에 사랑채를 重創(중창)하였으니 이때 後孫(후손) () 承熙(승희) 府君(부군)께서 지으신 宗家(종가) 重創記(중창기)가 있다.

 

1994()(甲戌(갑술))에 大同譜發刊(대동보발간) 會議時(회의시) 宗家重創(종가중창)을 決意(결의)한 후 大同譜(대동보)의 獻誠金(헌성금)으로 1999()(己卯(기묘)) 三月(삼월) 五日(오일) 起工(기공)하고, 同年(동년) 6() 7()에 上樑(상량)한 후 二千年(이천년) 3() 30()에 竣工(준공)하였다. 垈地(대지) 488(), 建物(건물) 27()(110)이고 家廟(가묘)를 復元(복원)하여 儒林(유림)의 公議(공의)로 忠貞公(충정공) () 安世(안세) 府君(부군) ()()()를 함께 모시고 오늘에 이르렀다.

 

한집에서 千餘(천여)()동안 繼續(계속)하여 宗孫(종손)이 살아 온 것은 이 世上(세상)에 드문 일이며 자랑스러운 일이다.

 

출처 : 대종회 홈페이지

 

출처 : 右不可不守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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