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동(옥산)장씨 본관(本貫)의 의의(意義)와 유래(由來)

2009. 7. 12. 16:49대한민국 가문 탐구

인동(옥산)장씨 본관(本貫)의 의의(意義)와 유래(由來)

                                                                                                                                                                                                                                                                                             



○ 본관(本貫)의 의의(意義)


본관(本貫)은 관향(貫鄕)이니 곧 선조(先祖)의 고향이다.

본관(本貫)의 제도는 그 씨족(氏族)의 근본(根本) 뿌리와 혈통을 분별(分別)하기 위한 제도이고, 본관(本貫)은「관(慣)」또는「본(本)」,「관향(貫鄕)」, 「적향(籍鄕)」,「성향(姓鄕)」이라고도 한다.


관(貫)은 ‘꿸 관’ 자로 옛날 구멍이 뚫린 엽전을 한 줄에 꿰어 묶어 다니는 것과 같이 한 종족(宗族)이 서로 관련(關聯)이 있다는 뜻으로 설문(說文)에 보면 관(貫)은 어미모(母)와 조개패(貝)가 합쳐진 글자로 관전패지모(貫錢貝之母)라고 한다.


본관(本貫)은 그 씨족(氏族)의 시조(始祖)가 출생(出生)한 고을 「부(府), 군(郡), 현(縣)」이나 정착(定着)해 산 고을을 관향(貫鄕)으로 하고, 그 고을의 이름을 본관(本貫)으로 쓰며 또 관향(貫鄕)의 고을이름이 바뀌면 본관(本貫)도 바뀐 고을이름으로 고쳐 쓰기도 하고, 옛 이름을 그대로 본관(本貫)으로 쓰기도 하니 대개는 알기 쉽게 새로 바뀐 고을 이름을 본관(本貫)으로 쓰는 것이 통례(通例)이다.


우리 장씨(張氏)는 시조공(始祖公)이신 고려(高麗)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 휘 금용(諱 金用)께서 정착(定着)한 이래 천여 년을 인동(仁同)에서 대대(代代)로 살아온 고을 이므로 관향(貫鄕)을 인동(仁同)으로 하였다.

 


○ 본관을 옥산(玉山)과 인동(仁同)으로 쓰는 유래(由來)

 

옥산(玉山)은 인동(仁同)고을의 별호(別號)로 우리의 시조공이신 장금용(張金用) 부군(府君)께서 관향산(貫鄕山)인 이곳 옥산(玉山)에 터를 잡으시고 천년(千年)을 세거(世居)해 오면서 옥산(玉山)을 본관(本貫)으로 써왔으나,


옥산(玉山)의 행정구역(行政區域) 고을 이름인 인동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인동(仁同)을 본관(本貫)으로 많이 쓰게 되었다.


문강공 여헌선생(文康公旅軒先生) 장현광(張顯光)은 우리 본관(本貫)을 옥산(玉山)이라 하고 여러 선현(先賢)의 행장(行狀)과 신도비문(神道碑文), 묘(墓)의 비문(碑文), 기문(記文), 서문(序文)을 짓고, ″옥산(玉山) 장현광(張顯光)이 지었다“고 하였으며


국가(國家)에 공훈(功勳)을 세운 사람에게 봉군(封君)의 호(號)를 내릴 때는 대개 그 본관(本貫)의 이름을 따서 봉군(封君)의 이름을 짓는다.

우리 인동장문(仁同張門)의 선대조상(先代祖上)과 어른들에게 내린 봉군(封君)이름은 본관(本貫) 옥산(玉山)의 뜻을 넣어서 옥산(玉山)부원군(府院君), 옥산군(玉山君), 옥천부원군府院君), 옥성부원군(玉成府院君)으로 내렸으니

우찬성(右贊成) 팔도(八道) 도원수(都元帥) 충정공(忠正公) 장만(張晩)은 옥성(玉成)부원군(府院君), 군수(郡守)장돈(張暾)은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이다.


여헌수록(旅軒手錄)에 인동장씨(仁同張氏)라 쓰고 고려삼중대광신호위(高麗三重大匡神虎衛)상장군공(上將軍公) 장금용(張金用)을 시조(始祖)로 삼아 세계(世系)를 기록(記錄)하였으며 영조(英祖) 45년(1769년)에 펴낸 족보를 옥산장씨족보(玉山張氏族譜)라 하고,


순조(純祖) 삼년(1803년) 찬성(贊成) 송환기(宋煥箕)는 경파(京派)에서 펴낸 인동장씨(仁同張氏) 세보(世譜)의 서문(序文)에 “옥산(玉山)으로 관향(貫鄕)을 쓰는 장씨(張氏)는 실(實)로 대성(大姓)이다” 하였고,

 순조(純祖) 38년(1828년)에 펴낸 족보(族譜)와 그 이후(以後)로 펴낸 족보(族譜)의 이름은 인동장씨족보(仁同張氏族譜)라 하였다.

1910년 호적령(戶籍令)에 의해 호적(戶籍)의 본관(本貫)을 혹(或)은 “옥산(玉山)”이라 하고, 혹(或)은 “인동(仁同)” 이라 하였으며,


인동(仁同) 본향에서는 지금도 혼사(婚事)와 초상(初喪)때에는 예부터 내려오는 관례(貫例)에 따라, 예장지(禮狀紙)와 혼서지(婚書紙)에 “옥산후인(玉山後人) 張○○ 재배(再拜)” 라 쓰고, 명정(銘旌)과 관(棺)에 “학생(學生), 처사(處士) 옥산장공지구(玉山張公之柩)” 라 쓰며, 묘비(墓碑)의 앞면에 “학생(學生),처사(處士) 옥산장공 휘○○지묘(玉山張公 諱○○之墓)” 라 쓰고, 비문(碑文)과 가장(家狀), 행장(行狀)에도 본관(本貫)을 옥산(玉山)이라 하며 호적(戶籍)에는 대부분(大部分) 인동(仁同)이라 하였다.


 지금은 본관(本貫)을 옥산(玉山)과 인동(仁同)을 병용해서 쓰니 살아서는 인동(仁同)으로 쓴다 해서 생인동(生仁同)이라 하고, 죽어서는 옥산(玉山)으로 쓴다 해서 사옥산(死玉山)이라는 말도 있다.

1985년 11월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본관(本貫)을 인동(仁同)으로 쓰는 사람이 127.731세대에 538.803명이고 옥산(玉山)으로 쓰는 사람이 487세대에 2.024명이니 옥산(玉山)으로 쓰는 사람보다 인동(仁同)으로 쓰는 사람이 많다.   

출처 : 짱이집
글쓴이 : 창이아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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