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8. 15:37ㆍ대한민국 가문 탐구
초계(草溪)는 어디에 있는가?
초계(草溪)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 (江陽郡 : 합천 )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때는 초계(草溪)로 하였고 1018년(현종 9)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6년(충숙왕 3)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陜川郡)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 있다.
초계정씨의 5대 종파
◆ 초계정씨 시조 1세→諱 배걸(倍傑).
◆ 2세→휘 문(文)
◆ 3세→휘 복공(福公), 복경(福卿), 복유(福儒)
● 복공(福公)의 子 영(榮:4세) →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
● 복공(福公)의 子 행부(幸夫:4세) →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
● 복경(福卿)의 子 윤기(允耆:4세) →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 복유(福儒)의 子 실휘(失諱), 故로 7세승(丞) →박사공파(博士公派)
● 태화(泰華:6세) → 대사성공파( 大司成公派)
5대종파와 분포
내급사공파 (內給事公派) 정배걸의 4세손 휘 영(榮)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냈고 그 후손들을 내급사공파라 한다. 안성을 비롯한 경기지역과 충북, 황해도, 전라도 일원에 세거(世居)해 왔다. 15세 휘 창(昌)의 아들 중원(仲元)의 자손들이 충북음성의 도청, 위산에 터를 잡고 세거해 왔다.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 4세 휘 행부(幸夫)의 자손들을 천호장공파라하며, 그 후손들은 경기도 이천, 남양 등지와 춘천, 전남, 황해도 일대에 세거해 왔다. 18대에 이천으로 낙향한 뒤에 자손들이 지금의 장호원읍 풍계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호희공파(胡僖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대제학공파 (大提學公派) 시조의 子, 정간공(貞簡公), 휘 문(文)의 손자 윤기(允耆:4세)가 대제학을 역임했으므로 그 자손들을 대제학공파라 한다. 대제학공파 가운데 입경산(入慶山)한 양헌공(良獻公), 휘 연(王+因:10세)의 후손들은 경산일원에 세거하고 있으며 ◀경산파(慶山派)라 한다. 경남의 합천 및 진주에 세거하고 있는 대제학공파를 ◀초계·진주파(草溪·晋州派)라 한다. 그리고 강원도 등지에 터를 잡은 대제학공파를 ◀관동파(關東派)라 한다. 특히, 11세 휘편(便)이 고려가 망하자 주로 강원도에 퇴거하였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강원도 횡성에 많이 살게 되었다.
박사공파 (博士公派) 시조의 제7세 박사공(博士公), 휘 승(丞)은 고려국자박사(高麗國子博士)를 역임한 바가 있어, 그의 자손들을박사공파라 한다. 박사공파는 경남 각지에 산재하며◀진정종파(眞定宗派) ◀장양공파(莊襄公派) ◀상시공파(常時公派) ◀용인파(龍仁派)로 나누어져 있다. 특히, 13세 휘 준(俊)의 자손들이 경남 의령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대사성 사공(大司成 司公)을 역임한 제6세손 휘 태화(太華)의 후손들을 대사성공파라 한다. 대사성공파는 경남 합천의 쌍벽 일대에 많이 살고 있다. 10세 휘사중(師仲)의 자손들은 지금의 쌍벽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초계정씨의 전국분포
1930년에 이르러 초계 정씨의 자손들은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 일원, 화성군 일원, 강원도 춘성군, 양양군, 횡성군, 충북 음성군 일원, 경북 경산군, 경남 의령, 합천군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초계 정씨는 약 8만 3천여명이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에 가장 많은 1만 8천여.명, 경남에 1만 3천여명, 부산에 1만여명, 경기도에 1만여명, 강원도에 7천여명, 대구에 4천 6맥여명, 충북에 4천 4백여명, 전남에 4천여명, 경북에 3천 5백여명, 인천에 2천 5백여명, 전북에 2천여명, 충남에 1천 6백여명, 그리고 제주에 1백여명 살고 있다.
시조 할아버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중에서 문헌공
후손된 우리들의 처신과 책무가 증차대하다고 하겠으며 유림들의 선생으로 모시어 봉축하는것도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문종 34년(1080년) 명헌을 추존하는특별한 왕명으로 홍문광학 추성찬화공신개부의 동삼사 수태위 문하시중 상부국 광유후 홍문공에 증작 증시 되었다.
부인 최씨는 현숙였으나 무자하여 공에게 권하여 친정 일가집 딸을 부실로 삼게하니 문종 5년(1051년 )유복으로 아들을 낳으니 이분이 이세 정간공이시다. 정간공이 아드님 세분을 두시니 형부원 외즉 복공공 전중내급사 복경공,복유공이시다.
시조 광유후의 묘소는 쌍책면 성산리 옥전 자좌에 모셨으니 상단 쌍책은 시조와 부인 최씨의 묘분이요 하단묘소는 부실 최씨의 묘분이요 동쪽에 묘단비가 있다. 이조 명종 십칠년 (1562년) 봄 16세 항제공 휘 종영이 경상관찰사가 되어 초계에 순시차왔다가 시조 묘소를 찾지못하고 동구에서 망배하였다는 문헌으로 보아 시조께서 돌아가신지 오백여년이 지난 그 당시는 실묘상태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려말선초 격동기에 후손이 흩어지는 바람에 문헌이 실전되었으리라고 추정되나 여하간 민망하고 죄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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