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적이, 이런 개벽이

2008. 7. 3. 19:54명도전 문자 연구

이런 기적이, 이런 개벽이

 

 

제가 가설로 진에서 통일한 한자가 고조선의 글이지 않을까 가설을 세웠습니다.

 

 

한단고기를 보면서도 무심히 지나간 이 글에 제 가설의 경로가 정확히 들어 있습니다.

 

 

한단고기,246쪽, 임승국 님 번역,정신세계사

 

 

 

1)부여 사람 왕문(王文)은 처음 전문(篆文)을 번거롭게 여기고

좀 그 획을 없애고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이를 사용했다.

 

2)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은 숙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

을 한수(漢水)에서 얻었고, 또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으로 고쳤다.

이것이 지금의 3)팔분(八分)이다.

 

4)진(晋)나라 때 왕차중(王次仲)은 또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지금 그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역시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1) 고조선의 거수국이면서, 고조선 망국 후 민족의 종가 나라의 맥을 이어나갔다. 

 

2) 정막:  BC 240경~207경.

 

다음 사전:

 

자는 원잠(元岑). 진(秦)나라 샤두[下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 시(西安市) 남쪽] 사람이다. 처음에는 현의 옥리(獄吏)였는데 시황제(始皇帝)의 노여움을 사서 윈양[雲陽]의 옥중에 갇혔다. 옥중에서 10년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대전(大篆)·소전(小篆)의 각이 지고 둥근 필획을 개조하여 3,000자(字)의 예서를 만들었는데, 이를 상주하자 시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어사(御史)로 등용했다고 한다. 그당시에는 국가가 통일되고 정권이 집중되어 공문(公文)이 많아, 소전으로 쓰기에는 불편했다. 서리(胥吏)들은 정막이 고안한 서체가 쓰기에 아주 간편하여 예인(隸人:胥吏를 말함)의 번거로움을 도와주는 글자라고 하여 예서라고 불렀다. 정막은 소전의 개혁과 예서의 창제에 모두 이바지했지만, 예서에 대한 공헌이 특히 컸으므로 이후 오랫동안 예서의 창시자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1980년 쓰촨 성[四川省] 칭촨 현[靑川縣] 하오자핑[郝家坪]에서 글자가 새겨진 전국시대 나무상자 2개가 출토되어, 이것으로 진이 전국을 통일하기 약 80년 전에 이미 예서가 출현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1975년 후베이 성[湖北省] 윈멍[雲夢] 쉐이디후[睡地虎] 진묘(秦墓)의 문미(門楣)에 씌어진 9자와 1,100여 개의 진대 죽간이 출토되어,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에는 이미 예서체의 통일이 꽤 이루어졌고 쓰는 것도 숙련되었음을 더욱 확실시해주었다. 따라서 정막이 예서를 창시했다는 학설은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민간에 전해오던 예서체를 수집·정리한 것은 여전히 한자 발전사에 있어서 커다란 공적이다.

 

 

* 흔히 상식적으로 진나라가 예서를 통일했다고는 알려져 있지만,

최근 유물로 살펴보면 이 상식은 틀렸으며

적어도 진 통일 80년전에 이미 예서는 정립되어 있었다.

 

이 글은 어느 나라 글인가?

 

 

 

3) 팔분(八分):【명사】 예서(隷書) 이분(二分)과 전서(篆書) 팔분을 섞어 만든 한자의 서체.

 

4)예서 뿐 아니라 해서 까지도 고조선의 글 일부분이다라는 놀라운 글입니다.

해서(楷書)- 한자 서체의 하나. 예서(隷書)에서 발달한 것으로 글자 모양이 가장 반듯한 것. 정서(正書)

 

 

 

최근에 중국 내몽고 피라밋에서 나온 미(米)글자(아마 환국 시대)와

중남미의 명(明),문(門) 글자(이전에 제시한 자료입니다)와

 

 

익산의 명(明) 암각화와

 

 

 

 

바로 앞에 보여드린 문(文)자에서 이 가설이 진설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의 문(文)자를 보시면,

모두 마름모 모양의 거친 모양새를 지니고 있는데,

고조선 화폐 상문(上文)화폐의 문(文)은 위 꼭지가 수평으로

뉘어져 있는 반듯한 필체입니다.

 

 

한단고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으로 고쳤다."

 

문에서 첫 획이 수평으로 누운 선 이 서체는 고조선 서체라고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 상문이 기자조선의 진품화폐라면

일상 생활에 필요한 한자는 이미 거의 갖추어져 있었다라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후대(고조선 후반기)

중국 사람들의 서적들도 거의 어려움 없이 읽었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