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명도전 시기와 출처 복습

2022. 1. 26. 19:46고조선화폐(명도전)

 

명도전 논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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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8쪽

 

이른 시기의 명도전은 平山, 保定, 易縣, 興隆, 赤峰, 敖漢旗 등에서 출토하였는데, 모두 태행산 동북부에 위
치한다. 이들 지역은 戎狄의 활동범위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첨수도의 유통이 매우 왕성했던
권역에 해당한다. 늦은 시기의 첨수도는 태행산 양쪽에서 발견되며 주로 태행산 이동 지역에
더 밀집해 있다.

2. 200쪽 : 갑형 면도전

주조 연대는 전국시대 중기 前단계, 즉 연 환공 시기인 기원전 372~362년과 연 문후 시기
인 기원전 361~333년으로 보고 있다.

 

시기만 보십시오.

 

3. 저는 첨수도에서 연결되어 나타나므로 100년 정도 더 이른 시기에 주조되었다고 보고,

실제로 간명고전사전에는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사이로 보아, 거의 저와 같은 견해입니다.

어쨌거나 중국학자들 견해를 다 수용하고 적어도 기원전 333년 전에는 갑형 명도전이 주조 되었습니다.

 

4. 그러면 명도전 거푸집과 다수의 명도전이 나오는 중산국의 존속 연대를 보겠습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354363&cid=40942&categoryId=33403 

 

중산국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북방 유목민족인 백적의 선우부가 허베이성 중부에 세운 나라로, 기원전 296년 조 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BC 506~BC 296).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인 적족(狄族)의 한 갈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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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북방 유목민족인 백적()의 선우부()가 허베이성[] 중부에 세운 나라로, 기원전 296년 조() 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BC 506~BC 296)

5.  중국 학자들이 중산국이 망한 뒤 연나라가 주조했다고 이렇게 주장 합니다. 중국 학자들 견해에 대해서 제 주장은 이렇습니다.

 

여러 학자들 견해 중 첫번째 입니다.

첫째, 갑형 명도전에 대해서는 연이 중산국의 영향을 받아 처음 제작,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전국시대 연이 융적과 교류를 진행하면서 춘추시대까지 실물화폐와 함께 융적의 화
폐인 첨수도를 사용하다가 융적의 국가 중 가장 강하였던 中山國이 멸망하자 이를 발전시켜
제작, 유통시켰다고 본다.

갑형이 주로 하북성 일대를 중심으로 발견되며 거푸집이 燕下都와 承德 羅家淸村유적 등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중산국은 분명 BC 296년에 망하였고, 그것도 조나라에 의해 나라가 망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갑형 명도전 거푸집은 연하도와 승덕이 오히려 중산국과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자료입니다.

 

갑형 명도전 거푸집이 나온 곳이 곧 연나라 하도라 해서 곧 연나라 화폐라 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역사해석이고, 또한 승덕까지 연나라 강역이었다라는 것은 너무 연나라의 강역을 넓게 해석한 까닭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중산국의 강역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현 연하도가 중산국 땅이었나 연나라 땅이었나가 매우 중요한 판단 요소가 된 것입니다.

이제 네번째 주장인데,

넷째, 기자조선이 을형의 명도전을, 연이 병형의 명도전을 각각 주조, 사용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張博泉에 의해 제기된 이 견해는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다. 그는 기자가 조선에 들어간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국명이 箕侯에서 朝鮮侯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조선후가 첨수도
의 문자 중 하나를 明류로 통일하여 요동을 중심으로 유통시켰다고 보았다.

 

일부는 기자조선 일부는 연나라 발행이라 보는 견해인데 이전 견해보다는 훨씬 역사적 사실에 가깝지만, 저는 명도전 뒷면 문자 연구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을형 명도전 뒷면에는 기자 조선의 고유 문자(상형한글)가 나타나고 있는데 만약 병형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면 왜 연나라 한자 계통의 문자가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뒷면 문자에 따라 그 국적을 판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런 고조선부여 문자(상형한글, 부예)가 있는 화폐는 모두 고조선(혹은 당시 기자 후손들이 거주한 번한조선)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명도전을 原生形과 次生形으로 구분하고 이들의 분포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연의
세력 확장과 경제 발전에 따른 상관관계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갑형을 원생형에, 을형과
병형을 차생형의 범주에 넣고 이들과 연의 정치, 경제적인 관계를 밝힌 것으로 일종의 화폐
지리학의 입장에서 고찰한 것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명도전은 전국 말기 이후 연이 5군
을 설치한 전성기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너무 하다싶어서인지 박선미님이 반론을 달았습니다.

이 연구는 화폐지리학이라는 관점에서 당시의 화폐유통과 정치, 경제, 인문지리, 자연환경
등을 고려하여 다각적으로 접근한 것이기는 하나 명도전을 여전히 연 내부에서 유통된 專有
物로 보고 있다는 문제점을 노정시키고 있다. 이 주장대로라면 당시까지 화폐를 사용하였던
소위 戎狄의 諸國이 그 후에는 화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어 다소 부자연스럽다. 동
북아시아에서 소위 첨수도를 맨 처음 사용한 집단이 북방의 유목민임을 인정한다면 이들이
중원의 조나 연에 의해 점령당한 이후에 화폐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중국 학계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연의 화폐개혁을 전하는 명확한 문헌 기록이 없고화폐를 주조하였다는 것을 전하는 기록조차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명도전
을 연의 세력 확장이나 강역 고증의 지표로 삼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연이 명도전을
주조하였다는 명확한 기록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화폐인 이상 한 국가 내부에서만 유통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연이 중심이 되어 명도전을 주조, 유통시켰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
로서는 주변의 여러 정치체들이 명도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대체로 사실에 입각한 반론 형식의 논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