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이야기(10)- 한반도에서 퍼져 나간 빗살무늬토기

2017. 8. 4. 22:20한민족고대사

한민족 이야기(10)- 한반도에서 퍼져 나간 빗살무늬토기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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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는 정주민족과 유목민족 간 각축의 역사
 
초기인류가 떠돌이 수렵채취 생활을 청산하고 두 가지 형태의 삶의 방식으로 나뉘어졌다. 채취를 주로 했던 사람들은 한 곳에 몰려 살며 농사짓는 정주민족이 되었고, 수렵 생활을 주로 했던 사람들은 목축을 하며 초원의 풀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는 유목민족이 되었다. 세계사는 기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두 민족들 간의 ‘거래’의 역사였다. 한 쪽의 힘이 월등히 우세하면 정복전쟁과 약탈이 행해졌고, 힘의 균형이 비슷하면 교역이 이루어졌다. 곧 고대에는 ‘정복전쟁, 약탈, 교역’은 모두 부를 획득하기 위한 경제행위 방식들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한 곳에 머무르며 농사짓는 정주민족 보다는 초원의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초지를 찾아 개척하는 능력이 강한 유목민족들이 우세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은 그 생활양식이 독특했다. 바닷가 인근 평야에서 농사짓고 사는 정주민족의 형태를 띠면서도 서해에 대형갯벌이 있어 갯벌 채취생활과 어로활동을 같이 영위할 뿐 아니라 국토의 70% 이상이 험준한 산악이라 협동수렵 역시 발달되어 있었다. 곧 우리는 정주민족이자, 해로활동을 하는 해상민족이자, 협동수렵을 하는 기마민족이기도 했다. 이러한 세 가지 특질을 모두 갖고 있는 보기 드문 민족인 우리 한민족은 한 곳에 정착해 안정적인 기반을 갖고 있으면서도 계속 먼 바다와 깊은 산속을 탐험하는 강인한 개척정신도 갖고 있었다.
 
초기 인류의 생활터전, 서해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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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처; 박용안


우리나라 서해는 약 1만 2천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물이 매년 조금씩 차올라 얕은 바다가 된 곳이다. 육지의 연장인 얕은 대륙붕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다라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 보니 이 작용으로 대형갯벌이 조성되었다. 유라시아 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대형갯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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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인류가 떠돌이 수렵채취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안정적으로 몰려 살려면 일단 먹거리가 해결될 수 있는 장소이어야 했는데 그 최적의 장소가 바닷가 갯벌이었다. 왜냐하면 갯벌에 구멍 난 곳을 헤집으면 낙지나 조개 등 연체동물을 손쉽게 잡을 수 있다. 뿐 아니라 인체에 꼭 필요한 소금 구하기도 쉬웠다. 고대의 소금은 정말 귀했다. 초기인류는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갯벌에는 소금기 있는 연체동물뿐 아니라 함초 등 염생식물도 많아 이들로부터 귀한 염분을 얻을 수 있었다. 더구나 갯벌에서는 웅덩이나 바위틈에서 소금을 채취할 수 있었다.
 
더구나 갯벌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 어족이 풍부했다. 초기인류는 이렇게 갯벌 연체동물 채취와 연근해 어로활동과 더불어 육지에서는 농사를 지며 터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소금 획득도 가능하니 갯벌 근처에 자리 잡으면 일석사조인 셈이다. 이렇듯 먹거리를 구하는 데는 농사 보다는 갯벌 채취가 쉬웠고, 사냥 보다는 고기잡이 어로 생활이 편했다. 우리의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이 대부분 바닷가와 강가에 분포되어 있는 이유이다.
 
동이(東夷)족, 인류 최초로 토기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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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고산리 덧무늬토기

신석기시대는 인류사에서 중요한 창조적 발명을 한 시기다. 그것은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원시인들은 음식물을 끓이는 과정에서, 점토용기를 불에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토기가 만들어 졌다. 불을 다루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600도 이상으로 불의 온도를 끌어 올려야 토기가 구워진다. 토기의 발명은 불을 이용한 인류 최초의 기술혁명이었다.
 
인간에게 토기는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토기에 물을 담아 동굴이나 집 안에서도 물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토기에 물을 담아 집 안에서도 물을 이용하게 된 시기를 신석기시대라 하여, 석기만 사용하던 구석기시대와 구분한다. 매번 물을 찾아 먼 길을 오가는 수고를 덜어준 게 바로 토기였다. 가히 혁명이었다.
 
또 수렵채집 시대에는 먹을거리가 많아서 남길 때도 있지만, 굶어야 할 때도 많았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거의 항상 먹거리가 부족했다. 그런데 토기의 등장은 인류의 생명을 안전하게 유지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경작으로 얻어진 곡물 저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끼니 때 마다 사냥하거나 채취하지 않고도 음식이나 곡식을 저장할 수 있어 삶이 조금은 덜 고달파졌음을 뜻한다.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가 발견된 곳이 바로 극동지역이다. 토기의 경제사적 의미는 크다. 먼저 정착생활과 농경의 시작을 뜻한다. 1만 3000 년 전 인류 최초의 토기는 세계에서 동이족들이 살던 연해주, 한반도, 일본 세 지역에서만 발견되었다. 가장 먼저 농경문화가 꽃피어 신석기 혁명이 시작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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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기 조각, 아무르강 유역 가샤유적 출토, 1만3000 년 전

1960년대에 일본 규슈 섬에서 발견된 새끼줄 문양의 조몬 토기가 1만 3000년 이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몬 시대의 유적지에서는 토기 뿐 아니라 돌과 뼈로 만든 연장을 비롯하여 나무로 만든 활도 발견되었다. 그 뒤에 발견된 고조선 영역인 만주 아무르강 유역 가샤 유적의 토기와 1988년에 발굴된 제주도 고산리 토기도 비슷한 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아무르강 유역의 가샤유적에서 나온 고토기 조각은 우리의 고산리 유적 토기와 같은 섬유질 토기이다. 고산리 유적 토기는 화산재 층 밑에서 출토되었는데 14000~10000 전으로 편년되고 있다. 이 세 지역의 토기는 특징도 같아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토기가 등장한 것이 약 8천 년 전이고 인도는 7천 년 전이다.
 
당시 이 지역들은 황해 바다가 생기기 전이라 서로 떨어져있지 않고 붙어 있었다. 게다가 동해 쪽에는 해상교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 이외에 조몬 시대에 환동해 교류의 흔적으로 꼽을 수 있는 유물로 ‘옥(玉)’제품이 있다. ‘옥’은 서일본 원시유적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유물이다. 당시 ‘옥’은 일본에서 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아시아 대륙의 어딘가에서 유입된 것이다. 일본에서 경옥 산지가 발견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또 옥 유물이 동해를 면한 일본의 서쪽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동해를 통한 해상교역의 산물로 보인다. 환동해 지역에서 ‘옥’은 조몬 시대에 서일본 지역과 한반도 그리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역물이었다. 
 
갯벌에서 쓰던 밑이 뾰족한 빗살무늬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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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빙하기가 끝나고 날씨가 따듯해지면서 한반도 주변의 인류는 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토기를 만들어 썼다. 이른 민무늬토기였다. 그러다가 토기 표면에 흙을 찍어 붙이거나 띠를 만든 것이 덧무늬토기고, 이후 토기 겉면에 금을 그어 문양을 장식한 것이 빗살무늬토기다.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과 발해 연안에서 출토되었다. 발해 연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8천 년 전쯤의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유적의 수는 135개에 달한다. 중국 내륙에는 없는 토기다. 채도(彩陶)에서 흑도(黑陶)로, 다시 백도(白陶)로 전승되는 중국의 토기는 우리의 토기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때문에 한국의 신석기 문화를 빗살무늬토기문화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한국 빗살무늬토기는 뾰족바닥의 반 달걀 모양으로, 이것이 빗살무늬토기의 원초적 형태이다. 빗살무늬토기가 뾰족한 것은 신석기시대 초기에 주로 바닷가 갯벌과 강가에 살다보니 굽이 뾰족한 토기를 갯벌이나 모래밭에 푹 박아 놓으면 넘어질 염려도 없어 사용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이 토기들의 공통점이 있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의 입 가장자리나 아래 부분에 구멍이 한두 개 이상 뚫려 있다. 이러한 구멍은 북방 유라시아의 빗살무늬토기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이 구멍의 쓰임새에 관해서는 아마 뚜껑을 비끄러매거나, 어디에 달아매기 위해서인 것 같다는 역사학계의 설명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는 평소 갯벌이나 모래밭에 박아두고 쓰던 토기를 쉽게 끌어 올릴 수 있도록 토기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원길을 따라 퍼져 나간 빗살무늬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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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시베리아와 유럽으로 전파

예전의 우리는 빗살무늬토기를 필두로 청동기문화 등 대부분의 문화가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시베리아로부터 한반도에 유입되었다는 ‘시베리아 기원설’을 정설로 배웠다. 아니었다. 식민사관의 덫이었다. 발해 연안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가 탄소연대측정 결과 시베리아와 동유럽의 것보다 천년이상 앞선다는 것이 밝혀졌다.
 
빗살무늬토기는 토기는 8천 년 전부터 북쪽 초원길을 따라 몽골과 동북아 그리고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어 갔다. 뾰족바닥의 빗살무늬토기는 위도 상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바닥이 평평한 형태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정주생활’이 넓게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또 토기 그릇 종류도 독 모양의 큰 것을 비롯하여 항아리·단지·대접·보시기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용도별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신석기 문화가 한반도에서 발흥하여 동북아 대륙과 시베리아를 거쳐 북유럽으로 퍼져 나갔음을 의미한다.
 
한반도에서 퍼져 나간 고인돌과 알타이어 세력권
 
고대 한국의 고인돌 문화도 초원길을 따라 퍼져나갔다. 고인돌 역시 한반도에는 8천 년 전의 것이 있는데 유럽에는 그 보다 훨씬 뒤의 것만 있다. 한반도에는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상이 몰려있을 정도로 숫자도 많다.
 
이 초원길은 훗날 흉노족과 이들의 일파인 훈족의 세력권과도 겹친다. 또 그 지역이 알타이어족의 세력권과 겹친다. 이러한 공통성과 유사성이 바로 우리의 빗살무늬토기가 지닌 세계성이며 초원길을 통해 교류를 해 온 증표이다. 
 
이를 증명하듯 현재 유럽에서 통용되고 있는 언어 가운데 헝가리어, 핀란드어, 에스토니아어는 인도유럽어가 아닌 아시아계 언어다. 또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 사람들의 반 정도는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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