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1. 15:42ㆍ국명 흐 의미
이런 것 처음 보지예.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지예.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6월 14일 을미 5번째기사 1428년 명 선덕(善德) 3년
유관이 단군이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의혹을 없애주기를 상서하여 청하다
우의정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상서(上書)하기를,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本鄕)입니다.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본향에 내려온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여러 부로(父老)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이 고을이〉 사적(事迹)이 오래인 것을 알았습니다. 구월산(九月山)은 이 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 조선 때에 있어서는 이름을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고, 신라 때에 이르러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때에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闕口縣)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 이르러서는 유주 감무(儒州監務)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때에 이르러 또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승격하였고, 산의 이름의 「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九月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산의 동쪽 재[嶺]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安岳郡)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 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고 일컫습니다. 신당(神堂)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라고 합니다. 신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 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묘와 합치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046) 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 ’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또 살펴보건대, 태고(太古)의 맨처음에 혼돈(混沌)이 개벽(開闢)하게 되어, 먼저 하늘이 생기고 뒤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天地)가 있게 된 뒤에는 기(氣)가 화(化)하여 사람이 생기었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 생겨나서 모두 형상을 서로 잇게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 생긴 지〉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 나무 곁에서 생겼다는 설은 진실로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감(聖鑑)으로 헤아려 결정하시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그 의혹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보류(保留)하여 두라고 명하였다.
유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9100&cid=46622&categoryId=46622
고려사를 개수와 교정하고, 대제학과 우의정을 거치신 분이 단군조선의 도읍지를 찾고 싶다고 세종에게 올린 상서입니다. 만약 신화라면, 도읍을 찾을 필요가 없었겠지예.
일제 치하가 아니더라도 우리 선조들 중에 우리의 첫 터전을 굴금해 하셨다는 것이외다.
그러면
유관께서 왜 첫 터전을 찾고자 했는가하면,
현재나 당시 조선의 '평양'이 아사달이 아닐 것 같다라는 의심 때문입니다.
-실제 현대 사학에서도 그 위치를 두고 다양한 학설이 있으니 유관이란 분의 학문과 지식은 대단했다고 봅니다. 물론 그러니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내셨겠지만요.-
북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 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단인, 단웅, 단군께서 당시 조선초 백성들이 바라본 직급이 '천왕' 이었습니다.
저 식민사학의 앵무새들은
짧은 지식으로 아마도 '유관'이란 우의정이 계셨는지도 모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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