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스무살, 인문학을 만나다>를 읽고

2010. 6. 4. 08:39세계정음 수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들이 쓴 <스무살, 인문학을 만나다>를 읽었다. 이 책은 대학교 신입생을 위한 인문학 입문서이다. 문학, 역사, 철학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망라하고 있다.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 그러므로 그는 비참하다. 사실 비참하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은 진정 위대하다.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파스칼)

 

관객은 비극적 상황에 처한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연민을 느끼게 되는 반면, 희극의 관객은 주인공들을 타자화시켜 거리를 두고 바라봄으로써 마음껏 웃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이 보통 망각하는 바이지만, 변화의 가장 명백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고 불가피하게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세대로 대체되기 때문이다......전통은 참된 가치들을 대변하는 한 보전되어야 하지만, 모든 전통이 참된 가치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대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전통은 불가피하게 변형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칼집 속의 칼'이라는 용어는 바로 능력은 있으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무용지물이 된 서얼과 중인들의 사회적 처지를 지칭하는 상징적인 문구로 자주 사용되었다.

 

산, 파도, 하늘도 나의 일부가 아닐까?

또한 내 영혼의 일부가 아닐까?

내가 그들의 일부이듯이.(바이런)

 

이상과 백남준은 누구보다 먼저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하였고, 현상과 본질의 대립, 부분과

전체의 부조화를 문제삼았던 것이다.

 

이상이 시의 경우에 시도했던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은 시 <오감도>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일정한 높이에서 공간을 확보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방식이다.

 

하늘에는 두개의 태양이 없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다(한세량)

 

<감시와 처벌>의 서두에서 묘사된 것처럼, 화려하고 거창한 위용을 앞세우면서 잔혹한 방법으로 신체에 고문을

가한 과거의 권력과는 달리, 현대의 권력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 통제의 수단으로, 혹은 부드러운

폭력의 규율권력으로 개인을 체제에 순응시키는 효과를 거둔다.

 

과거에 사람들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에코는 자신의 소설 <장미의 이름>

에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는 교조주의에 빠져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사람을 단죄하고 억압

할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 자체의 반복을 강조했고 반복이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밝혀내려고 하였다.

 

단순히 과거와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새롭게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창조적인 반복은 현대의 바우하우스 건축과 달리 결코 스스로를 절대적인 모범과 진리를 내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사람이 어떻게 미래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말인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래가 현재와 흡사할

경우에는 사람들은 그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다르다면 그가 겪은 곤경은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동일성을 지향하는 소통은 본질적으로 독백적이다. / 대화적인 소통은 그러한 소통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에서,

더 나아가 소통 자체란 언제난 불가능한 것일 수 있다는 고민에서 출발한다. 나와 타자의 동일성과 차이를 의식

하는 소통, 이것이 대화를 낳는다 / 이러한 대화적인 소통, 타자/차이를 염두에 두는 소통에서는 야콥슨이 '접촉'

이라는 요소로 축소해버린 '맥락'이라는 요소가 중요해진다.

 

번역이 언제나 '오역'일 수밖에 없듯이 소통은 언제나 '오역/오해'를 전제한다. 즉 '오해/오역'은 잘못된 소통이

아니라 소통의 필연적인 조건, 더 나아가 생산적인 조건이며, 이 '오해/오역'은 무엇보다도 약호 혹은 약호화/

탈약호화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인문학적 지식은 정확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지향한다.

 

바흐친에 따르면 타자의 말에 '응답하는 것'은 그것에 책임성을 가지고 관여하는 일이다. 즉 소통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책임성을 가지고 타자의 말에 관여하는 것(=응답하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서 소통의 윤리가 시작될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근대적 문제의식은 어떻게 현실을 사실대로 인식하고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으로 귀결될 수 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세르반테스에게 진리는 무엇이었는가 (1) '진리는 소통을 통해 구해진다' 일 것이다. (2) 

<돈키호테>에서 사회적 소통으로 구해지고 말로 구성된 어떤 진리도 항구불변일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해보인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며,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비트겐슈타인)

 

입문서라고 하지만, 내용이 어렵다. 인내를 갖고 읽다보면 남는 것은 남고 사라지는 것은 사라진다. 일독을 권한다.

 

     2010. 5. 31. 부산에서 자작나무

 

출처 : 착한사람들을 위한 법 이야기
글쓴이 : 자작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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