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조선........

2009. 12. 8. 10:01한민족고대사



고조선의 성벽으로 추정......대단히 견고함

 


고조선신화반영

중국 산동성 무시집안 전환대의 화강석 그림

상고시대때 고조선과 관련된 지역으로추정

 


“제천행사 무천은 고조선 풍속”…기존 ‘동예’ 이론과 배치
[동아일보 2005-06-11 09:05]

[동아일보]

그동안 동예(東濊)의 제천 풍속으로 알려진 무천(舞天)행사가 고조선의 풍속으로 기록된 문헌이 처음 발견됐다.

인천시립박물관 윤용구(43) 학예연구실장은 1907년 마크 아우렐 스타인(1862∼1943)이 둔황(敦煌)에서 영국으로 반출한 이른바 ‘둔황문서’ 중 하나인 토원책부(兎園策府·사진) 제1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발견했다고 10일 밝혔다.

이 책은 과거 시험에 출제될 예상 문제와 답안을 서술해 놓은 책. 당 태종의 7번째 아들인 장왕 운(蔣王 운)의 지시로 두사선(杜嗣先)이란 학자가 펴낸 것으로 국내에는 소개된 적이 없다.

이 책의 주석에는 고조선의 풍속으로 10월에 제천행사인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牛蹄占)이 있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지금까지 국내 교과서에는 고조선 이후의 시기에 동예가 ‘무천’, 부여는 영고(迎鼓), 고구려 동맹(東盟)이란 제천행사를 한 것으로 실려 있어 앞으로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책의 ‘정동이(征東夷·동쪽 오랑캐인 고구려를 정벌하자)’란 항목에는 “고구려의 잔당이 남아 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중화의 옛 땅을 찾으려는데 이를 위한 방책을 논하라”는 문제가 발견됐다.

윤 실장은 “눈엣가시인 고구려를 정벌해야 했던 당 태종은 신하들이 고구려 정벌에 반대하자 침략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이런 문제를 출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인천=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



'남부지방에도 고조선문화 있었다'
[부산일보 2005-01-26 12:12]

그동안 북한과 중국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고대 고조선 문화에 대한 기존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한반도 남단인 경남 진주에서 한꺼번에 발견됐다.

동아문화연구원은 26일 진주시 문산읍 이곡리 생물산업전문농공단 지 조성 예정지에서 현장설명회를 열고 지석묘 13기,석관묘 25기, 토광묘 1기 등 청동기시대 무덤과 환호 2곳,통일신라시대 수전,조 선시대 유아용 무덤 등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특히 기원전 8세기를 중심으로 하는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지석묘와 토광묘에서는 토기 어깨부분에 기하학적 무늬가 있는 채 문토기,손잡이가 있는 유단병식 마제석검,화살대를 끼우는 슴베가 없는 무경식 석촉,이단경식 석촉 등이 출토됐다.

요령식 동검 문화라고 하는 중국 동북지역의 발굴자료들과 계통을 같이하는 유물들이다.

이런 유물들은 그동안 한두 점씩 간간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도 출토되긴 했지만 한 유적에서 함께 나온 적은 없었다.

이렇게 세트를 이뤄서 나왔다는 사실은 결국 당시 중국 동북지역 과 한반도 남부지방에 이르는 동일 문화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청동기시대 고조선과 다른 문화로만 여겨졌던 한 반도 남부지역 역시 같은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학술자료다.

지석묘 역시 구조적으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30호 지석묘는 묘역 시설을 지상에서 높이 65㎝까지 할석으로 4단까지 쌓아올려 네모꼴의 석축시설을 마련하고,그 내 부에 할석으로 채움한 구조. 남아있는 묘역 시설은 8.8×5.7m가량 이다.

23호 지석묘도 같은 구조를 갖고 있지만 매장주체부가 지하 식 석관형으로 지상식 석곽형인 30호와 또 다른 형태다.

서로 군집을 이루면서 지상에 원형의 구획석을 돌린 뒤 그 내부를 흙으로 채우고 그 위에 다시 할석으로 한벌 깐 지석묘도 조사됐 다.

마치 분구를 연상케 하는 구조로,최근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마산 진동 유적에서 확인됐을 뿐 다른 곳에선 조사되지 않았다.

이상헌기자 tt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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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고조선으로 가는 키워드>-②
[연합뉴스 2006-03-01 14:18]
서복전시관 진시황 유물

갈석산은 또한 진 시황제가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동쪽 기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시되는 곳이기도 하다.

당(唐)나라 때 사마정(司馬貞)이 완성한 '사기색은'(史記索隱)은 제목에서 엿보이듯이 사마천의 사기를 해설하고 분석한 연구서다.

사마정은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라는 책을 인용해 "낙랑의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이 있으니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설명을 부연했다. 태강지리지는 서진(西晉) 태강(太康.280-289) 연간에 완성된 지리책으로 지금은 망실됐다.

여기서 말하는 낙랑은 그 뿌리를 BC 108년 무렵, 한무제가 위만조선 땅에 설치한 그 낙랑군(樂浪郡)으로 소급된다. 낙랑은 서진 시대에도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성현이란 한 무제 때 이미 창설된 곳으로 낙랑군이 관할하던 6개 현(縣)의 하나.

수성현에서 시작한다는 장성(長城)이란 시황제가 쌓았다는 소위 만리장성이다.

같은 당나라 때 인물인 두우(杜佑)가 편찬한 의례서의 일종인 '통전'(通典)에서 두우는 자신이 살던 당시에 존재하던 노룡현(盧龍縣)이란 곳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룡현은) 한나라 때의 비여현(肥如縣)이다. 갈석산이 있으니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진(晉)나라 때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가 말하는 것과 같이 진(秦)의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그렇다면 한나라 때 설치된 비여현은 어디며, 나아가 그 자리에 나중에 들어선 노룡현이란 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면 갈석산은 위치가 드러난다.

각종 기록을 종합하면 노룡현은 수나라 개황(開皇) 18년(598)에 비여현(肥如縣)을 대체한 이름이다. 노룡현은 이후 크고 작은 변혁이 있기는 했으나, 지금까지도 친황다오시(秦皇島市)를 구성하는 현의 하나로 면면히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노룡현 개칭 이전 그 자리에 있었던 비여현은 한무제가 즉위 초반기인 BC 140년에 전국을 103개 군으로 나누고, 13개 주자사부(州刺史部)를 설치할 때는 유주자사부(幽州刺史部)가 관할하는 요서군(遼西郡)에 소속돼 있었다.

이후 비여현은 위(魏).진(晉).전연(前燕).후연(後燕).북연(北燕)에 차례로 속했다가, 남북조시대에는 북위(北魏).북제(北齊)를 거쳐 수나라의 수중에 떨어졌다.

현재의 중국 허베이성 노룡현에는 주(周)왕조에 협조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전설적 인물들인 백제.숙제 형제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나아가 이곳은 이들 형제가 왕자로 있었다는 고죽국(孤竹國)이란 곳이 있던 자리로 지목되기도 한다.

고죽국은 나중에 위만조선이 정권을 탈취하게 되는 소위 기자조선(箕子朝鮮)과도 밀접한 곳이라는 기록들이 산발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로써 시황제가 4차 순행에서 올랐다는 갈석산은 지금의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일대 어딘가(아마도 노룡현 일대)에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 이곳이 연나라-고조선, 진.한(秦漢)-위만조선의 주요한 국경 분기점이었다는 사실도 확실하다.

그런데 역사학자 이병도는 갈석을 뜻밖에도 한반도의 황해도에서 찾고자 했다.

앞서 태강지리지라는 문헌에서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이곳이 바로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기점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주목한 이병도는 지금의 황해도 북부에 위치한 수안(遂安)이란 곳이 수성(遂城)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곳을 낙랑군 수성현 자리로 지목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갈석산도 자연히 황해도 수안 일대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다소 황당하게 보이는 이병도의 이런 주장을 통해 역설적으로 갈석산이란 곳이 고조선과 한사군을 이해하는 키워드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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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장악한 고조선은 ‘古代 강국’
[경향신문 2004-01-07 18:42]
=[韓國史속의 만주]2. 비파형동검과 고조선=

한해를 마무리하는 지난 12월19일, 경향신문 취재팀과 함께 중국 선양시 정가와자 유적을 찾았다.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래 전부터 살았다해서 붙여진 정가와자 마을. 주변을 자세히 보면 ‘청동’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집들의 주소도 청동로 ××번지이다. 마을 큰 도로변의 상가는 청동종합상가이다. 이처럼 랴오닝성(遼寧省) 선양시(瀋陽市) 티시취(鐵西區) 지역에는 유독 ‘청동’이라는 말이 여기저기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청동이란 말이 많이 쓰이는 이유는 청동 단검이 발견된 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동 단검이 발견된 자리에는 박물관이 있다. 정가와자 유적이라고 불리는 곳이지만 현재는 폐쇄된 상태로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되어 있다. 단지 건물 외관에 그려진 그림만으로 단검과 청동거울이 발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65년 발굴된 정가와자 유적지에서는 두개의 큰 나무곽무덤과 12개의 작은 움무덤이 출토되었다. 6512호 무덤으로 불리는 정가와자 3지점 무덤은 기원전 6~5세기께의 나무곽무덤(길이 3m65㎝)으로 비파형동검과 청동거울을 비롯하여 많은 청동기와 검은 간토기가 출토되었다. 무덤 규모나 출토 유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은 선양 일대 랴오허 평원 지역을 관할하던 고조선의 최고지배자 또는 예맥계 정치집단 지배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서는 당시 랴오둥(遼東)지역에서 성장한 세력에 대해 ‘조선후국(朝鮮侯國)’이라 표현하고, 이들이 성장하여 ‘왕(王)을 칭’하는 등 ‘교만하고 사납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고조선이 연(燕)나라와 대결을 벌이려고 하거나 흉노족과 손을 잡고 강국으로 부상하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남만주 랴오둥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이 주변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상당히 강한 지배권력을 수립했음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中선양 청동유물 ‘한민족’ 추정-

그런데 랴오허(遼河) 중류 일대의 정가와자 유적 등에서 비파형동검을 비롯해 다량의 유물들이 수습되면서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비파형동검은 랴오시(遼西) 지역에서 더 많이 나온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랴오시 지역은 예맥족 외에도 산융(山戎)이나 동호(東胡)들이 많이 활동하던 곳으로 고조선 주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말하기에는 아직 더 논의가 필요하다.

고조선 사람들은 만주의 남쪽 랴오둥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살았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한 곳이다. 이곳 주민은 주로 예족과 맥족으로, 언어와 풍속이 서로 비슷했다. 그 중 우세한 세력을 중심으로 다른 집단이 정복당하거나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8~7세기 무렵이 되면 고조선이 역사상에 등장하게 된다. 처음 고조선은 만주 랴오둥 일대와 대동강 유역의 여러 종족 집단을 느슨하게 통치했지만 기원전 4~3세기가 되면 중국의 연나라와 겨룰 정도로 나라의 힘이 커진다. 중국 사람들은 이러한 고조선 사람들을 일부러 깎아내려 오랑캐라 불렀다. 더럽고 거친 땅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예맥족’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기도 했다.

-기원전 4세기 연나라에 필적-

한반도나 남만주 지역에서 나오는 청동기, 철기 유물을 면밀히 살펴보면 고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곳과 그들의 사회상을 어느 정도 복원해 볼 수 있다.

이때 남만주 일대에 분포하는 비파형동검 문화와 고조선의 관계가 중요하다. 랴오닝지역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청동단검, 이른바 비파형동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에서 사용하던 동검하고는 형태가 다르고, 발견되는 곳이 주로 남만주 일대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우리 고대 주민들이 사용한 것으로 주목해 왔다. 만주의 랴오둥 지역을 중심으로 서북한 지역까지 주로 분포하는 탁자식(북방식) 고인돌도 주목된다.

그리고 고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에서는 미송리형토기가 유행했다. 이 그릇은 비파형동검과 같은 시기(기원전 7~4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탁자식 고인돌이 집중해 있는 랴오허강 동쪽에서 대동강 일대에 걸쳐 고루 발견되어 고조선 시대의 이른 시기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쓴 질그릇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조선이 청동기문화 단계에는 만주의 랴오둥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비파형동검 우리의 옛땅 증명-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에 성립되어 철기문화가 보급되던 단계까지 계속 존속했던 나라였다. 초기에는 각 지역의 정치체들이 느슨한 연맹체로 있었지만, 후기에는 제법 강력한 지배체제를 갖춘 사회로 발전해갔다. 이때의 영토는 만주 랴오둥 지역을 일부 아우르면서 대개 한반도 서북지방을 그 중심 영역으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 고조선 사회와 관련해서는 세형동검이 주목된다. 세형동검은 몸체가 길고 뾰족한 단검으로 대부분 대동강 남쪽 통일거리에서 발견된 나무곽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서북한 지역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세형동검의 80% 이상이 평양 주변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 검을 사용하던 시기의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세형동검을 사용하던 시기는 기원전 4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또한 세형동검이 발견되는 지역은 청천강 이남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조선 역사복원 ‘고대사 열쇠’-

평양 지역에서는 고조선의 초기 문화유물인 미송리형토기나 비파형동검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비파형동검의 경우 평양 근처에서만 소수 발견되었고 대부분 랴오둥 지방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미송리형토기의 경우 역시 압록강 이남보다는 그 이북 지역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중국 문헌인 ‘위략(魏略)’에는 “연나라가 군대를 보내서 조선의 서방 영토 2,000리를 빼앗고 만번한(滿潘汗)으로 그 경계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역으로 해석하면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기 이전에는 고조선의 영토가 평양 부근뿐 아니라 서쪽으로 더 멀리 남만주 지역에 뻗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우리 땅에 처음 나타난 국가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출발 단계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고조선은 이후에 부여, 동옥저, 삼한을 비롯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에 이르기까지 우리 겨레가 세운 여러 나라의 생성과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만주 남쪽, 특히 랴오둥 지역과 서북한 지역에 펼쳐진 고조선 역사를 정확히 고증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고대사, 나아가 우리 역사 전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송호정 교수/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최초 고대국가 고조선 수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인가.

학계의 견해는 엇갈린다. 현재까지 제기된 고조선 수도 위치에 대해선 재평양설(在平壤說), 재랴오닝설(在遼寧說), 이동설(移動說) 등이 제기되어왔다.

‘평양설’론자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이 조선을 세우고 도읍한 곳이 평양성’이라는 기록을 중시한다. 이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또 이들 학자는 ‘사기’ 조선전에 보이는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검성’ 역시 평양이고 ‘패수’는 대동강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견해는 일제강점기에 평양 인근에서 낙랑 유적·유물이 발견되면서 힘을 얻게 됐다.

재랴오닝설은 민족주의 역사가 신채호가 제기한 이래 1990년대 초까지 북한 학계가 이를 주장했다. 이들은 위만이 건너왔다는 패수를 랴오시(遼西)의 대릉하로, 왕검성이 가까이 있었다는 열수(列水)를 랴오허(遼河)로 본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고조선의 수도를 랴오허의 동쪽인 가이핑(蓋平)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만주지역에서 비파형동검과 순장(殉葬)무덤이 대량 발굴되고 있는 점도 랴오닝 도읍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순장무덤으로는 라오닝성 다롄(大連)시의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이 꼽힌다.

그러나 평양설은 만주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랴오닝설은 대동강 유역의 낙랑 유물을 부정한 데다 문헌고증에서도 적잖은 무리를 범하고 있다. 북한학계는 최근 종래의 랴오닝설을 부정하고 평양도읍설로 돌아섰다.

도읍 이동설은 두 주장을 절충하며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학계의 주장이다. 이 설은 비파형청동과 세형동검의 시간적 차이를 주목하고 있다. 처음 랴오둥 일대에 광범한 비파형동검 문화를 건설하고 있던 고조선이 연나라의 동방진출로 위축되어 평양으로 중심지를 이동, 세형동검 문화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유물 해석에 비약과 무리가 없다는 점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

〈조운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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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 앞의 요금 전탑
[연합뉴스 2006-03-01 11:16]

갈석산이 남쪽으로 조망하는 중국 허베이성 진황다오시(秦皇島市) 창리현(昌黎縣) 읍내에 서 있는 요금(遼金)시대 8각13층 전탑(塼塔). 높이 36m로 목조건축물을 본떴다. 2001년 6월25일 중국 국무원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했다. //김태식//문화/2006.3.1 (친황다오=연합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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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고조선으로 가는 키워드>-①
[연합뉴스 2006-03-01 14:16]
신악(神岳) 갈석(碣石)

(친황다오<중국 허베이성>=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앞선 어느 제왕도 이룩하지 못한 통일제국 창업에 성공한 진 시황제는 재위 37년째를 맞은 BC 210년에 5번째 순행(巡行)에 나섰다가 사구(沙丘)라는 곳에 이르러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BC 221년 중국 대륙을 마침내 제패한 시황제는 그 직후 순수(巡狩)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BC 220년을 시발로 3년 연속 거푸 전국을 초도 순시하다가 3년을 쉰 뒤 BC 215년 순행을 재개하니 이것이 제4차 순행이다.

전한(前漢) 시대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타난 그의 제4차 순행 코스는 수도 함양(咸陽)→갈석(碣石)→상군(上郡)→함양으로 요약된다.

시황제가 찾아간 갈석은 어디였을까?

갈석은 사기보다 이른 시기에 완성된 문헌에도 여러 번 모습을 내밀고 있다.

늦어도 전한 초기 이전에는 완성되었음이 분명한 산해경(山海經)의 '북산경'(北山經)에서는 '갈석지산'(碣石之山)이란 산의 존재를 소개하면서 "그 위에는 옥(玉)이 나고, 그 아래에는 청벽(靑璧. 푸른빛이 도는 둥근 옥)이 많이 난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갈석산이 중국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만 드러날 뿐이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의 일종인 상서(尙書)를 구성하는 편명 중 하나로서 산해경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완성됐다고 하는 '우공'(禹貢)이란 곳에서는 기주(冀州)라는 지방의 지리적 위치를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곁들여 설명한다.

"조이(鳥夷)라는 오랑캐가 짐승의 가죽을 기주 땅에 공물로 가져오는데, 그들이 사는 데는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하(河)로 들어간 곳에 있다."

하(河)란 황하(黃河)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한 이상, 갈석은 황하가 바다로 흘러드는 어구 근처, 즉, 지금의 발해만 어딘가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침을 준다.

다음으로 '조이'(鳥夷)라는 족속은 정체가 무엇일까?

그것은 갈석에 대한 다른 기록들을 통해 어느 정도 실체가 벗겨진다. 나아가 이를 통해 갈석이 고조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후한 초기 역사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는 가연(賈捐)이란 사람이 한 무제(漢武帝)가 이룩한 위업을 칭송하는 글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수록돼 있다.

"동쪽으로는 갈석을 지나 현도와 낙랑을 군(郡)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BC 109-108년에 있었던 한 무제에 의한 위만조선(衛滿朝鮮) 토벌과 그에 따른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설치를 회고한 대목이다.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한 다음, 그곳에 낙랑.진번.임둔.현도의 4군(郡)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가연의 말을 분석하면 한군(漢軍)은 갈석산을 통과해 위만조선으로 진격한 셈이다. 또 그 이전 갈석산이 한-위만조선의 국경 지대에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이런 추정은 전한 소제(昭帝) 6년(BC 81), 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매해야 하는지, 아니면 폐지해야 하는지를 두고 벌어진 저명한 논쟁을 환관(桓官)이라는 사람이 정리해 완성한 '염철론'(鹽鐵論)이라는 문헌에서 더욱 명료해 진다.

염철론 중 '험고'(險固)라는 글에는 소금과 철에 대한 국가의 독점 전매제도 지속을 주장하는 어떤 대부(大夫)가 국가는 재정이 튼튼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국시대 7웅(七雄) 중 하나인 연(燕) 나라를 예로 들고 있다.

이에 의하면, 연나라는 갈석이라는 산으로 막혀 있고, 사곡(邪谷)이라는 계곡에 의해 외적과 단절돼 있다. 더불어 요수(遼水)라는 강이 둘러막고 있다. 그러면서 대부는 이런 산천(山川)들이야말로 사직(社稷.국가)을 지켜주는 보배라고 강조한다.

연나라가 우려한 외부세력 중 하나가 고조선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연나라가 제후의 위치에서 벗어나 왕(王)을 칭하자, 고조선 또한 그에 맞서 왕이라 칭하기도 했으며, 한 때는 이런 연왕(燕王)을 토벌하려 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반격으로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고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막대한 타격을 주기도 했다.

연이 진(秦)에 멸망하고, 이어 한(漢) 왕조가 들어선 초기인 BC 190년 무렵에는 옛 연나라 사람으로 도망자인 위만에게 정권을 탈취당하기도 했다.

어쨋든 염철론에 인용된 대부의 말에서도 갈석은 연-고조선 간 지배 영역을 가르는 장벽 같은 구실을 했다는 사실이 여실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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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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