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속의 만주]2. 비파형동검과 고조선=
한해를 마무리하는 지난 12월19일, 경향신문 취재팀과 함께 중국 선양시 정가와자 유적을 찾았다.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래 전부터 살았다해서 붙여진 정가와자 마을. 주변을 자세히 보면 ‘청동’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집들의 주소도 청동로 ××번지이다. 마을 큰 도로변의 상가는 청동종합상가이다. 이처럼 랴오닝성(遼寧省) 선양시(瀋陽市) 티시취(鐵西區) 지역에는 유독 ‘청동’이라는 말이 여기저기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청동이란 말이 많이 쓰이는 이유는 청동 단검이 발견된 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동 단검이 발견된 자리에는 박물관이 있다. 정가와자 유적이라고 불리는 곳이지만 현재는 폐쇄된 상태로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되어 있다. 단지 건물 외관에 그려진 그림만으로 단검과 청동거울이 발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65년 발굴된 정가와자 유적지에서는 두개의 큰 나무곽무덤과 12개의 작은 움무덤이 출토되었다. 6512호 무덤으로 불리는 정가와자 3지점 무덤은 기원전 6~5세기께의 나무곽무덤(길이 3m65㎝)으로 비파형동검과 청동거울을 비롯하여 많은 청동기와 검은 간토기가 출토되었다. 무덤 규모나 출토 유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은 선양 일대 랴오허 평원 지역을 관할하던 고조선의 최고지배자 또는 예맥계 정치집단 지배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서는 당시 랴오둥(遼東)지역에서 성장한 세력에 대해 ‘조선후국(朝鮮侯國)’이라 표현하고, 이들이 성장하여 ‘왕(王)을 칭’하는 등 ‘교만하고 사납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고조선이 연(燕)나라와 대결을 벌이려고 하거나 흉노족과 손을 잡고 강국으로 부상하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남만주 랴오둥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이 주변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상당히 강한 지배권력을 수립했음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中선양 청동유물 ‘한민족’ 추정-
그런데 랴오허(遼河) 중류 일대의 정가와자 유적 등에서 비파형동검을 비롯해 다량의 유물들이 수습되면서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비파형동검은 랴오시(遼西) 지역에서 더 많이 나온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랴오시 지역은 예맥족 외에도 산융(山戎)이나 동호(東胡)들이 많이 활동하던 곳으로 고조선 주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말하기에는 아직 더 논의가 필요하다.
고조선 사람들은 만주의 남쪽 랴오둥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살았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한 곳이다. 이곳 주민은 주로 예족과 맥족으로, 언어와 풍속이 서로 비슷했다. 그 중 우세한 세력을 중심으로 다른 집단이 정복당하거나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8~7세기 무렵이 되면 고조선이 역사상에 등장하게 된다. 처음 고조선은 만주 랴오둥 일대와 대동강 유역의 여러 종족 집단을 느슨하게 통치했지만 기원전 4~3세기가 되면 중국의 연나라와 겨룰 정도로 나라의 힘이 커진다. 중국 사람들은 이러한 고조선 사람들을 일부러 깎아내려 오랑캐라 불렀다. 더럽고 거친 땅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예맥족’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기도 했다.
-기원전 4세기 연나라에 필적-
한반도나 남만주 지역에서 나오는 청동기, 철기 유물을 면밀히 살펴보면 고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곳과 그들의 사회상을 어느 정도 복원해 볼 수 있다.
이때 남만주 일대에 분포하는 비파형동검 문화와 고조선의 관계가 중요하다. 랴오닝지역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청동단검, 이른바 비파형동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에서 사용하던 동검하고는 형태가 다르고, 발견되는 곳이 주로 남만주 일대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우리 고대 주민들이 사용한 것으로 주목해 왔다. 만주의 랴오둥 지역을 중심으로 서북한 지역까지 주로 분포하는 탁자식(북방식) 고인돌도 주목된다.
그리고 고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에서는 미송리형토기가 유행했다. 이 그릇은 비파형동검과 같은 시기(기원전 7~4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탁자식 고인돌이 집중해 있는 랴오허강 동쪽에서 대동강 일대에 걸쳐 고루 발견되어 고조선 시대의 이른 시기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쓴 질그릇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조선이 청동기문화 단계에는 만주의 랴오둥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비파형동검 우리의 옛땅 증명-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에 성립되어 철기문화가 보급되던 단계까지 계속 존속했던 나라였다. 초기에는 각 지역의 정치체들이 느슨한 연맹체로 있었지만, 후기에는 제법 강력한 지배체제를 갖춘 사회로 발전해갔다. 이때의 영토는 만주 랴오둥 지역을 일부 아우르면서 대개 한반도 서북지방을 그 중심 영역으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 고조선 사회와 관련해서는 세형동검이 주목된다. 세형동검은 몸체가 길고 뾰족한 단검으로 대부분 대동강 남쪽 통일거리에서 발견된 나무곽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서북한 지역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세형동검의 80% 이상이 평양 주변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 검을 사용하던 시기의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세형동검을 사용하던 시기는 기원전 4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또한 세형동검이 발견되는 지역은 청천강 이남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조선 역사복원 ‘고대사 열쇠’-
평양 지역에서는 고조선의 초기 문화유물인 미송리형토기나 비파형동검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비파형동검의 경우 평양 근처에서만 소수 발견되었고 대부분 랴오둥 지방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미송리형토기의 경우 역시 압록강 이남보다는 그 이북 지역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중국 문헌인 ‘위략(魏略)’에는 “연나라가 군대를 보내서 조선의 서방 영토 2,000리를 빼앗고 만번한(滿潘汗)으로 그 경계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역으로 해석하면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기 이전에는 고조선의 영토가 평양 부근뿐 아니라 서쪽으로 더 멀리 남만주 지역에 뻗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우리 땅에 처음 나타난 국가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출발 단계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고조선은 이후에 부여, 동옥저, 삼한을 비롯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에 이르기까지 우리 겨레가 세운 여러 나라의 생성과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만주 남쪽, 특히 랴오둥 지역과 서북한 지역에 펼쳐진 고조선 역사를 정확히 고증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고대사, 나아가 우리 역사 전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송호정 교수/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최초 고대국가 고조선 수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인가.
학계의 견해는 엇갈린다. 현재까지 제기된 고조선 수도 위치에 대해선 재평양설(在平壤說), 재랴오닝설(在遼寧說), 이동설(移動說) 등이 제기되어왔다.
‘평양설’론자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이 조선을 세우고 도읍한 곳이 평양성’이라는 기록을 중시한다. 이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또 이들 학자는 ‘사기’ 조선전에 보이는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검성’ 역시 평양이고 ‘패수’는 대동강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견해는 일제강점기에 평양 인근에서 낙랑 유적·유물이 발견되면서 힘을 얻게 됐다.
재랴오닝설은 민족주의 역사가 신채호가 제기한 이래 1990년대 초까지 북한 학계가 이를 주장했다. 이들은 위만이 건너왔다는 패수를 랴오시(遼西)의 대릉하로, 왕검성이 가까이 있었다는 열수(列水)를 랴오허(遼河)로 본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고조선의 수도를 랴오허의 동쪽인 가이핑(蓋平)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만주지역에서 비파형동검과 순장(殉葬)무덤이 대량 발굴되고 있는 점도 랴오닝 도읍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순장무덤으로는 라오닝성 다롄(大連)시의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이 꼽힌다.
그러나 평양설은 만주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랴오닝설은 대동강 유역의 낙랑 유물을 부정한 데다 문헌고증에서도 적잖은 무리를 범하고 있다. 북한학계는 최근 종래의 랴오닝설을 부정하고 평양도읍설로 돌아섰다.
도읍 이동설은 두 주장을 절충하며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학계의 주장이다. 이 설은 비파형청동과 세형동검의 시간적 차이를 주목하고 있다. 처음 랴오둥 일대에 광범한 비파형동검 문화를 건설하고 있던 고조선이 연나라의 동방진출로 위축되어 평양으로 중심지를 이동, 세형동검 문화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유물 해석에 비약과 무리가 없다는 점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
〈조운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