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밀양 손씨 시조

2009. 11. 10. 21:12대한민국 가문 탐구

손씨의 원조

 

손구례마 손씨초강사적(孫氏初降事蹟)

▲ 구미산 (옛날에는 이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옛날 진한(辰韓)땅에 육촌(六村)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세번째 기록에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이 있고

 

촌장(村長)에는 구례마(俱禮馬)로

처음 이산(伊山)에 내려와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祖)가 되었다고 한다.

즉, 손씨(孫氏)의 원조(元祖)가 된 것이다.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는

조선(朝鮮)백성이 동해빈(東海濱)에 사는데

육촌(六村)으로 나뉘어

진한의 육부(六部)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육부(六部)가 알천(閼川)에 모여 상의하여

임금이 없어서 백성(百姓)이 다 방종하고 무례하니 유덕한 사람을 군주로 선출키로 하고

 

박혁거세를 옹립하여 임금으로 모시고

서라벌에 도읍을 정하였다 했다.

이 때가 단기 2277년 (서기전 57년)이다.

 

그리고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신라유리왕(新羅儒理王) 9년 단기 2365년 (서기 32)에 육부명(六部名)을 고쳐서

대수부(大樹部)를 모량부(牟梁部)로 하고

성씨(姓氏)를 손씨(孫氏)로 사성하였다.

 

입덕묘(立德廟)

 

▲ 양산재 內 입덕묘

 

진한(辰韓) 6부촌장(六部村長)을 모신 재실로

제3대 유리왕(儒理王)에 의하여

손씨(孫氏)의 사성을 받으신 휘 구례마(俱禮馬)는 시호(諡號)는 충렬군(忠烈君)이요

후에 문의왕(文義王)에 추봉되었다.

 

신라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서기 1975년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大韓民國 朴正熙 大統領) 치하(治下)에 이르러

 

경주 남산(南山) 아래(下)에

입덕묘(立德廟)를 세워서

육부촌장(六部村長)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8월 17일을 기하여

향사(享祀)를 모시고 있으며

 

홍익문(弘益門)과 대덕문(大德門)이 있고

관리사무소까지 병설되어 있으며

광대(廣大)한 묘역(廟域)으로서

성지화(聖地化) 되고 있다.

 

 

시조 문효공(孫 順)

 

시조 문효공 사적(始祖 文孝公 事蹟)

 

▲ 문효공 묘소 전경

 

공(公)의 휘(諱)는 순(順)이요

자(字)는 사구(士久)이시니

신라(新羅) 모량부(牟梁部) 사람

태자사인(太子舍人) 휘 학산(鶴山)의 아드님이다.

 

그리고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白永)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취향산(醉香山) 밑에서 살으셨다.

 

일찍이 부친이 돌아가시고

가세(家勢)가 빈곤해지자

아내와 같이 품을 팔아서

어머님 운오(運烏)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어린아이가 하나 있어

노모(老母)에게 드리는 음식을

매번 빼앗아 먹으니(每奪母食) 매우 민망하였다.

 

이에 백씨부인(白氏夫人)에게 의논하여

아해(兒孩)를 땅에 묻어버리고

효도(孝道)의 본분(本分)을 다하고자 한다고 하니

부군(夫君)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아이를 업고

취향산 북쪽 기슭으로 가 땅을 파니

삽 끝에 옥석(玉石) 소리가 나서

 

공(公)이 이상히 여겨

주위를 두루 파니 둥근 옥돌이었다.

석종이다.

 

시험삼아 두드리니

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

 

처가 말하기를

“아이를 묻으려다 이것을 얻었으니

이것은 아들의 복이라 묻지 맙시다.” 했다.

 

공이 옳게 여겨

아이를 업고 종(鐘)을 가지고 귀가하여

대들보에 매달고 두드리니

왕궁(王宮)까지 종(鐘)소리가 들리었다.

 

왕(王)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서(西)쪽에 이상한 종(鐘)소리가 들리니

찾아 알아보라 하여

 

좌우(左右) 신하들이

집을 물어 찾아가 말하여

공(公)이 종(鐘)을 가지고 왕궁(王宮)으로 갔다.

 

왕이 내관(內官)에게

두드려보라 하고 이르기를

어떻게 이 석종(石鍾)을 얻게 되었는가? 하자

 

공(公)이 사유를 말한즉

왕이 말하기를

“기이(奇異)한 일이로다.

곽거는 아들을 묻으려다 금솥을 얻었다더니

손순은 석종을 얻었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하고 명하여

 

종은 악부(樂府)에 소장하고

집 한채와 세급미(歲給米) 50석을 주게 하고

또 높은 벼슬을 내렸다.

 

이 때가

통일신라(統一新羅) 흥덕왕(興德王) 10년

을묘(乙卯) 서기 835년이다.

 

그리고 후에

월성군(月城君)에 봉(封)하고

묘(墓)는 모량촌(牟梁村) 앞에 있다.

 

사람들이 이 묘를

효자릉(孝子陵)이라 한다.

 

문효사(文孝祠)와 시조 유허지(始祖遺墟地)

▲ 문효공 유허지 전경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慶州市 見谷面 小見里)

천년의 정취를 풍기는

울창한 고목(古木)들이 빼곡이 들어서

 

만고(萬古)의 효자

할아버지의 득석종(得石鐘)의 사실을

피부로 느끼며 참배하는

후손들의 할아버지에 대한 숭모(崇慕)의 정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문효사는

밀평경(密平慶) 3파의 자손들이

성금(誠金)을 모아 1997년 준공(竣工)하여

춘향제(春享祭:寒食日)에

전국에서 모여든 후손들이

향화(香火)를 올리고 있다.

출처 : 갈길이 멀다.
글쓴이 : 백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