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죽비] <2> 아산 정우 스님 - 양산 통도사 주지

2009. 10. 2. 14:25불교문자범자(梵字)연구

 맑고 따스한 마음 사람다운 모습 잃지 말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
 편안하고도 너그러우며 자연스럽게 나누는 삶
 우리 자신 안에 물들고 가족·이웃들에게 번져서 이 생을 알차게 가꾸길…

통도사 경관을 새롭게 가꾸는 데 노력하는 정우 주지스님. 강원태 기자 wkang@busanilbo.com

 

 출가하여 수행하는 스님은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다. 청정한 계행을 지니고 학업을 닦고 자신의 학업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널리 퍼뜨리며 도량(道場)을 잘 가꾸고 지키는 일이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평생을 방심하지 않고 실천에 전념한다.

 수행·전법·포교·가람수호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나날이 바쁜 스님이 있다. 통도사 주지 아산(芽山) 정우(頂宇·56) 스님. 스님은 통도사 서울포교당 구룡사를 비롯해 일산의 여래사와 인천의 보명사 등 국내 14개 포교당을 창건했으며 미국, 캐나다, 호주, 인도, 북인도히말라야 등 외국에도 절을 세웠다. 또한 유치원, 출판사, 극단 신시 뮤지컬 컴퍼니, 극장 신시 씨어터 그리고 진리의 전화, 결혼상담실, ㈜수미산여행사 등을 업무 분담시켜 운영하고 있다. 

 ● 10대 어린 나이에 발심하여 제 발로 출가하다

 1965년 10대의 어린 나이에 스님은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스님사회에서는 이를 전생의 인연이라 하지만 세간에서는 어린 나이의 출가가 잘 이해가 안 되기도 한다.

 "40년 넘게 절에 살고 있으나 그간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어른 스님의 큰 그늘에서 살아서 그런가 봅니다. 이제는 어른이 하셨던 것처럼 후학의 그늘이 되어주고 앞선 어른의 울타리가 되어 당신들의 업적을 조명하여 후대의 가르침으로 남기는 일이 나의 일인가 합니다."

 스님은 30대 중반 포교 일선에 나서서 20여년 동안 대중포교 현장을 열심히 누비다 본사(本寺)에 왔다고 한다. 

 
 ● 30년 전 열반하신 스승의 은혜 못 잊어

 자상하고 따뜻하신 성품으로, 세수 50도 안 돼 세연을 다 한 스승 홍법(弘法)스님의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스님. 은사의 이른 열반을 안타깝게 여긴 노스님 월하 스님의 보살핌과 이끌어주신 사랑에 젖어 큰 어려움 없이 절 생활을 지냈다고 한다. 그의 절집 형제들 모두가 지금은 주지로, 또한 선원, 강원의 어른으로 각자 소임을 충실히 해나가는 것, 모두가 스승의 은혜라고 한다.

 마치 부모를 일찍 여읜 자식을 웃어른들이 잘 이끌어주듯 스님도 은사의 도반과 어른들의 보살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 어렸을 때의 꿈은 운전사였다

 어린 시절 꿈이 자동차 운전사였던 스님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멀지 않은 절에 갔다. 그 절의 연혁을 들려주는 이야기에 마치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빨려들었다고 한다. 청년 스님 시절에는 청년회, 대학생회, 중·고등학생회를 이끌었고 군복무 때는 보병 26사단 사령부와 73연대에 군법당을 창건했다. 84년 조계종 총무원 교무국장, 조사국장을 역임한 스님은 그 해 미국에 가서 견문을 넓히려 마음먹었다.

 그러나 월하 노스님의 걱정이 커서 이를 접고 서울에 가서 구룡사 주지직을 맡았다. 이로부터 그의 대중포교활동은 그 영역을 크게 넓혀 갔다. 


 ● 의심이 되면 쓰지 말고 쓸 때는 의심하지 말라 (疑人莫用 用人莫疑)

 월하 스님이 붓으로 쓴 이 글을 스님은 주지실 벽에 걸어놓고 스스로를 경계 삼는다고 한다. 소임자로서 생명처럼 여기는 글귀라는 스님은 사람을 쓸 때는 먼저 이 글귀를 떠올린다고. 통도사 살림규모는 여간 큰 게 아니다. 업무를 분담하여 일을 처리해야하는 데 그 일을 맡을 사람을 정하기가 또한 쉽지 않다. 그래서 스님은 소임자를 결정할 때 이 글귀를 새삼 되새긴다고.

 자신이 주지직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주지를 맡기 위해 주지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통도사 대중을 외호(外護)하기 위해 주지직이 필요하고 그 일을 맡게 되었으니 오로지 직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해야할 일이 자신에게 주어졌으니 오로지 맡겨진 일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다. 


 ● 통도사가 달라졌다

 출입금지구역이던 사리탑을 개방하고 산중에 설치했던 철조망을 철거했다. 무분별하게 심은 나무들은 육림(育林) 차원에서 정비했다. 사찰과 어울리지 않는 나무, 조형적으로 눈에 선 나무들은 제거하고 오래된 소나무가 돋보이도록 주변 잡목은 베어냈다. 사계절의 변화를 나무를 통해 알 수 있도록 수종(樹種)을 잘 골라 적소에 심었다. 이팝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소나무가 잘 어울리고 습지엔 연꽃단지를 조성했다. 진달래, 철쭉, 라일락 그리고 숱한 야생화가 저마다의 때깔을 자랑하게 하여 절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편안하고 볼거리가 많은 쉼터가 되도록 했다.

 통도사는 각 암자로 가는 길이 순환도로로 툭 트여있고 곳곳이 자연친화적 수목으로 가꾸어졌다. 이 일을 그가 취임한 지 1년 새 했다. 

 
 ● 가까이 더 가까이!

 법회를 통해 절을 찾는 신도들에게 더 가까이 부처님께 다가가게 하고 관광객들에겐 자연에 더 가까이 가게 한다. 사람과 자연이 동화될 때 심성도 맑아지고 삶의 여유와 활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보이지 않게 드러나지 않게 주변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일도 많이 하고 있다.

 

  소년소녀 가장 돕기, 경로당 어르신에 대한 배려, 초·중·고등학생 학자금 지원, 초록돼지저금통 2만개에 동전 채우기를 비롯해 티베트 난민 돕기, 살인 누명을 쓰고 아랍에 납치된 네팔 여인 돕기 등을 펼치고 있다.

 서로가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나눔'을 행함으로써 맑고 밝고 따스함이 번져가지 않겠느냐고 한다. 


  ●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람답게살아가는 모습을 잃지말라는 것

 따뜻하고 편안하고 너그러움을 지닌 부처님처럼 되면 얼마나 좋은가. 나 자신부터 그리 되려고 노력하고 내 가족, 내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지니고 친절한 미소를 항상 머금고 있는 그런 모습.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우리가 지니고 가꾸어야 할 덕목이라 생각한다. 출가한 스님은 승가의 종지(宗旨)를 받들고 화합을 우선하며 모든 용물(用物)은 공유하고 지역사회와 어울리는 마음을 지녀야 하리라고 한다.

 그리함으로써 자신의 수행을 깊게 할 수 있고 그 수행력을 바탕으로 이웃과 사회, 국가를 위해 크게 이바지 하는 일을 펼치게 되리라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어떻게 그 숱한 일들을 해 낼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엔 스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일을 하려고 작심하면, 이 세상 한 생은 태어나지 않은 마음으로 그 일에 전념해 왔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고.



 ● 볼 것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견견지시 견비시견 (見見之時 見非是見)'이라는 말씀이 있다. 능엄경에 나오는 이 법문은 "볼 것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 말씀을 응용하면 "쓸 것을 쓰는 것은 쓰는 것이 아니다. 줄 것을 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갈 것을 가는 것은 가는 것이 아니다. 갈 때는 가고 올 때는 올 줄 알아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착한 일을 하고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된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 만일 내가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내게 다른 속셈이 있어 그럴 거라고 의심받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착한 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누군가 짊어지고 가야할 일이라면 그 짐을 스스럼없이 짊어지고 갈 수 있는 내가 돼야 하지 않겠는가. 

  이진두 객원기자 bibbab@paran.com

/ 입력시간: 2008. 04.12. 16:19


  ↓ 정우 스님은?

 1965년 통도사에서 홍법 스님을 은사로 출가. 해인사 승가대 대교과졸. 총무원 교무국장, 통도사 서울포교당 구룡사 주지. 조계종 9~12대 종회의원. 불교TV 사장, 미국 원각사 주지 역임. 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 만해사상실천선양회 포교부문 대상 수상. 현재는 사회복지법인 통도사 자비원 대표이사, 경남 전통사찰보존위원회 위원이다.


출처 : Marie의 문화세상(부산)
글쓴이 : Mari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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