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吳氏의 유래

2009. 7. 15. 15:46대한민국 가문 탐구

▶吳氏의 유래 및 비조(鼻祖) 오첨(吳瞻) 
 
 오씨 성의 기원은 고대 중국 양자강 부근 연릉 사람인 태백이 세운 吳나라에 부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손자 루양이 천자로 부터 오씨성을 하사 받고 오나라의 왕이 되어 이때부터 오씨가 생겼다.
우리나라 오씨의 비조는 태백왕의 25세인 오기(초나라 제상)의 45세인 첨公(武惠公)이, 지증왕 원년 500년에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와, 왕명으로 김종지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2남 1녀를 낳고 함양에서 21년을 살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때 두 아드님 중 둘째 응(應)이 어려서 따라가지 못하고 함양에 살았다. 公의 11세인 吳禧는 3남1녀를 두셨는데 따님께서 고려 태조비인 장화황후가 되고 禧는 國舅(국구)가 되어 다련군에 封君(태조4년 921年)되었으며, 장화황후의 아드님이 고려 제2대 임금인 혜종이시다. 다련군(오희)의 세 아드님인 相은 금성백, 桓은 수양백, 檢은 천령백에 봉해졌다.
18세인 문양공(오연총)께서 고려 예종때 원수 윤관과 더불어 부원수로써 여진을 정벌하였으며, 관직이 중서시랑평장사 이르렀고, 文武에 걸쳐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吳氏 가문을 가장 높여, 公(우측 문양공)을 중시조로 여겼고, 수양오씨라고도 하였다. 
 
▶보성오씨(寶城吳氏) 

 시조 오현필(吳賢弼)은 고려 고종 때 3년 거란군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보성군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보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보성은 전라남도 중남부에 위치한다. 본래 백제 땅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보성군으로 개칭하였다. 

 시조의 선대는 중국에서 신라 지증왕 때 우리나라에 건너 온 오첨이다. 오첨의 22대손 오수숙은 오현보. 오현좌. 오현필 등 세아들을 두었다.

 맏이 ▲오현보는 해주, 둘째 ▲오현좌는 동복, 셋째 ▲오현필은 보성으로 세 본관이 갈라진다.

 오현필의 손자 오한경은 첨의정사를 지냈다. 6세손 오사충은 공민왕 때 대사성을 지냈다. 조선이 개국되자 오사충은 개국공신이 되어 관찰사를 지냈다.

 오현필의 7세손 오천복이 문하시랑 평장사를 역임하고, 그 뒤 오천복의 아들 오점이 조선에서 예조판서를 지내면서 가문을 중흥시켰다.

 오몽을은 고려 말 대장군을 지내고 이성계를 추대하는데 공을 세워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의 일당으로 몰려 살해된다.

 오대남은 조선 시대 무과에 급제한 후 만호를 거쳐 고원 군수를 지내냈다. 그 당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에서 거란군에 항거하다 순절한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과 부용면 일대는 보성오씨의 텃밭이다. 1930년대에 충남 공주군. 보령군, 전북 김제시 일원에도 후손들이 많았다.  

 오씨는 해주오씨가 422,735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 보성오씨 59,914명, 동복오씨 55,517명, 함양오씨 26,339명, 나주오씨 25,546명, 군위오씨 22,408명, 고창오씨 16,716명 순이다.

 보성오씨의 주요파는 ▲종파 ▲감역공파 ▲풍창공파 ▲판관공파 ▲사직공파 ▲양무공파 등이다.
 
▶ 해주군 동복군 보성군을 설단하여 錦陽壇(금양단) 이라함.
1966年 三君의 묘가 실전한지 오래라, 후손된 자로 報本할 곳이 없어 恨이 되어 설단하여 享祀하고자, 여러 종친들이 힘을 모아 조상을 숭상하고 종친간의 화목함을 목적하여, 전남 곡성군 덕산사 문양공 享祀 때 논의가 되어, 三君 후손 대표로 해주군 후손(潤煥), 동복군 후손(영택), 보성군 후손(東植), 諸氏 등이 적극 추진하시어 三君을 설단하고 공주군 儒道會의 제의로 이름을 錦陽壇이라 하고, 매년 음력 3월 6일에 공주 儒道會가 參席하는 성대한 祭享을 지내고 있다.
[위치 : 충남 공주군 장기면 신관리산]
 

출처 : Doturak
글쓴이 : 상큼한~친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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