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1. 10:05ㆍ대한민국 가문 탐구
[강진의성씨]경주이씨(慶州李氏) | ||||||||||||||||||||||||||||||||||||||||||||||||||||||||||||
후손들 칠량.대구면 구곡마을등에 집단 세거 | ||||||||||||||||||||||||||||||||||||||||||||||||||||||||||||
경주이씨는 고려말 익재 이제현을 배출하면서 삼한의 명족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고려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 이제현(1287~1367)은 고려 때의 경주 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70여개의 소파로 분류됐으나 상서공파의 백사 이항복과 익재공파의 익재 이제현, 이완대장이 포함된 국당공파가 크게 융성하게된다. 관내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경주이씨는 익재공파에 해당한다. 이제현의 후손으로는 8문장을 꼽을 수 있다. 이제현의 7대손 이공린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의 사위였다. 이공린은 오, 구, 원, 타, 별, 벽, 경, 곤 8명의 아들을 두었고 아들들은 모두 글솜씨가 뛰어나 8문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응경은 후에 3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낳게된다. 장남 효당은 약량(현재 경남 함양)군수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도암면 월하리일대에 생활하고 있고 둘째 효강은 생원시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후손들이 칠량면, 강진읍에서 살고있다. 또한 셋째 효안은 가풍을 이어받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선비로 생활했으며 대구면 구곡마을에 후손들이 집단세거하게 된다.
당시의 경주이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엿볼 수 있는 한대목이다. 그 옆으로는 응경의 선조인 오, 해, 사권이 단비의 형태로 모셔져있다. 후손들이 조상들의 묘소를 찾지못해 단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추모재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5일 문중 종친회원들이 모여 행사를 갖고 있다.
대구면 구수리에는 익재서원과 구곡사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는 매년 유림들이 직접 찾아 봄, 가을 제사를 지내며 선조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원래 구곡사는 군동면 금곡사에 설치돼 있었으나 후손들이 100여년전 대구면 구곡마을로 옮겨온 것이다.
구곡사는 익재 이제현과 백사 이항복의 영정을 모셔 제사를 지내 온 사당이다. 구곡사에는 이제현과 이항복의 초상화가 놓여있고 두점의 초상화는 원본을 보고 다시 그린 모사본(1870년 도화서 화원인 조중묵에게 의뢰하여 제작)이지만 한국 초상화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00여년을 넘긴 세월이 더해지면서 이제현과 이항복의 초상화는 유형문화재 189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경주이씨는 지난해 전남도단위로 종친회의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다. 관내에 남아있는 종친들의 숫자는 크게 줄어들었지만 종친회를 통한 활발한 활동이 기대되고 있다.
인터뷰-이준진씨
이씨는 “처음 문중에 대한 관심 때문에 문임을 맡게됐는데 벌써 십여년을 훌쩍 넘겼다”며 “문임을 맡은 기간은 낯설던 조상들이나 문중에 대한 공부하는 시간이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씨는 “아직도 문중 어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며 “후손들이 많은 관심을 갖도록 책임감을 가지고 문임에 임할것”이라고 말했다.
|
'대한민국 가문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실학자 이규준 선생 한의학 업적 100년만에 조명 (0) | 2009.07.11 |
---|---|
[스크랩] 경주이씨충청북도청년화수회 분기총회 (0) | 2009.07.11 |
[스크랩] 경주 이씨의 근원지인 표암을 찾아서 (0) | 2009.07.11 |
허준,허임,이제마,이규준 사부님들과 한의학 (0) | 2009.07.11 |
[스크랩] 허임(許任)의 생애와 활동 (0) | 2009.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