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허임(許任)의 생애와 활동

2009. 7. 11. 09:45대한민국 가문 탐구

1616년(광해군 8) 1월 23일 광해군은 허임을 영평현령(永平縣令)으로, 남영을 음죽현감(陰竹縣監)으로 삼았다. 영평현은 경기도 포천시 영중(永中)•일동(一東)•이동과 영북면(永北面)지역을 관할한 행정구역이다. 음죽현은 경기도 이천시의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서울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배치를 해 둔 것이다. 이번 임명은 큰 반대 없이 이행이 됐다.
광해군은 1616년(광해군 8) 9월에도 여러 번 침을 맞았다. 그리고 9월 13일 침의(針醫) 안언길(安彦吉)과 백학기(白鶴起) 등에게 수고한 대가를 지급하라며 챙긴다. 광해군은 11월 27일에는 침의 허임•유대명•김귀상에게, 12월 9일에는 침의 안언길에게 침 맞을 때 입시한 대가를 하사한다. 광해군은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침을 맞고 있었다.
이 당시 정국은 권력다툼으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도제조는 이이첨이었다. 이이첨은 대북파의 핵심으로 정인홍과 함께 광해군 당시 권력을 주물럭거린 자이다.
이런 중에 광해군은 1617년 2월 12일 허임을 영평형령에서 다시 양주목사로 승진 발령했다. 그러나 이 발령은 사헌부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 때 사헌부에서는 “허임(許任)은 아비는 관노(官奴)이고 어미는 사비(私婢)로, 비천한 자 중에서도 더욱 비천한 자입니다.”라며 그의 출신성분을 들고 나온다. 양주는 서울의 북쪽 길목으로 지역이 넓고 사람 이 많은 요지였다. 이곳 수령을 허임에게 임명하니 사대부 관료들의 반대는 집요했다. 한 달 가까이 거의 매일같이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번갈아가며 집요하게 반대를 하자, 3월 9일 양주목사 허임(許任)과 부평부사 이익빈(李翼賓)을 서로 바꾸는 선에서 타협을 했다.
광해군은 서울 인근에 유능한 침의들을 수령으로 배치해 놓고 필요할 때 불러서 침을 놓도록 했다. 1617년(광해군 9) 6월 6일 허임과 유대명을 불러서 손에 난 종기를 치료했다. 6월 21일 치료를 마치고 허임은 광해군에게 하직을 하고 임지인 부평으로 돌아가는 기록이 있다. 사관은 이때의 『광해군일기』를 쓰면서 “허임이 악공 허억복(許億福)의 아들인데 침술이 뛰어나 임금의 총애로 2품의 관직까지 올라갔다”며 좋지 않은 논조로 언급하고 있다. 11월 10일의 『광해군일기』에서도 사관은 “허임과 유대명은 다 얼자(孼子)인데 침놓는 재간이 있었으므로 총애를 받아 특별히 기읍(畿邑)의 수령에 제수된 것이다.”라며 비아냥거린다.
광해군은 1617년 여름부터 안질을 앓기 시작해 수년 동안 시달린다. 9월 9일부터 안질 때문에 침을 세 번 맞고 중지하였다가, 11월 10일 부평부사 허임과 금천현감 유대명을 올려 보내도록 하여 12일부터 이틀간격으로 침을 맞았다. 그러나 잘 낫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해인 1618년 1월 14일 광해군은 “내가 지난해 여름과 가을 무렵부터 우연히 안질(眼疾)을 앓게 되었는데, 침(針)과 약을 쓴 것이 며칠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밝히고 “어떤 때는 좀 나은 듯하다가도 더 심해지곤 하면서 지금까지 질질 끌고 있는 상태”라며 고충을 이야기 한다.
이렇게 안질로 인하여 정사를 제대로 보기 어려운 사정은 오래 지속되었다. 안질로 침 맞는 기록이 전해 1617년 9월부터 이듬해 윤 4월까지 무려 8개월 이상 이어진다. 이때는 폐모론을 둘러싸고 각 정파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 가는 정국이었다.
이런 중에도 1619년(광해군 11) 9월 10일 “침의(針醫) 전징(全澄)과 이제인(李濟仁)을 실직에 제수하고 배이룡(裵以龍)은 전에 내린 전교를 자세히 상고하여 이번 정사에서 실직에 제수하라.”라 침의들을 챙긴다. 12월 13일에는 시약청 관계자 전원에게 상을 내린다. 광해군은 이날 “부평부사(富平府使) 허임(許任)은 위에서 편찮으실 때 여러 해 입시하여 침을 놓은 공이 있는 사람이다. 지금 들으니, 노모를 모시고 있는데 병세가 중하다고 하니, 자급을 더해 주도록 하라.”며 특별히 전교했다. 허임이 노모를 모시고 부평부사를 하고 있는데, 노모의 병세가 중하다는 이야기다. 1622년(광해군 14) 4월 6일에 광해군은 허임을 남양부사에 특별히 제수했다. 이때 또 광해군 일기를 쓴 사관은 허임이 악공 허억봉의 아들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광해군 집권 말기. 1623년 들어서 이귀 등 인조반정세력이 한창 거사를 준비하고 있던 1월 20일 광해군은 침의 유대명까지 불러올렸다. 그리고 침을 맞았다. 그랬는데 2월 19일 어의 조흥남 등 의관들에게 일제히 죄를 물었다. 내의원에서 문안을 올리던 때 하교한 일을 발설했다는 이유였다. 광해군은 이때 대단히 화가 났던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와서 문안하지 말고 나의 병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침과 약을 모두 정지하도록 하라”고 하고, “허임(許任)•안언길(安彦吉) 등은 즉시 모두 내려가도록 하라.”했다. 그리고 “어의 조흥남(趙興男)•신득일(申得一), 침의 허임•유대명(柳大鳴)•유계룡(柳季龍)•안언길 등은 마땅히 잡아다 추국해야 할 것이나 내가 현재 조섭중에 있으니 지금 우선 추고만 하고 녹 일등(一等)을 감봉하도록 하라.”며 징계조치를 내린다.
그러나 광해군의 병증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3월 9일 다시 침을 맞으려고 했다. 하지만 3월 12일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다. 결국 곧 붙잡혀 귀양가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허임은 그 때 남양부사로 임지에 가 있었다.

 

7.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의 저술
당시 침구의원들의 쓰임새는 다양했다. 옥에 갇혀있는 자에게도 침의를 보내 치료하게 했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구료에도 침의가 배치되었다. 사대부들도 몸이 아파 침을 맞는 경우가 잦아졌다. 『선조실록』에는 사대부들이 침을 맞는다는 기록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임금이 직접 침의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허임도 왕의 명으로 고위관료의 침구치료에 자주 파견되었다. 선조시절 이수록(李綏祿)이 위급한 병에 걸려 집으로 가 있어서 선조가 내의원에서 약물도 만들어 보내고, 침의인 김영국과 허임을 파견해서 번갈아가며 살피고 구완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선조와 광해군 시기의 고관이었던 심희수가 침을 맞았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광해군 1년(1609) 8월 16일 우의정을 있는 심희수가 또 침을 맞기 위해 휴가중이라는 기록이 발견된다. 열흘 후에 심희수가 광해군 앞에서 자신이 아파서 침을 맞은 경위를 소상히 설명한다. 이 때 심희수는 침의 허임과 유의(儒醫) 박지수에게 침을 맞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허임은 임금의 명을 받거나 혹은 관료들에게 직접 불려가서 환자에게 침을 놓았다. 이런 중에 허임은 노년에 『침구경험방』의 발문을 쓴 이경석이 불러 그의 집에 있는 환자에게 침을 놓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던 듯, 허임에게서 침을 맞은 뒤 회복되는듯하다가 얼마 안가서 사망을 했다. 이 기록은 이경석의 아버지인 이유간의 우곡일기 1618년(광해군 10) 4월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석(이경석)이 허임을 찾아가 와서 침을 놓기를 청했다. 넓적다리에서 피고름이 거의 3-4사발이나 뽑아냈다. 지난해 10월에 시작된 극심한 통증이 이미 종기가 되는 징후였는데 서울로 올라 온 후 여러 의자(醫者)들이 와서 보고도 모두 종기를 알지 못했는데 허임만이 혼자 알았다. 과연 이름을 헛되게 얻은 것이 아니다….


이경석의 아버지도 허임의 명성이 대단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허임을 부르러 갔던 이경석은 곧 있을 인조반정의 핵심 세력이 된다. 나중에 『침구경험방』의 발문을 쓴 이경석은 정쟁의 와중에서도 허임과 꾸준히 교류를 했던 모양이다. 허임의 인조 때 기록은 승정원일기에서 발견된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이 임명한 사람들을 관직에서 내쫓기 시작했다. 경기감사는 3월 24일 침의 중에서 금천현관을 하고 있던 안언길을 쫓아내라고 계를 올린다. 그리고 26일 경기감사는 남양부사 허임도 쫓아내라고 인조에게 청한다.
승정원일기에서 허임에 관한 기록은 그 후 인조 6년에 등장한다. 1628년(인조 6) 4월 14일 내의원 관원에게 시상을 하라고 인조가 전교한다. 이때는 허임의 이름이 침의 중에서 제일 앞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어의 신득일•이영남, 의약상참 이유응•민강, 침의 허임•배룡•정대붕•박태원이 각 반숙마 1필씩”을 상으로 받는다. 그리고 9월 2일 허임이 이유성과 함께 인조에게 침을 놓기 위해 대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모습은 같은 해 9월 3일자 응천일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인조는 1628년(인조 6) 8월 26일 27일, 9월 2•6•8•10일 등 줄곧 침을 맞았다. 이때는 허임이 입시했다. 다음달 10월 22일 인조는 침놓을 때 참여한 내의원 관원과 의원들에게 상금을 내린다. 관련 기록이 인조실록에도 나타난다. 승정원일기에는 상을 받은 의관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때 훗날 내의원 도제조로서 이경석과 더불어 허임의 『침구경험방』 간행을 도운 김류(金 )도 호피(虎皮) 1필을 상으로 받았다. 이경석도 이때 조정에서 중책을 맞고 있었다.
침의 정대붕과 안효남은 어의 신득일과 나란히 반숙마 한필을 하사받았다. 그런데 허임은 중급 정도의 표피 1령만을 받는다. 그리고 순서도 이영남•이희헌•이락 다음에 허임이 기록되어 있다. 침의 중에서 거의 마지막 순서로 이름이 쓰여 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허임의 서열이 밀려난 것이다. 그 후 허임은 승정일기에도 10여 년 동안 나타나지 않는다.
1639년(인조 17) 8월 12일 승정원일기에 허임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임금이 식은땀을 흘리는데 낮지를 않자 내의원 도제조 최명길이 “허임이 청한을 치료한 적이 있다고 한다.”며 허임을 소개했다. 그가 “허임의 의술이 지금의 의원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면서, 허임이 늙어서 말을 타고 와서 침을 놓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그러자 인조는 “병세를 써가지고 가서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내놓는다.
그로부터 6일 후인 8월 18일 허임으로부터 임금의 병에 대한 침구처방이 도착했다. 허임의 침구처방을 받아오자고 의논한 날로부터 6일 뒤이다. 충청도 공주는 당시 서울에서 말을 타고 6일 정도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허임은 늦어도 1628년(인조 6) 이후부터는 공주로 삶의 터전을 완전히 옮긴 것으로 보인다. 허임이 공주에 살고 있었지만 그의 침구진료 소식은 서울의 내의원 도제조도 알고 있을 정도로 주목되고 있었다.
인조의 청한 증세에 대해 허임이 보낸 처방은 손에 침혈 각 네 곳, 등에 뜸혈 두 곳, 장부에 침혈 중완 한 곳. 그러나 이에 대해 침의 이형익과 반충익 등 당시 의원들은 이것을 동시에 놓을 수 없으므로 주의하고 중완 한곳의 혈만 놓는다.

허임이라는 이름이 다시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때는 1641년 5월 19일. 내의원이 임금에게 보고하는 내용 중에서 “공주에 사는 최우량이 허임에게서 침을 배웠는데 그 의술이 매우 뛰어났다.”는 기록이다. 최우량은 공주에 사는 벼슬을 하지 않은 유생이었다. 허임에게서 침을 배운 그가 일이 있어 서울에 왔다가 재신 중에서 창증이 심한 사람이 있어 침을 놓자 곧바로 효과가 있었다는 것.
최우량은 바로 다음날인 5월 20일 오위(五衛)에 속한 종9품의 무관직(武官職)인 부사용(副司勇)의 관직에 제수됐다. 그 후 최우량은 내의원 침의로 활동하는 기록이 이어진다. 최우량에 대해서는 효종 때인 1656년(효종 7) 7월 14일에도 부사용으로 다시 관직이 제수되는 기록이 있고, 1658년(효종 9) 7월 27일 경외(京外)의 침과 약에 뛰어난 사람들을 초치(招致)하는 문제에 대한 내의원 도제조의 계에도 여러 침의들의 이름과 함께 거명된다. 최우량은 산림경제에도 침의(鍼醫)로 거론하는 대목이 있다.
최우량의 본관은 강화인데, 이들 강화최씨의 족보에는 벼슬이 부사과(副司果, 종6품)에 이른 것으로 로 기록되어 있다. 최우량(1599년~1671년)에 대해 강화최씨 족보를 살펴보면 바로 허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공주 우성면 내산리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곳 내산리에는 400여년 내려온 동계(洞契)가 있다. 내산리 일대를 ‘뜸밭’이라 불리는 지명을 딴 부전대동계(浮田大洞契)의 좌목(座目)에도 허임에게 침술을 배운 최우량이 등장한다. 부전대동계에는 19세기 중반까지 허임의 후손 총 28명과 최우량의 후손 강화최씨 16명의 기록도 있다. 그리고 바로 허임의 장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는 하양허씨 종손가의 바로 뒷산에 최우량의 묘소가 있다.
허임은 노년에 바로 이곳 공주 우성면 내산리에 살면서 병자들을 진료하며 후학들에게 침술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허임의 후대 종손가가 살아오던 공주군 우성면 내산리 352번지. 부전골의 가운데에 위치한 허임의 집은 무성산이 병풍처럼 배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허임은 그곳에서 평생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한 『침구경험방』을 집필, 1644년(인조 22년) 당시 내의원 도제도 김류, 춘추관사 이경석, 호남관찰사 목성선의 도움을 받아 판본으로 간행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허임의 원래 묘소는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였다. 허임의 묘는 1982년에 부모 묘와 아들 묘가 있는 공주군 우성면 한천리 무성산으로 이장되었다. 묘를 이장할 때 관 앞에서 조선백자 접시가 나왔다고 한다. 묘지 땅 속의 표석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허임은 조선실록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이 여러 군데 묘사되어 있다. 허임의 아버지 묘와 어마니 묘는 공주군 장기면 한천리의 무성산 한켠에 위아래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허임은 불천지위로 모셔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는 그를 기리기 위하여 4대까지만 제사를 지낼 것이 아니라 영구히 제사를 지내도 좋다고 나라에서 허락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 신위가 ‘불천지위’(不遷之位)이다. 20세기 초반까지는 허임의 불천지위가 공주 허임후손의 종손가 바로 옆 내산리 353번지에 모셔져 있었다는 것이 후손 허은씨(우성면 내산리)의 증언이다.
8. 맺 음 말
허임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양반사대부가의 문집에 나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기록들에서는 왕실과 조정 그리고 사대부가와 관련된 일화가 주종을 이룰 수밖에 없다. 일반 가난한 백성들을 진료한 활동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기록만을 가지고 허임의 생애를 조명해 내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다. 허임이 백성들을 구료한 활동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는 『침구경험방』에서 광범하게 찾을 수 있다.
『침구경험방』은 침구이론을 요약하고, 질병별 침뜸치료에 대한 허임자신의 임상경험을 최대한 간결하게 서술하려고 했다. 모두 52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병기, 경혈, 경락, 침구이론(보사법, 금기, 취혈법등), 병증별 침구처방, 침구기법과 시술경험에 대한 언급 등 침구 전반에 걸친 내용을 두루 갖춘 침구의서이다. 각론에서는 신체 부위별, 내과•외과•전염병•부인병•어린이병 등 계통별로 나누어 분석•정리하였다. 의약에 관한 단어 중 몇 군데는 한글을 덧붙여 이해를 쉽게 하도록 돕고 있다. 주로 허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편술한 것이고, 뜸을 이용한 치료법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특히 병증별 침구치료는 허임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총 43개의 병증문과 그 아래 443개의 작은 항목은 자신이 임상에서 경험했던 환자의 병증이다. 이 항목은 그가 평생 진료한 기록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고, 곧 침구의원으로서 그의 인생이다.
침뜸전성시대의 침구술 발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허임의 침구법이고, 그 이후의 침구술을 선도 해 나간 책이 허임의 『침구경험방』이다. 이경석은 『침구경험방』의 발문에서 “지금 나라의 재상인 북저 김류가 내국의 도제조를 맡고 있고, 내가 마침 그 아래 있어 이 경험방을 호남관찰사 목성선공에게 부탁하여 간행하게 하였으니, 임금님께서 만백성을 건강하게 살도록 하려는 뜻을 받든 것이다. 훗날 이런 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라며 당시 영의정의 명으로 관찰사까지 동원하여 『침구경험방』을 펴낸다고 밝히고 있다.
허임은 『침구경험방』 서문에서 “이제는 늙어서 그나마 올바른 법이 전해지지 못할까 근심하고 있다.”며 자신이 세상을 하직한 이후의 환자들 까지도 걱정한다. 그리고 “읽는 사람들이 궁리해서 구급활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라며 자신의 평생에 걸친 임상경험을 후대 사람들도 널리 활용하기를 기대했다.

 

침술연합신문 (기사입력: 2007/11/16 15:03)

출처 : ♧열.린.나.무♧
글쓴이 : 열린나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