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때문에

2008. 11. 1. 13:28세계정음 수필.

사랑하기 때문에

 

 

911.

 

공포의 날짜이고, 서구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극적인 충돌이었다.

작가는 이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이 소설 속 날짜에 그 세기적 사건을 담담히 적어 두고 있을 뿐이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8시 46분이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의 북쪽 타워를 들이받으면서 뉴욕은

모든 지표와 확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바람 스치듯 언급한 부분인데, 소설의 각 구성 주인공들이 이 날짜를 중심으로 삶의 고통을 보여줌으로서 911, 그 우울하고 지독한 고통을 대신하고 있다.

 

두 대의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을 들이 받고 그 뼈대를 그라운드 제로에 묻은 후, 2002년 3월 26일. 바이올리니스트 니콜 코플랜드와 정신과 의사인 마크 해서웨이의 딸인 5세 영아 라일라 해서웨이가 실종된다.

 

이것은 911의 문명 충돌 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현대문명의 기이한 모습을 대신해서 교통사고로 딸아이를 잃은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로 소설을 꾸려나간다.

 

특히 친딸이 아닌 라일라를 찾아 정신과 의사에서 노숙자로 변한 마크에게서 피로 이어지는 친족 개념을 강력하게 가진 동양 문화의 사람에게는 낯선 모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슴 한가득 부정(父情)이란 따뜻한 사랑의 등불을 안고 있는 마크가 존경스럽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마음을 다친, 심지어 복수심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들이 줄거리를 이어 나간다. 라일라를 잃고, 마크도 떠나간 뒤 바이올린 연주에 몰두하는 니콜, 시카고 교외에 있는 빈민가 학교의 마크 학급 친구이었다가 갱들에 의해 끔찍한 화상을 입고 복수심으로 그들을 불 태워 버린 후 최면의학자로 거듭 난 커너, 간이식 수술을 기다리던 엄마가 크레이그 데이비스라는 비열한 의사에 의해 음주를 했다고 모함을 당하고 사망한 뒤 이를 복수하기 위해 배회하는 가엾은 영혼 에비, 부잣집 상속녀로서 음주운전, 남자 친구들과의 관계, 상상 이상의 병적 소비 심리를 가지고서 결국 천둥번개 치며 비오는 날 라일라를 차에 치어 죽게 하고 아버지인 리처드 해리슨이 시체를 유기하도록 한 앨리슨.

 

 

 

 

이 주인공들 중 마크, 라일라, 에비, 앨리슨이 오늘, 2007년 3월 25일 오전 8시,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나타난다. 여기서 오늘은 바로 체면 상태에 들어간 시점을 나타내는데, 현실이 곧 한바탕 꿈이라는 불교의 현세관과 맞닿아있다. 이렇게 체면 상태로 이끈 사람은 커너인데, 라일라의 죽음을 바로 알리면 마크가 큰 충격을 받을까 염려해서 완충 작용으로 체면 요법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타게 되는 비행기회사 이름은 샹그릴라 에어라인으로 샹그릴라는 티벳 불교에 전승되어 오는 신비의 도시 샴바라에서 기원한다. 히말라야에 있다는 평화롭고 이상적인 이 도시는 불교의 불국토이고, 기독교의 천국이고, 동양의 무릉도원인 것이다. 작가가 바라는 이 지구나 가정의 모습은 바로 이 샹그릴라와 같은 평화로운 곳이다. 그런데 이 체면 상태는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데, 비행기는 추락한다. 마크는 라일라의 죽음을 인지한다.

 

 

이후 에필로그에서 주인공들은 인과에서 벗어난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어린왕자라는 소설에는 그림이 들어와 있다. 이 소설에도 그림이 들어 와 있는데, 라일라 탄생을 알리는 엽서 그림, 패스워드로 구성된 니콜의 얼굴, 불교에서 윤회와 업을 상징하는 4개의 법륜(法輪)이다. 라일라 탄생을 알리는 엽서는 생명의 소중함을 나타내고, 패스워드로 구성된 니콜의 얼굴은 여러 심리를 가진 여성상에 대한 고찰과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모습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패스워드는 '서로 사랑할 때는 결코 밤이 찾아오지 않는다.'의 각 단어 첫 글자와 마크와 니콜이 처음 만난 날짜이다. 패스워드의 통과는 성공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느낌과 그 시간이 열쇠인 것이다. 그리고 윤회를 의미하는 또 다른 장치로 숫자가 있다. 소설 속 필요한 곳에는 철두철미하게 연도,  월, 일, 시간이 들어가 있다. 이는 윤회와 업보의 지엄한 법칙을 표현하고자 하는 장치이다. 이 인과응보의 우주 법칙을 빠져나오는 치료제로서 체면요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곧 사랑 요법인 것이다.

 

 

2008년 10월 16일, 9시 51분.

이제 작가의 물음에 답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날 아침,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2001년 9월 11일. >

 

 

나는 부산 감만동 큰댁에서 나를 사랑한 할아버지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