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24. 09:31ㆍ명도전 문자 연구
고대중국 미개인화폐 패화 - 1
원시 사회의 고대중국은 실물에의한 거래 즉 물물교환이 최초로 행해지고 있었던
형태 였습니다.
점차 시대가 진행되면서 부터 희소한 물건을 거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부터 서서히 빈부의 차이가 나타나서 가진자의 힘의 논리에 의한 그 집단의
지배자가 탄생 하게 되었습니다.
지배자는, 보다 희소한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재산관리를 해야 했으며, 언제까지나 자기의 영향력을 유지 하기 위해서 자기 재산을 통한 힘을 길러야 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옥 에 가치를 부여 하였는데, 양질의 옥은 매우 귀하여 일반 서민들은
소유 하기가 힘든 보물이었습니다, 주로 지배자 계층 에서 사용될 뿐 이었으며 .옥의
가치는 현대의 금이나 은보다도 더 큰 가치를 부여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비교적 내륙부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던 사정으로 인하여, 바다의
조개가 화페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고대인 에게 유통된 자패는 그시대 사람들의 재산의 기준이 패화라는데 주목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조개가 어떻게 고대 중국의 「지배자」들 에게 전해졌는가 하는 유래는 현재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대 문헌에 나타난, 「조개」가 포함되어 있는 「한자」에, 재산, 보(보) 물을 나타내는 의미에 많이 사용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조개」가 특별한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던 중국 고대인들의 재산형태가 조개의가치로 시작 된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패화는 자손 번영의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 했으며 매우 진귀 했다고 합니다. 패화는 현재의 홍콩 이남에서 베트남까지의 해안에서 구할수 있는 것 이지만, 당시의 중국에서는 영향력이미치지 않은 미개의 땅이었기 때문에 패화의 희소성을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매우 귀중한 자패의 딱딱한 껍질과, 조개안의 육질을 없애는데는 특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비교적 크기가 일정하게 갖추어져 있는 조개껍질을 구슬에 꿰어서 보관 하고 자패를 물건 매매에 사용한것 같습니다
상(은나라) 시대의 능묘로부터 천연조개가 매장자의 주위로부터 다량으로 발견되는 것은
흔히 볼수 있는 광경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조개」에 대해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던
그들의 생각을 고증 할수있는 고고학적인 자료입니다.
또, 윈난성의 산간부에서는 명대까지 「조개」가 화폐로서 이용되고 있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조개」는 이윽고 자연의 것으로부터 「조개를 흉내내 만들어진 동제품」으로 변화하며,
동제품에 변화하는 것에 의해, 대량으로 「조개」를 늘리는 것이 가능해 졌습니다.
상공업의 발전과 함께 「조개」의 절대량이 필요했었던 고대의 시장경제 논리가 대량생산의 큰 요인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유통의 확대에 의해 패화의 공급이 부족하게 되면서 부터 담수조개나 동물의 뼈, 돌을 가공해 유통 시켰으며 한동안「조개」라고 하는 가치는, 동금속의 가치와 함께, 실질적인 통화(현물 화폐)로서 유통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역이나 상공업의 발달에 의해, 나라의 중앙보다 지방의 힘이 강해지는 것과 동시에, 각지방 마다의 경제 격차가 생겨서 이윽고 각지의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력은 제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땅을 나라라고 주장을 했었습니다. 그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가 되었을때는 서로 패권을 가지고 싸우는 형태가 되었으며,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가 시작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지방이 「나라」라고 선언해서 그 영향력을 가지는 것처럼 인식되면서 부터 그들은 각자 독자적으로 「조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중앙정부의 「조개」는
급속히 그 영향력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각국의 「조개」는, 독자성을 갖게하는 것을 기본으로, 타국가와 차별화를 꾀하고
있었습니다. 그 독창성은 실제로 사용되고 있던 도구나 공구를, 그대로 화폐의 대체로서
거래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대중국의 칭량화폐 금속떡 - 2
고대중국에서는, 상(은나라) 시대의 말기가 되면서 칭량화패인 청동덩어리 즉 떡처럼
생겼다고 해서, '청동떡'이라고 하며 청동의 파편 등이 실질적인 화폐로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화폐는 춘추시대 말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춘추시대 중기에는, 금.은의 칭량화폐가 등장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칭량화폐에는,
금, 은, 청동의 3종류가 있었으며,
은의 칭량화폐는 은으로된 은판, 은떡, 은으로 만든 패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황금의 칭량화폐에도 금판, 금패떡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형태에 근거하는 호칭입니다만, 크기는 매우 적고 귀중 했습니다.
금떡 , 은떡 , 청동떡은 우리나라의 절편위에 문양을 찍은것과 비슷한 것으로
금속판에 문양이 찍혀진 형태 였습니다. 청동떡의 경우 유통시 신뢰성이 있었으며,
청동덩어리 청동떡쇄가 있던 덩어리(파편)의 화폐는 판매의 상거래 목적으로 유통
되었습니다.
금패 , 은패는 미개인이 쓰던 패각 화폐 를 모방해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화폐는, 형태, 중량, 성분, 액면 가치가 일정 하지는 않았습니다,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때에는 성분의 분석과 무개를 재면서 사용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칭량화폐로 불리고 있는 또 다른 대용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원래, 물건의 거래에 이용된 목축, 식료품, 천 등이었는데 개별의 가치가 작고,
실제의 거래에서는 다량이 필요해서, 휴대나 저장이 매우 불편 했습니다.
거기서 등장했던 것이 일반 등가물로서의 금속이었습니다.
금, 은등의 귀금속은, 양이 작아도 가치는 크고, 재질이 안정되어 있었으며 견고하고
파손 하기 어렵고, 내구성이 뛰어나 수시로 분할, 합병이 쉬웠습니다. 또 다른 용도에도
적용이 가능 하였고, 빛나는 금속이 가지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감도를 주었으며,특히,
휴대나 저장이 뛰어난 것이, 큰 장점으로 인식되어 화폐로 사용되었습니다.
어폐 - 3
고대 중국은 광활하고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닷가에서 육지로 어류를 운송
하는데 어려움을 격었습니다.
중국 내륙지방까지 도착하는 과정에서 생선의 신선도가 떨어지다 보니까 고대 중국인들은 일단 건조시키거나 기름에 튀겨서 먹는 풍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륙 여러지방 에서는
바다생선 구하기가 사실상 힘들어서 생선이나 건어류가 값진 상품으로서 통용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선은 귀한 선물이나 지불수단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귀한 물건모양을 본따서 화폐로 만드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사회관습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생선형태의 청동화폐를 만들고 사용하였습니다.
그 청동화폐를 어폐라고 칭했으며 지역에 따라 어폐의 크기는 각양각색으로
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나라에서 주조한것으로 구전으로 내려 오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에서
주조 되었는지 문헌을 알수없으며
청동으로만 주조 되었고 실물가치를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폐의 머리부분에 구멍을 내어 실로 꿰어 보관및 휴대를 하였으며
부장품에도 사용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고고학자들의 견해는 어폐가 화폐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부장품으로
사용될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어페가 가지고 있는 중국인들의 디자인 감각은 높이 평가 할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당시 실생활에 사용되고 있었던 어폐는 긴밀한 고대 중국인들의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폐.용폐 - 4
경페를 만든 주(周) 왕조는 BC 1122~BC 256년까지 존재하였던 중국의 고대 왕조입니다.
덕치를 강조하는 천명사상과 가족제도 및 제례의식을 중시하는 예 사상을 중심으로
요순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의 치세라 불렸습니다.
주의 청동기문화나 상형문자는 은에서 발달한 것을 이어받은 것이 명백하다고 합니다.
대체로 주의 문화는 은의 문화에 힘입은 바가 많았으며.푸른옥과 의식을 치를때 사용된
경이라는 악기의 연주인 예악을 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귀한 물건모양을 본따서 화폐로 만드는 중국인의 전통에 따라 주왕조는 청동으로
제례악기인 경의 모양을 본따 화폐를 만들어 사용 하였다고 합니다.
이 악기는 서로 다른 크기의 청동 조각을 달아 놓고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것으로서 경의
한 형태를 모티브 해서
만들었습니다. 경의 형태를 모티브한 화폐는 두가지가 주로 발견 되고 있는데 경폐의 초기 단계로 보이는 용폐라고 불리는 화폐와 경의형태인 경패가 밣견되고 있습니다.
용폐는 화폐의 기능 보다는 부장품으로 사용한 목적으로 보이며 용의머리가
새겨져 있는것이 그 특징입니다.
그리고 경페는 세가지 종류로 만들어져 시장에 유통 되었으며 어폐에서 거론 했듯이
경폐의 상단부분에 구멍을 내어 실로 꿰어 보관및 휴대를 하였다고 합니다.
경폐는 주나라 청동기제작물중 하나로 독특한 형태가
돋보이는 화폐라고 할수있습니다 .
원시옷감 - 5
상(은나라)시대 부터 전국시대에 걸쳐서, 농기구의 형태로부터 변화한 일명 포전
초기의 단계의 화페는 농기구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화폐와 농기구의 두가지 목적을 가진 칭량화폐 였습니다. 그시대 사람들은 화폐의 명칭을 원시옷감라고 불렀으며,
청동으로 만든 원시옷감은, 대형, 중형, 소형의 3종류로 분류 됩니다.
대형 원시옷감 :상(은나라) 시대에 유통되어서, 많게는 무문. 농구로서 사용 할 수 있는
크기와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중형 원시옷감 :춘추시대 시대에 유통했으며. 형상은, 대형 원시옷감에 유사하고 있지만
가벼워서 소형화되어 있었습니다.
소형 원시옷감 :춘추시대말기에 유통했으며. 중형 원시옷감보다 더욱 경량화, 간소화 되어 면배에 외곬의 종선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원시옷감에는 간단한 명문도 새겨져 있었습니다..
원시옷감은 그후 조금씩 형태를 변화 시키면서 포전 형태의 화폐로 만들어지는
기원이 되었습니다.
포전 - 6
포전은 지금의 삽이나 가래에 해당하는 고대 농기구의 모습에서 유래 되었는데 당시 쇠붙이로 만든 농기구가 재산적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그 모양을 따 화폐를 만들었다는 점은 쉽게 이해할수있으나 그 이름이 왜 포자가 되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포전은 오랜 기간 광범위한 지역에서 주조.통용되었기 때문에 여러종류가 있는데 크게
공수포. 첨족포. 방족포.
유이포.방견포.원견방족포.방견방족포 로 나뉩니다.
포전의 발달과정에서 처음에는 자루를 꽃을 목 부분을 실제 도구와 같이 속을 비게 만드는등 실물을 충실히 따랐으나 점차적으로 단순화되어 전국시대 말기에는 실제 농기구의 모양과는 상당히 동 떨어진 모습이 되었는데 목부분의 모양에 따라 속이 비게 만든 것을 공수포라
하고 그냥 납작하게 처리한 것을 평수포 라고 합니다.
포전은 주왕실 및 한나라.송나라.위나라 등 농경이 주산업인 중원지방에서 발생하여
통용 되었습니다.
이 포전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약500여년간 중국대륙에널리 통용 되었으며 화폐 형태중
가장 성공적이 었다고 할수 있으며
화폐표면에 문자를 새겨넣음 으로서 화폐목적으로 주조 되었다는점을 증명하여
중국 최초의 화폐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도전 - 7
칼의 모양을 따서 만든 고대중국의 도전은 대략 기원전 50년경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전은 목찰에 쓴 문자를 지워내는 칼, 삭도로부터 변화의 기원을 찿을수 있으며
그 시대 끊임없이 흉노등 변방 오랑캐와 크고 작은싸움을 하며 나라를 지켜야 했던
북방지역의 조나라.연나라 .제나라 등에서는 무기가 더 소중한 재산 이었는지 칼모양을
본딴 도전이 주로 사용 되었습니다.
도전은 포전과는 달리 규격이나 모양이 비슷비슷하여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나 칼끝모양에 따라 첨수도. 원수도 . 방수도 . 반수도 로 분류가 됩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융성했던 제나라를 중심으로 제조 유통되었는데 제나라의
명 재상이었던 관중은 화폐의 주조유통.소금의 생산등 경제 시책에 역점을둔
부국강병책으로 제나라를 열국의 의뜸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 한사군의 유적지에서 흔히 명도전이라
부르는 도전이 출토 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연나라에서 주조.유통되었던 명자가 새겨진 도전으로서 화폐로 사용 되었기보다는 일종의 장신구 또는 부장품으로 쓰여졌을 것으로 추측 하고 있습니다.
명도전의 재료는 모두 청동이며 용범에 의해서 주조되었습니다. 통상으로 발견되는 도전의 90% 정도가 명도전으로 그 수가 많으며 수백∼수천매의 묶음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며. 한국에서 출토된 주요 유적에는 자강도 위원군 용연동, 시중군의 초기 철기시대 주거지유적과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 등의 퇴장유적, 평양시 정백동의 3호 목곽분유적 등이 있다. 명도전은 전국시대 말기 중국 북변의 문화가 한반도로 파급된 것을 나타내는
자료로서 유적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으며, 도전은 포전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8세기경부터 약500여년간 중국대륙에 널리 통용 되었습니다. 도전은 화폐 형태중 가장
성공적이 었다고 할수 있으며 화폐표면에 문자를 새겨넣음 으로서 화폐목적으로
주조 되었다는점을 증명하여 중국 최초의 화폐로서 인정 받고 있습니다.
고원법(원전) - 8
고대 중국인들은 화폐의 발달에 의한 대내외적으로 교역이 번성하게 되어서 편리하게
운반이 용이한 화폐의 필요성을 느꼈는데 그 필요성에 의해 전국시대 말기에 원형의 화폐「고 원법」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화폐의 중앙부분에 구멍을 만들고 끈을 통하게 하여, 보관 하기 좋게 만들었습니다.
「포전」이나 「도전」에 비교해 보면 운반이 매우 용이했으며 그 편리성 때문에
고대 중국인들에게 넓게 유통 되었습니다.
원전의 최초의 모양은 옥반지 물레에서 유래 되었으리라 추측하며
초기의 원전은 두껍고 크며 후기의것은 얇고 가볍게 만들어 져서 주조처와 액면을 표시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초기 원전의 두드러 지는 특징은 초기의 원형 화폐의 구멍이 작게 만들어져서 주조 되었지만, 그후 원형의 구멍이 필요성에 의해서 조금식 넗어졌으며 원형의 구멍은 사각구멍 형태로 변화 하였던 것입니다.
환전은 그당시 다른나라 보다 , 정치, 경제가 발달되고 있었던 「위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졌습니다. 「위」의 환전은 「원」, 「지명」의 글자를 최초로 새겨 주조하고
발행된것이 후에 주조지와 칭량 단위를 나타내는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발행된것은 모두원공의 환전이었습니다.
환전은 휴대가 편리 하기도 했지만, 크기도 적당했던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이 형태는 주변국가의 화폐 형상의 기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반량전 - 9
원전이 전국시대 말기 진의 천하통일 직전 도전.포전을 능가할만큼 널리 쓰여졌다는 것은
진의 반량청동화 출현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황제라는 명칭을 만들고, 통일된 진왕조를 이룩한
진시황제는 만리장성이나 분서갱유등 폭군적 발상으로도 유명하지만 문자체.도량형.화폐등 당시까지 지역별 나라별로 무질서하게 난립하던 각종 사회제도들을 통일하여 사회의 안정.발전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난립하던 모든 기존 화폐를 폐지하고 본위화폐로서 1鎰(20량)을 기본 단위로 하는 금을 사용토록 하고. 보조화폐로서 반량을 기본단위로 하는 청동화를 사용하도록
포고하였습니다.
당시 본위 화폐인 금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 화폐로 사용하였는지는 실물이 남아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으나 보조화폐인 반냥 청동화는 가운데 네모 구멍이 난 원형전으로서 엽전형태를 거의 갖추고 있었습니다.
량은 원래 무게 단위로서 24수에 해당되었다고 하는데1수는 수수낱알 1개의 무게
정도였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반냥청동화는 직경3.6센치미더에 무게가 12수라고 되어 있으나
오늘날 여러가지 크기와 무게의진나라의 청동화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진시황이
화폐제도는 통일 하였으나 나라가 원래 넓은만큼 화폐 주조권은 여러곳에 분산되어
제각기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반량전을 주조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진시황이 제정한 이와같은 화폐제도는 중국화폐제도의 근간을 이루어 이후 2000년간
큰 변경없이 이어져 내려왔으니 진시황의 행정가로서의 안목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량의 출현과 더불어 도전과 포전은 더이상 주조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수전 - 10
기원전 160년경 文常때까지 유통된 반량 청동화는 이후700년간 중국화폐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한 오수전에 그 권위있는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인 BC 119년에 제정된 청동으로 만든 화폐. 수(銖)는 무게의 단위로, 1수는 0.65g이다. 오수전은 무게가 5수이고 <五銖>라고 표시한 화폐인데,
둥근 모양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고 주위에는 선이 둘려 있었습니다. 주조는 처음에
각 군국(郡國)에서 이루어졌으나, BC 113년 이후에는 중앙정부가 독점적으로 주조하였고 오수전 이외의 화폐는 유통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이후로 한나라 초기 이래 혼란상태에
빠졌던 화폐제도는 안정되고 BC 118∼AD 5년에 280억여의 오수전이 주조되었는데.
오수전은 당(唐)나라 초기에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제정(621)될 때까지 기본적 통화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수전은 우리나라에 한사부를 설치했던 시기에 반량 청동화가 3수까지 줄어들자
화페를 줄로 갈아서 새로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자리에 테를 둘러 주조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수전은 크기.무게가 적절하고 청동의 질이 우수하여 일반대중에게 환영을 받아
이후 700년동안 유통되어 중국화폐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금속화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삼국시대이전의 한반도내 고대사회가 칠기.철기등을 생산할만큼 고도 문명사회였으며 상당한 규모의 국가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주요 유물들이 경남
의창군 동면 다호리 선사시대의 한 목관묘들에서 무더기로 출토되어 역사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삼한시대때 변한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이 곳에서 나온 유물을 보면 철제 농기구.무기와 칠기 칼집이 남아있는 청동검,목관.중국 전한시대의 오수전등 69점이
발견 되었으며 이 유물의 기원은 기원전 1세기의 가야형성문화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우리나라의 상평통보가 수많은 종류를 갖고 있듯이
오수전도 그 종류가 많습니다.우리나라에 한사부를 설치하여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슬픈 연가의 사연이 있는 그시기에 사용되었던 오수전은
지금도 우리나라 고대무덤에서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상의 모든 글은 네이버 지식 IN의 "coinman1492"님의 자료입니다]
너무 유용한 정보라서 좋은지식에 추천해 드리고, 여러분께 소개하기위해 갖고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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