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제목 : 고조선의 근거지는 요하(복기대 박사)

2011. 6. 1. 21:39한민족고대사

 


“中 랴오시 고조선 근거지로 추정”

복기대 박사 ‘요서지역…’ 논문 … “독특한 청동기 유물과 유골 등 중원문화와 달라”





○선 안쪽이 랴오시 지역. BC 2400년경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가 출현한 지역이다.  

중국 동북부 지역, 행정상으로는 랴오닝 성에 속하는 랴오시(遼西) 땅. 남북으로 길게 누운 노노아호(努魯兒虎) 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광활한 평원지대가, 서쪽으로는 해발 500m 이상의 고원지대가 펼쳐지는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동북아시아의 인후부 역할을 하던 곳으로, 실제 랴오시의 정치·사회적 변화는 동북아시아 전체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주기도 했다.

게다가 이 지역은 단군이 세운 고조선의 중심지였느니, 아니니 하면서 지금도 역사학자들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는 장소다. 그 논쟁의 시간대는 기원전 2400년 무렵 홍산문화(紅山文化)라는 신석기시대 후기 문화가 붕괴하면서 청동기 문화라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던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고고학적 용어로 하가점(下家店) 하층문화가 출현한 시기다.

7년간 현지서 고고학 발굴 참여

이와 비슷한 때 황하 중상류 지역에서는 이른바 중원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원문화는 하·은·주 및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한 시대 이후까지 포함해 현재의 중국이 그 역사적·문화적 뿌리를 찾는 곳이다. 중원문화, 즉 황하문화는 그 주변문화를 ‘정복’하고 최후의 승자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중국 학자들은 중원문화 이외의 문화는 그 하위 범주로 취급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랴오시 지역 또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황하유역과 동북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 중원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왔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화주의적 문명사관은 랴오시 지역에서 속속 발굴된 유물들에 의해 크게 흔들리게 됐다. 이곳에서 발굴된 청동제 유물들이 중원문화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뿐 아니라, 그 세련된 기술도 중원문화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지역에서 출토된 채회도(彩灰陶)의 경우 중원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세련된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는 것.

과연 랴오시 지역에서 선진 청동기 문화를 꽃피운 주체 세력은 누구일까. 이와 관련해 ‘요서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연구’(백산자료원)라는 한 연구논문이 처음 발표돼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논문의 주인공은 중국 동북지역인 랴오닝대와 지린(吉林)대에서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복기대 박사(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학예연구원). 1992년 중국으로 들어가 7년간 현지에서 발굴 작업에 참여하기도 한 복박사는 중국과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최근 ‘조심스레’ 자신의 연구 성과를 공개했다.



“랴오시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물을 연구한 결과 그동안 중원지역과 관계가 깊다는 주장과는 달리 자생적이며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형성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원전 24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이어진 랴오시 지역의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중원문화를 받아들여 왔다.”



복박사가 연구한 분야는 하가점 하층문화부터 시작해 약 2000년에 걸쳐 하가점 상층문화(기원전 14세기∼기원전 7세기) 위영자문화(魏營子文化, 기원전 14세기∼서주 중기) 능하문화(凌河文化, 기원전 10세기∼기원전 4세기)로 발전해간 랴오시 지역 전체 문화다. 그는 “하가점 하층문화는 기원전 15세기경에 사라지고 노노아호 산맥을 중심으로 서쪽의 고원지대에서는 하가점 상층문화로 발전했으며 동쪽인 평원지대에서는 위영자·능하 문화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서쪽의 하가점 상층문화는 중원식 용기나 북방계통의 청동기 등 각양각색의 문화요소를 수용하면서 발전한 흔적이 많이 보이지만 능하문화의 청동기는 독특한 면을 보인다는 점. 특히 능하문화에서 발굴된 비파형동검이나 청동기들은 랴오닝 지역과 한반도 지역에서 출토된 고조선 유물들과 매우 비슷해 거시적으로는 한 문화권으로 보인다는 게 복박사의 설명이다.



이 문화를 건설한 주체 세력도 중원문화의 주인공들과 차이가 난다고 한다. 랴오시 지역에서 발굴된 인골(人骨)들을 체질 인류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중원문화의 주체들과 다르다는 얘기다.



“체질 인류학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요나라 시기까지 이 지역에서 나온 유골을 계측해보면 고동북형(古東北形)이 주류를 이루고, 고화북형(古華北形)은 부수적으로 나온다. 중원문화의 주류인 고화북형은 머리뼈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비교적 평평한 특징이 있다면, 고동북형은 머리뼈가 조금 높으며 얼굴이 약간 넓고 매우 평평한 특징이 있는 전형적인 동북아시아 계통이다.”






복기대 박사. 고조선 문화의 상징 중 하나인 비파형동검과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꺽창. 특히 길이가 80.3cm에 이르는 꺽창은 중원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능하문화 시기의 청동기인 잔줄무늬 거울.하가점 하층문화 시기의 세발솥. 랴오시 지역에서 출토된 채회도는 중원문화보다 세련된 솜씨를 보인다. (왼쪽부터)  



강력한 국가 체제 城 구조가 증명

즉 랴오시 문화의 주류인 고동북형은 한민족 계통이라는 게 복박사의 설명이다. 실제 랴오시 지역에서 발전된 청동기 문화를 꾸려온 고동북형 세력은 한국이나 중국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단군조선(고조선) 외에 달리 찾아볼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세력이 상당한 정도의 국가 체제를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



“랴오시 지역에서는 영금하(英金河)와 음하(陰河) 같은 강 주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70여개의 성곽이 발견됐다. 모두 하가점 하층문화 시대에 속하는 이들 성곽이 자리잡고 있는 형태를 보면 3만평 정도 되는 큰 성을 중심으로 그보다 규모가 작은 성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이러한 성 구조는 강력한 권력구조를 갖춘 체제이며 또한 중원문화 양식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있다.” 복박사의 설명이다.



인류학에서는 권력의 발생 혹은 국가(state) 발생의 중요한 징표로 성곽을 꼽는다. 그렇다면 기원전 24세기에 개막해 기원전 15세기까지 번성한 하가점 하층문화 시대에 강력한 국가 체제를 형성했던 집단이 바로 우리 상고사의 수수께끼인 고조선이었다는 말일까. 복박사는 “문헌 기록이 부실해 100%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귀띔했다.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랴오시 지역이 중원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어떤 이는 개인적으로 고조선 문화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또 중원문화가 랴오시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라 랴오시 문화가 중원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중국학자들은 이런 류의 논문을 정식으로 발표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중국학자들이 아니라 한국의 학문 풍토다. 아무도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하려 들지도 않고, 심지어는 애써 외면하는 풍토가 만연돼 있기 때문. 우리나라 그 어디에도 우리 상고사를 탐구하는 연구소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아무튼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학계를 포함해 사상 처음으로 랴오시 지역 문화를 총체적으로 연구한 복박사의 연구논문은 현재 학계에서 학문적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는 이전에도 이미 학계를 한 차례 놀라게 한 바 있다. 한국 상고사의 또 하나의 쟁점인 ‘한사군’ 문제에서 그가 결정적 유물을 제시한 것. 한사군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기원전 108년 설치했다는 낙랑·임둔·현도·진번의 4군을 가리키는데, 그 위치가 어디냐를 놓고 ‘만주 존재설’과 ‘평양 중심설’이 부딪혀 끊임없는 논란이 벌어져왔다.



이에 복박사는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臨屯(임둔)’이라는 글자가 적힌, 중국 요서지역에서 출토된 봉니(封泥·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로 직인이 찍혀 있는 형태임) 유물을 제시함으로써 위만조선의 통치강역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라는 학계 통설을 전면으로 뒤집었던 것. 이는 복박사가 ‘글방 서생’에 멈추지 않고 7년간 중국 현지를 도는 등 발품을 팔았기 때문에 얻어낼 수 있었던 결실이었다



========================================================================================





2. 오마이뉴스





  

적석총, 석관묘, 빗살무늬 토기...

이 '낯익은 유물'의 주인공은 누구?

[특별기획-중화패권주의③] '反중원중심론' 현장 홍산문화를 가다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태경(gauzari) 기자    







  

--------편집자 주---------------  





중국은 고구려사 강탈을 목적으로 한 '동북공정' 이외에도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공정(프로젝트)'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역사빼앗기를 넘어서 최근 중국의 패권주의적 경향과도 무관치 않다.



<오마이뉴스>는 중국이 왜 이같은 작업을 벌이고 있는지, 또 그들이 노리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대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기획기사를 10회에 걸쳐 내보낸다. <오마이뉴스>는 이를 위해 지난 9월 3일부터 18일까지 2주일간 중국현지를 답사했다. 이 기사는 그 세번째다.  

---------------------------------------------














▲ 중국 랴오닝성 링원시 우하량에 있는 적석총. 기원전 3500년 께의 유적이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 중국 랴오닝성 커주어의 동산취 유적. 사진 앞쪽의 원형 유적은 제단으로 생각된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당신들 어디에서 왔소?"

"베이징에서 관광하러 왔는데요."

"여기는 그냥 관람할 수 없소. 저 아래로 50m 쯤 가면 있는 사무실의 왕 선생한테 허락을 받아와요. 왕 선생하고 함께 와야 보여줍니다."



지난 9월 11일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링위안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적석총 앞. 한참을 보른 다음에야 문을 열고 나온 60대 관리인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는 유적지 가운데 관람이 불허되는 곳이 종종 있다. 특히 처음부터 "당신들 어디에서 왔느냐"며 심문하듯 물어보는 곳은 매우 민감한 곳이다. 우하량 유적지는 왜 이렇게 중요할까?



  




▲ 기원전 3000~4000년 께 중국의 주요 신석기 문화권.  







중국 동북방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홍산문화(紅山文化)의 중요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홍산문화는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다. 이 문화는 기원전 3500년 께 요하(遼河) 및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중국 고고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쑤빙치(蘇秉琦)는 "홍산문화는 중화문명의 서광"이라며 "이 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단계를 뛰어넘어 국가 형성의 초기단계에 이르렀다, 홍산문화는 중국 문명사를 1000년 앞당겼다"고 평가했다.



우하량 유적지는 도로변에 있지만 철조망이 쳐져있고 코스모스 담장이 있어 내부를 들여다보기 힘들다. 관리인의 허락을 받지못한 취재팀은 유적지 뒤로 돌아가기로 했다.



높이 6~7m 정도 되는 가파른 언덕을 여러번 오르내리고 위험한 철길을 건넜다. 20분 정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고생한 뒤 우하량 유적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중국 문명사를 1000년 이상 앞당긴 홍산문화



  

-------홍산문화가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중국인들의 홍산문화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다. 지난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네이멍구 츠펑시에서 한국을 비롯해 일본, 미국 학자 등 80여명을 불러 홍산문화국제학술토론회를 열었다. "용 문화의 기원은 어디인가"를 집중적으로 토론했다고 당시 <신화사>는 보도했다.



중국 학자들은 그들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의거해 홍산문화는 중화문명을 이룩하는 주요한 한 구성부분이라고 본다. 홍산문화 유적은 중국 중앙정부가 직접 관여해 발굴작업을 벌이고있다. 또 앞으로 고구려나 발해 유적처럼 앞으로 권역별로 묶어 대규모 관광지로 개발할 것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한국 학계의 홍산문화에 대한 태도. 일부 학자를 빼놓고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와중에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홍산문화를 고구려사 빼앗기에 이용하고 있다.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전욱 고양씨 집단으로 이들이 남만주로 가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적석총은 바로 홍산문화의 적석총을 이어받은 것이며, 고주몽의 고씨도 전욱 고양씨의 후예여서 붙은 성씨라는 것.



홍산문화가 고조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이를 중국 문명으로 넘기면 고조선사 역시 통째로 중국사로 넘어가게된다.  

---------------------





우하량 유적지는 길이 160m에 너비 50m 규모로 거대한 적석총 5개와 돌로 쌓은 제단 1개로 이뤄져있다. 중국 정부가 지난 1983~85년 본격적인 발굴을 했으며 탄소측정결과 기원전 3500년 만들어진 것으로 측정됐다.



각 적석총에는 10여개의 석관묘와 함께 옥으로 만든 룡(玉龍. 돼지나 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빗살무늬 토기 등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특히 여신묘는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우하량 적석총 무덤군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여신묘는 175m×159m의 대형 유적으로, 진흙으로 만들고 눈에 옥을 박은 사람 머리 크기의 여신의 두상이 발견됐다.



대형 제단과 적석총, 여신묘 및 여신상의 존재는 이 문화가 상당 수준의 계급분화가 진행되어 이미 씨족 사회를 넘어섰으며 국가 형성 초기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하량 유적지에서 50㎞쯤 떨어진 커주어(喀左·원 이름은 '객나심좌익몽고족자치현(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縣)')의 동산취(東山嘴) 유적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있다. 기원전 3500년 께로 추정되는 이 유적은 전체 길이 60m, 너비 40m의 크기다. 동산취 유적은 직경 2.5m 가량의 원형 제단터 및 사각형 돌 무덤, 인물 소상, 빗살무늬 토기, 각종 옥 제품 등이 발견됐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궈따쉰(郭大順)은 올해 2월 발간한 <우하량유적지 고고발굴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5000년 문명의 기원이 요하 유역에 있음이 유적으로 확인됐다. 특히 지난해 우하량 적석총 제16지점에서 발견된 옥풍(玉風. 봉황), 옥인(玉人) 등을 비롯해 각종 제단과 묘, 이들의 배치는 베이징의 천단(天壇) 및 명나라 황제를 모신 13릉과 비슷해 '예(禮)'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전통 사학가들은 황하 유역을 중국 문명의 요람으로 봤다"며 "그러나 홍산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은 중국 문명의 중심지가 결코 한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요하유역은 중국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했다.



적석총, 빗살무늬 토기... '낯익은 유물'들



  




▲ 우하량 유적지에서 나온 사람 머리 크기의 여신의 두상.  





홍산문화가 우리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는 것은 출토된 유물의 면면 때문이다. 적석총, 석관묘, 돌로 만든 대형 제단, 각종 다양한 옥 제품, 빗살무늬 토기….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웠던 한국 고대문화를 상징하는 유물들이 이곳에서 많이 나왔다. 또 이들 지역은 과거 고조선의 중심지였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대릉하·요하 유역)에서는 홍산문화 이전에도 뛰어난 문화가 이미 존재했다. 랴요닝성 푸신(阜新) 지역의 사해(査海)문화, 네이멍구의 츠펑(赤峰)지역의 흥륭와(興隆窪) 문화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이는 중원지역 앙소문화의 전 단계인 노관태(老官台)문화의 연대가 7200년 전이고, 앙소문화가 4500~6500년 전인 것과 비교할 때 오히려 시기가 빠르다.



  




▲ 홍산문화지역에 나온 옥으로 만든 용. '중국 제일룡'으로 불린다.  







문화수준도 결코 중원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흥륭와 문화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해자로 둘러싸인 완벽한 형태의 촌락유적지가 발견됐다. 사해문화에서는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길이 19.6m의 용과 용문 도기가 발견됐다. 이는 중국에서 발견된 용 형상 가운데 가장 이르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임과 동시에 "용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용의 형상이 중원이 아닌 요하 및 대릉하 유역에서 가장 빨린 등장했던 것이다. 또 흥륭와와 사해 문화는 중국 문명 가운데 옥기가 가장 빨리 출현한 곳이다. 옥은 "영원 불멸"의 종교적 관념을 상징한다.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로 가면 기원전 24~15세기의 랴오닝성 츠펑시의 하가점(下家店) 하층문화, 기원전 14~7세기의 하가점 상층 문화, 기원전 14세기~서주 무렵의 차오양시(朝陽市)의 위영자(魏營子) 문화 등이 등장했다.



이 문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문제는 이 문화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한 재중동포 학자는 "중국 학자들도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조선 민족, 구체적으로 예맥족의 문화로 본다"고 잘라 말했다.



중국 랴오닝대와 지린(吉林)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복기대 박사도 비슷한 견해였다. 기원전 10~4세기 무렵의 능하(凌河)문화라는 새 유형을 주장하고 있는 복 박사는 "개인적으로 하가점 상층 문화는 산융(山戎) 것으로 본다"며 "그러나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대 문화, 하가점 하층 및 위영자 문화는 고조선 시대의 문화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가점 하층 문화에서는 70여개의 성이 발견되는 등 완전한 국가형태를 띠고 있으며 발굴된 인골은 인류학적으로 볼 때도 고동북인(古東北人)에 속한다는 것.



그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가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하는데 하가점 하층문화는 연대가 일치하고 출토 유물도 단군 신화의 내용과 맞아떨어진다"며 "하나라 문화인 이리두(二理頭) 문화가 기원전 2100년 께인것과 비교하면 시기상으로도 더 앞선다"고 부연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한국 학계에서는 적석총과 석관묘의 기원을 시베리아로 본다, 그러나 홍산문화지역에서는 이보다 2000년 앞서 같은 유물이 나왔다"며 "이는 우리 문화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묘제를 같이 썼다는 것은 문화 및 인류의 동질성까지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화문명 탐원공정은 중원문명 정통론의 부활



일반인들은 중국 문명은 오늘날 산시성(山西省) 남부 및 허난성(河南省) 서부인 이른바 중원지역에서 발전했으며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고 알고있다. 이른바 '중원문명 중심설'이다. 이는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화이관(華夷觀)의 바탕이기도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이런 논리는 깨진지 오래다. 황하 중상류 지역 외에, 요하와 대릉하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역, 산동성 지역, 양자강 하류 및 타이호(太湖) 유역, 광둥성의 주강(珠江) 삼각지 지역, 후난성의 퉁팅호(洞庭湖) 및 쓰촨성 지역에서도 수준이나 시기에 있어 중원지역과 맞먹거나 오히려 앞선 문화가 있었음이 증명됐다.



  




▲ '유화부인의 길'?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랴오닝성 링위안과 커주어의 가로수는 전부 버드나무였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그러나 중국이 지난 2003년 6월 정식으로 시작한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은 철저하게 중원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점 발굴지역이 허난성 신미시(新密市)의 구청진(古城鎭)과 신짜이촌(新砦村)의 유적, 역시 허난성 덩펑시(登封市)의 왕청강(王城崗) 유적, 산시성(山西省) 린펀시(臨汾市) 샹펀현(襄汾縣) 타오스향(陶寺鄕) 유적 등 모두 중원지역이다.



작업 내용도 중원의 신석기 문화인 용산문화부터 하나라 초기 이리두 문화까지의 취락형태, 야금기술 및 유적 정리, 요·순·우(禹) 관련 자료의 수집과 연구 등 화하족(華夏族) 문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국 이는 중원문화 중심론, 중원문화 정통론을 다시 확립하는 것에 불과하다. 중원 이외의 다른 지역 문화는 모두 중원으로 흘러들어와 융합되었다거나 또는 중원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정리될 것이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이나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에 대해서는 해외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다"며 "일본이 과거 고대사의 연대를 확대하려고 시작했던 프로젝트가 결국은 역사를 왜곡하고 실패했던 교훈을 얻으라는 충고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02년 미국 아시아 학회 년회에서 스탠포드 대학 데이비드 니바이슨 교수는 하상주단대공정에 대해 '전부 틀렸다'고 비판했다"며 "또 시간적으로 연대 측정이 틀렸을 뿐 아니라 방법적으로 불리한 증거는 택하지 않은 오류가 있었다고 지적했다"고 소개했다. 특히 해외 학자들은 이런 연구가 개별 학자들의 결과물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그 폐해가 더 심각하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의 설명에 광개토대왕이 통곡한다  





현재 집안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앞에는 "장수왕이 그 부친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진(東晋) 의희(義熙) 10년, 즉 서기 414년에 광개토태왕비를 만들었다"라는 설명비가 세워져있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내용 가운데는 영락(永樂)이라는 서기 391년부터 412년까지 쓰인 고구려 독자의 연호가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한족(漢族) 왕조인 동진(東晋)의 연호로 비의 건립연대를 표기했다. 이는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더 있다. 당시는 위진남북조 시대로 선비족 등 소수민족이 북방을 차지하고 한족(漢族)을 남방으로 쫓아낸 시절이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는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을 썼고 문화적으로도 중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은 광개토대왕비의 건설 시기를 선비족에게 밀려 남방으로 도망간 동진의 연호로 표기해놓았다. 동진은 광개토대왕비가 건립된지 불과 6년만인 서기 420년에 멸망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가 세워질 당시 고구려는 최전성기였고 이후 240년을 더 존속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동진의 연호로 광개토대왕비의 건설 시기를 표기한 이유는? 간단하다. 동진이 바로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이기 때문이다.



"중화민족은 56개 민족으로 이뤄졌다"는 중국의 주장은 얼핏보면 한족 중심주의를 폐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유독 한족 왕조의 연호로만 광개토왕비의 연대를 표기한 것은 결국 '한족 중심주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한편으로는 한족 중심주의을 감추는 위장막에 불과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민족 지역의 땅까지 중국의 영토였음을 강변하기 위한 근거만들기에 불과하다.     











조공 책봉 관계로 보면 전 세계가 중국 지방정권  





중국의 25사를 비롯해 정사에 고구려를 비롯해 이방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는 모두 외국 열전에 기록됐다. 그들 스스로가 만들었던 역사기록도 부정하는 게 현재 중국이 벌이는 각종 공정이다.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유력한 근거 가운데 하나가 조공-책봉관계다. 그러나 이 논리대로라면 백제,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와 조선까지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더 나가면 1911년 신해혁명 또는 최소한 1840년 아편전쟁 이전에 중국과 외교적 왕래를 했던 나라들도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중국은 그들과 교통하기를 원하는 모든 나라들을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조공-책봉 관계로 생각했다.



한 중국 학자는 "중국이 조공-책봉 관계를 들어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주장하지만, 그 논리대로하면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해 유럽 국가들도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며 "따라서 이 모순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솔직히 이 문제 때문에 내부적으로 논란이 크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중국은 칭기즈칸을 중화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몽골도 중국 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몽골 사람들이 먼저 현재의 중국 영토를 자기 땅으로 주장할 수 있다. 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불러들여 1932년 만주국을 만들었던 일본도 만주 땅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 베이징 시내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빠다링의 만리장성.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신해혁명 때 구호는 "만주족 몰아내자!"  





중국의 다민족 통일국가론도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과 상당히 다르다. 중국은 현 영토안에 살고있는 모든 민족들은 수천년 전 상고시대부터 서로 융합·발전하면서 오늘날의 '중화민족 대가정'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고구려도 중국 동북지역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100년도 안된 1911년 신해혁명 때 터져나온 구호는 '멸만흥한'(滅滿興漢)(만주족의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 정권을 세우자)이었다.



대만의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모두가 떠받드는 쑨원(孫文)이 1894년 만든 흥중회(興中會)나 1905년 결성된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沒盟會)는 "구제달로(驅除達魯)·회복중화(恢復中華)"를 구호로 내걸었다. 오랑캐를 제거하고 중화민족 정권을 세우자는 말이다.



달로는 다루가치(達魯花赤), 즉 몽골족의 원나라 때 황제가 지방에 파견한 총독을 이르는 말이다. 달로는 몽골족을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야만족, 즉 만주족이나 몽골족 등 한족(漢族)이 아닌 소수민족을 멸시해 지칭한다. 현재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의거한다면 쑨원은 민족분열주의자다.



중국 베이징 시내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빠다링(八達嶺)에 있는 만리장성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있는 만리장성은 진 시황 때의 것이 아니다. 1644년에 멸망한 명나라가 만든 것이다.



이 만리장성이 청나라 이전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자신의 영역과 외부세계를 가르는 국경선이다. 장성 밖은 중국인들의 관념상 그들의 영토가 아니었다. 고대 중국인들이 지은 역사책에도 장성 밖의 나라들은 대개 외국 열전에 기록했던 것이다. 따라서 청나라가 세워지기 1000년 전 만주에 있었던 고구려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자체가 넌센스다.


오삼계는 통일 영웅인가 반역자인가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의 모순  

  




▲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하이꽌  

ⓒ오마이뉴스 김태경

지난 9월 12일 산해관(山海關)을 찾았다. 베이징에서 동북쪽 열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다.


산해관의 성벽 위에는 명나라 말기에 활약했던 많은 재상과 장군들의 동상 100여개가 서있었다. 그러나 오삼계(吳三桂 1612∼1678)의 동상은 없었다.


오삼계는 중국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장군이다. 1644년 명나라 말기 농민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李自成)이 수도 베이징에 쳐들어왔다. 명나라는 오삼계를 평서백(平西伯)에 봉하여 수도방위를 맡게했다. 그러나 그는 이자성에게 베이징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산해관으로 돌아가 청나라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명나라는 멸망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잔존 세력은 남방으로 가 저항했다. 오삼계를 비롯해 정남왕(靖南王) 경정충(耿精忠), 평남왕(平南王) 상지신(尙之信) 등 한족(漢族) 출신 장군들은 앞장서 명나라 잔족 세력을 제거했다. 오삼계는 남명(南明) 정권을 추적해 영력제(永曆帝)를 오늘날의 미얀마에서 살해했다. 그러나 이후 청나라는 이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1673년 오삼계는 운남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주(周)를 세우고 경정충, 상지신(尙之信) 등과 함께 '삼번(三藩)의 난'을 일으켰다가 모두 패배해 살해당했다.

고구려와 수당 사이의 전쟁을 민족통일전쟁이라고 부르는 중국의 시각에서 본다면 오삼계는 중국 통일의 영웅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 그 누구도 오삼계를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다.

같은 시기 오삼계와 정 반대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 있다. 바로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이다.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정성공은 명나라가 망하자 당왕(唐王) 융무제(隆武帝)를 옹립해 청나라에 대항했다. 그는 국성(國姓)인 주(朱)씨를 하사받아 주성공(朱成功)으로 이름까지 고쳤다.

1661년 정성공은 당시 타이완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 세력을 격퇴시키고 이곳을 근거지로 청나라에 항거했다. 그러다 1683년 정성공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고 청나라에 복속됐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 그 누구도 정성공을 "조국 통일을 방해한 민족 분열주의자"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출처 : 지구온난화와 인류의 미래
글쓴이 : 임서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