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명도전은 고조선의 화폐가 틀림없다

2010. 5. 9. 13:45명도전 자료

명도전은 그간 연나라의 화폐로 알려져 왔다. 국사교과서와 사전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동양에서 최초의 금속화폐는 포전과 첨수도다.

모두 춘추시대(bc770~bc476)나 전국시대(bc475~bc221)에 사용되던 화폐들이다.

포전은 농기구인 가래에서 유래됐고 동주왕실과 진,한.위.송,조.연나라에서 사용되었으며 고조선에서도 유통되었다.

포전에는 좌우에 글자가 세겨져 있는데 포전을 주조한 지역명으로 추정된다.

 

첨수도는 손칼에서 유래됐고 북방유목민이 사용하던 것인데  고조선에서도 유통되었다.

이 첨수도에서 발전한것이 명도전이다.

 

명도전은 앞면에 명(明)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뒷면은 명문이 없거나 숫자,간지(干支),좌,우,행 등의 글자가 조합되어 있다.

숫자는 화폐의 중량단위, 간지는 주조연대, 좌,우,행은 주조지역(기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이 명도전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것은 명도전의 '명'자가 갖는 의미가 아니라 통일성이다.

명도전이전의 첨수도나 포전등은 명문이 없거나, 각지역명칭이 씌어지는 등 통일된 명문이 없이 통용되었다.

그러나 명도전에는 진나라의 진시황이 bc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발행한 '반량전'의 '반량' 

한나라의 무제가 발행한 "오수전"의 "오수"와 같은 국가주도의 명문(明文)이 존재한다.

 

그러면 이 명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명도전의 명(明)자는 해와 달을 의미하는 고어라고 하는것이 다수설이다.

그런데 이 밝을명(明)자와 아침조(朝)의 문자를 분석해 보면 알겠지만 

아침조는 해가 빛나는 모습과 달을 표현한것이고 밝을명은 해와 달을 표현한 것이다.

의미나 모양이 비슷한것을 보면 고조선의 것임을 표시한 명문 아닐까?

 

고대의 화폐와 오늘날의 화폐의 기능이 같았을까?

 

'관자'에는 춘추시대의 화폐의 기능에 대해 알수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황금,도(칼),포(옷감)'는 민간에서 유통되는 화폐다. 도폐는 가볍게 여긴다. 황금은 양으로 사용된다'고 하여

실물화폐인 황금,도,포가 민간에서 화폐의 기능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주조화폐인 도폐는 쓰임새가 적었던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17세기(동전이 17세기 지폐는 18.19세기)이후까지도 지속되는데

조개껍질,옥,포,소금,쌀,금,은,청동(도끼,칼),철(철정) 등의 실물화폐는 그 자체가 물품으로서 사용가치가 있었고

유통의 매개수단으로 후에 등장하는 청동주전이나 철전보다 주로 쓰였다.

 

상인과 유목민의 공통점은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동할때 가볍고 편리하게 가지고 다닐수 있도록 고안된것이 주조화폐다.

유목사회나 상인들간에서는 주조화폐가 많이 쓰인반면 농경사회같은 정착사회에서는 주조화폐보다는 실물화폐를 더 선호했다.

특히 청동,철,금,은과 같은 실물화폐는 칭량화폐로 이후 물건의 교환이나 지불등에 주로 쓰였으며 특히 금과 은은 18.19세기

국가의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되는 신용화폐가 발행되기 전까지 주된 화폐기능을 수행했다.

 

종합해보면 명도전이나 반량전, 오수전 등의 고대의 주조화폐는 국가가 발행했지만

오늘날과 같이 국가의 신용을 바탕으로 주조되거나 발행된 화폐와는

사용자(상인과 상류층에서만 사용)와 기능(일부물품에 대한 지불),

사용지역(국가를 벗어난다. 명도전-유목사회)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착각에 자주 빠지는 것은 고대에도 화폐가 오늘날과 같이 쓰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모든사람들이 사용하고 모든물건을 살수있으며 한 나라에서는 한 화폐만 유통될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유적들을 살펴보면 주조화폐들이 나라와 시대를 벗어나 서로 공존하고 있었으며 무덤에 부장되고 있었다.

이는 주조화폐들이 일종의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었으며, 특히 귀중품으로 거래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명도전의 등장시기는 언제일까?

 

학자들은 전국시대(bc475~bc221),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국시대 중기쯤으로 설명한다.

아울러 명도전이 연나라의 화폐고 연장진개의 조선침략으로 명도전이 만주와 한반도에 유통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초기 세형동검(초기세형동검이 등장한 시기는 bc400년 전후로 본다/오강원)과 명도전이 공반되는것으로 보아

명도전이 고조선 지역에 등장한 시기는 연장진개의 조선침략시기(bc311~bc279)보다 앞서있다.

이것은 명도전이 연나라의 침략에 의해 고조선에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데 묘하게도 단군세기의 내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bc 425년 흉노(융적=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수만명의 무리를 거느리고)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서북36군을 함락시켰다.

겨울에 도읍 백악산아사달이 함락되었으며 임금은 배를타고 피난중에 해두(요동반도 끝으로 추정)에서 죽었다.

이때가 고조선이 건국한지 1908년 되는 해다. 이때 고조선은 백민성의 욕살(장군=성주) 구물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격에 나서 이를 물리치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나 도읍을 장당경(심양 혹은 요양)으로 옮기고 나라이름도 대부여로 바꿨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서에서 요동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흉노가 가지고 있던 공병식 동검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조선의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흉노가 가지고 있던 첨수도에 영향을 받은 명도전이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즉 말기 고조선(대부여/장당경시대, bc425~bc238)시대에 사용되었던 동검이 세형동검이고 그때 사용되었던 화폐가 명도전이 아닐까?

 

명도전 이후에 등장하는 명사전과 명화전 그리고 일화전도 비록 모양이 손칼모양에서 엽전모양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 문양을 보면 명도전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명사전(명사원전)과 명화전(명도원전)의 경우  "명"자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고

일화전(일도원전)은 "명"자가 없지만 명화전에 나타나는 "도"라는 명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명사전과 명화전 일화전은 bc238년 고조선이 멸망한 후 북부여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중국내륙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북성북부와 요녕성 그리고 한반도 서북부에서만 발견된다.

 

일화전의 거푸집이 적봉부근에서 발견된것으로 보아 초기 북부여의 중심지는 아사달이 있던 적봉지역으로 생각된다.

 

명사전은 중국동전의 기본형태인 방공원전 형식의 시초로 본다.

진시황은 명도전이 갖는 통일된 명문과 명사전이 갖는 방공원전의 형식을 받아들여 '반량전'을 주조하지 않았을까?

 

반량전은 진나라의 중국통일(bc221년)이후 한무제 때(bc118년)까지의 진.한시기의 화폐로

요서와 요동에서 발견되는 반량전은 고조선의 '위만조선시기(bc194~bc108년)'과 대체로 일치한다.

'위만조선'의 건국자 '위만'은 한나라의 '연땅'에서 망명한 인물로 요서와 요동에 '반량전'을 유통시켰을것으로 보인다.

 

단 요동에서 발견되는 반량전은 교역의 결과물로 본다.

 

오수전은 한나라의 무제(bc118년)때부터 당나라때까지 유통된 화폐로 요서와 요동에서 발견되는 오수전은 '한사군'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단 요동에서 발견되는 오수전은 교역의 결과물로 본다.

 

이시기의 압록강 이남 한반도에서는 반량전과 오수전이 거의 없거나 전혀 보이지 않는데

(평양에서 발견된 반량전 거푸집은 일제에 의한 날조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평양이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의 치소라는 주장이 허구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자료다.

 

그간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인 폐수를 청천강이라고 주장하는 중국과 한국학자들의 근거로 활용되어 왔던 명도전의 분포영역은

이미 청천강을 뛰어 넘어 평양을 비롯한 대동강유역에서도 다량 출토되었으며, 보고에 의하면 전남강진에서도 소량 발견(고미술상의 투고)되었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소량 출토 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간 알려진것과는 달리 한국형동검이라고 일컬어지는 세형동검이 명도전과 함께 공반되고 요서지역 및 산동반도에서도 세형동검이 출토되어

'고조선의 영역이 연장 진개의 침략에 의해 한반도이내 청천강이나 요동으로 축소되었다'는 근거로 세형동검을 활용할수 없게 되었다.

 

명도전은 고조선의 화폐가 틀림없다.

 

북경이나 승덕등 하북성 북부를 연나라의 영토로 간주하고 그곳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거푸집도 발견되었으니 명도전이 연나라의 화폐라고 강변하는

학자들에게 북경이나 승덕이 고조선의 영토였다면 어찌할것인가 되묻고 싶다.

만약 요하가 영정하라면, 진번조선이 하북성에 있었다면, 진개의 조선침략이 날조라면 어찌할것인가 되묻고 싶다.

 

명도전은 산동반도에서도 발견된다.

비록 8000리 대제국 고조선이 흉노의 침략을 받아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겼고 쇠퇴했지만 그 위용은 명도전의 분포와 같다.

 

연나라는 전국7웅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고 2천리에 지나지 않은 소국이었다.

만약 연나라가 5천리 강대국이었다면 사기를 쓴 사마천이 그렇게 표현하지 않을리 없다.

만약 진개가 동호땅 1천리와 조선땅 2천리를 탈취한 영웅이라면 '전단열전'을 쓴 사마천이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가장위대한 장수인 진개에 대한 열전인 '진개열전'을 쓰지 않을리 없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바다가 없었다. 요동과 조선이 있었다. 진번조선이 있었다.

사기 어느부분에도 연나라의 동쪽에 바다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연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할때까지 2천리 그대로였다.

 

연나라는 고조선을 지우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부풀려져 있다.

연나라의 후기수도는 기껏해야 연하도다.

 

고조선이 서북방 흉노의 침략을 방어하기위해 쌓아놓은 치가 있는 고조선의 성들은 연나라와 진나라의 장성으로 둔갑했다.

연장성과 진장성은 기껏해야 고대의 요동(과거의 요동국, 요수가 있는곳=영정하 중상류)이지 내몽고지역이 아니다.

 

진번조선이 위만조선으로 바뀌고 위만조선이 멸망할때 까지 하북성의 발해만 연안은 고조선의 영토였다.

 

bc425년부터 bc238년까지 명도전은 하북성과 산동반도와 내몽고와 요서와 요동 그리고 한반도 서부에서 발견된다.

명도전이 하북성에서 많이 발견되고 산동반도에서 많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그곳이 고조선의 영토라는 반증이다.

 

중국학자들은 명도전이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들어 명도전이 발견되는 곳은 전부 연나라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명도전이 발견된 한반도 서북부에 진나라의 반량전과 한나라의 오수전은 거의 없거나 발견되지 않는다.

반량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곳이 진나라의 영토가 아니라는 뜻이고

오수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곳이 한나라의 영토가 아니라는 뜻이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만약 반량전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곳은 연나라의 영토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라의 영토가 아니라는 것은 '한사군'이 한반도내에 설치된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이상 명도전이 연나라의 화폐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출처 : 고조선 그리고 요하문명
글쓴이 : 홍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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