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6. 08:30ㆍ문학과 건축, 서예
화엄(華嚴)사찰(寺刹) 탐방기[1]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편 | ||||||||||||||||||||||||||||||||||||||||||||||||||||||||||||||||||||||||
글.김범선(소설가. 본지 논설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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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공짜 인사말과 함께 '저는 인솔자가 아니고 도우미니 오늘 하루 심부름 많이 시키십시오.' 한다. 출발 전에 보니 우 선생님이 생수와 빵을 나눠주었는데 내외분이 오늘 하루를 아주 희생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황재일 님이 안내하기를 화엄 10사찰 중 그 첫 번째로 오늘 해인사를 탐방하게 된 것은 제2회 부석사화엄축제(2004.5.1-5.30)행사 기간 중 문화관광부 선정 5월의 문화 인물로 의상대사가 지정된 것을 기념하는 축제 행사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평소 필자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 아니다. 산 구경은 소백산으로 가고 절 구경은 부석사로 가고 강은 서천 강을 보면 그만이지 구태여 그 먼 데까지 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살았더니 팔공산 갓바위도 못 가보고 지리산 구경도 못하고 해인사도 못 가 봤다. 초봄에 금강산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그런 생각이 들어 참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가야산 해인사를 간다기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해인사가 부석사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잘하면 학창시절에 동문 수학했던 백련암에 원택 스님도 만나 볼 수가 있지 않겠는가? 아마 영주서 해인사까지 가자면 4시간은 족히 걸리겠지? 같이 동행을 한 김 고문이 넉넉잡아 2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정말 그것 밖에 안 걸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인데
조경이 잘 된 해인사 입구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오석(烏石)에 '김영환 대령 공덕비' 가 서 있다. '출가하신 스님 중엔 전직 군인도 있구나'하는 무식한 생각을 하며 일주문을 들어서는데 인솔 선생님이 빨리 점심 공양부터 하라고 독촉을 한다. 아무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배부터 채워야지. 서둘러 반 지하 공양소로 갔더니 일행이 줄을 서 있다. 예로부터 절 밥은 맛이 좋다고 하더니 그 말처럼 해인사 점심 공양은 정말 맛이 있었다.
▶해인사 스님 일행 중 한 분이 '스님, 눈이 저 정도면 상대방은 얼마나 다쳤겠노' 낮은 소리로 농담을 하신다. 그 스님을 인디안 말로 이름을 부치면 '오른쪽 눈에 물리적인 힘을 받아 눈알이 왕방울처럼 부은 스님' 이라고 불러야 한다.
해인총림은 역대 선승들과 팔만 대장경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더구나 3보 사찰 중 하나이다. 법보 사찰 해인사, 불보 사찰 통도사, 승보 사찰 송광사 중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제 사찰이다. 사찰 소개는 해인사 홈페이지나 기타 매체를 통해 더 잘 알 수가 있으니 여기선 줄인다 ▶한 폭의 벽화 바로 중생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유정들과 무정들의 법인데 탐.진.치에 빠진 어리석은 인간들이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중생들의 세속적인 삶에 모든 문제들과 번뇌가 홍제 스님이 설명하신 그 한 폭의 벽화 속에 숨어 있었다. 그 그림은 불길(생노병사)이 타오르는데 코끼리(무상)가 쫓아오자 도망치다 구덩이에 떨어진 한 남자(인간)가 외줄(생명)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구덩이 밑에는 4마리 뱀(지수화풍)이 혀를 날름거리며 입을 벌리고 있다. 실제로 그림에는 3마리 뱀이 그려져 있었으나 홍제 스님은 4마리 뱀이라고 우기셨다. 그리고 그 한 마리가 보이지 않으면 아직도 공부가 부족하다고 농을 하셨다. 그리고 외줄 옆에는 꿀( 오욕: 식욕, 색욕, 재욕, 명예욕, 수면욕,)이 흐르는 벌집이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은 왼손으로 줄을 잡고 오른 손으로 꿀을 따먹는데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 줄을 검은 쥐(밤)와 하얀 쥐(낮)가 교대로 갉아먹고 있는 데도 말이다. 바로 인간 삶의 모든 비밀을 이 보다 더 잘 묘사한 그림이 있을까? ▶대적광전 치미 속가에서 올린 기와집과 눈에 띄게 다른 모양에 같이 간 일행들이 용꼬리? 빗자루? 그런데 스님은 '치미' 라고 말씀 하셨다. 바로 물고기 꼬리라는 것이다.
느닷없이 홍제 스님은 우리 일행에게 한국에서 제일 좋은 잔디 구장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바로 해인사에 있다는 것이다. 의아해 하는 우리들에게 스님은 바로 요 너머 있다며 손을 들어 앞을 가리키신다. 해인사 스님들은 예로부터 수행 중 축구를 많이 하셨다고 한다. 불이 나면 곧바로 쏜살같이 달려가 불을 끄기 위한 체력 단련과 일종의 소방 훈련이었다. 속세를 떠난 스님들이 그런 잔디 구장을 가지고 있겠는가? 단지 해인 총림을 화마로부터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설명이다. ▶장경각 그리고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에 대항하여 싸웠다. 기마 민족인 몽고인은 해전에 약했다. 고려왕조는 강화도에서 삼천리 불국토를 지키기 위해 국력을 모아 부처님 말씀을 모은 경전을 17년 간에 걸쳐 완성하였다. 1236년(고종23년)에 강화도에 장경도감을 설치하고 총 1,511부, 6,802권, 81,137매의 장경을 조조(肇造) 하였다. 4톤 트럭으로 70대 분량이라고 한다.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은 여기서 줄이겠다. 홍제 스님 설명으로는 장경각은 가야산 해발 600m 고지에 위치해 있어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지점으로 자연 통풍이 가장 잘 된다고 한다. 그리고 바닥은 숯과 황토, 조개의 껍질을 잘게 부순 가루로 다져 방충, 방습, 부식 방지를 한다고 한다. 한때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해인사를 방문하여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장경을 지키기 위해 시멘트로 신 장경각을 건축하여 경판 일부를 옮겼으나 부식이 심해 본래의 자리로 환원하였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가야산 해인총림
미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고 대통령은 김 대령에게 그 책임을 추궁했다. 그러나 그분은 후에 해인사를 지켜 낸 공덕을 인정받아 장군으로 진급했다고 한다. 필자가 해인사 입구에서 제일 먼저 본 비석이 김영환 대령 공덕비였다. 여러 선사님들이나 성철스님 부도보다, 눈에 먼저 띄는 그 자리에 그분의 공덕비가 서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대적광전 앞 게시판 못내 아쉬워하신다. 홍제 스님은 대적광전에 주불은 비로나자불이라고 설명하셨다. 삼배를 올리고 명부전 앞을 지나는데 눈에 익은 사진이 보였다. 故 정몽헌 회장의 영정이다. 사진 속에 그분은 활짝 웃고 있는데 객의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우산을 받쳐들고 대적광전 뜰 앞에 내려섰다. 쏟아지는 빗속에 게시판이 홀로 서 있었다. 누군가 한지에 붓글씨로 이렇게 써 놓았다. '나는 것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일어나고 굵은 빗방울을 맞으며 해인사를 내려오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 생에 나도 한번 바다에 도장을 찍어 봐? '이 세상에 나는 사람 어디에서 온 것이며 나는 것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일어나고 뜬구름 그 자체가 본래 실상 없는 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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