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단군조선, 동북아 문명의 공동발원지"

2009. 10. 25. 12:06한민족고대사

 

“단군조선, 동북아문명의 공동발원지”




동아일보 기사


국사편찬위, 내일 ‘상고사토론회’사회과학자 2인 문제제기 눈길




《단군조선이 과연 신화에서 역사로 거듭날 수 있을까.


역사학계에서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단군조선은 신화를 벗어나지 못했다.

실증사학의 전통을 중시하는 국내 학계에선 국가 성립이 이뤄지는 청동기문명이

만주지역에선 빨라야 기원전 15세기경, 한반도에선 기원전 10세기경에나

이뤄졌다는 점에서 단군조선을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중국사서에 반복 등장하는 고조선이 기원전 7, 8세기경부터

부족들의 연맹국가 형식으로 존재하다

기원전 4세기경 기자를 따르는 무리에 의해 철기문명이 전해졌고

기원전 2세기경 중국 연의 망명객 위만에 의해 왕권 찬탈이 이뤄질 무렵

강력한 왕권이 확립된 고대 왕국으로 발전했다고 봐 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배후에 숨어 있는

랴오허(遼河)문명론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런 시각에 대한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랴오허 강 유역인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츠펑(赤峰) 시 일대와

랴오닝(遼寧) 성 차오양(朝陽) 시 일대에서

중국 황허(黃河)문명을 훨씬 앞지르는 신석기와 청동기 유적이 대거 발굴됐다.



신석기는 기원전 7000년경까지 올라가

기원전 4500년경 황허의 양사오(仰韶)문화나

기원전 5000년경의 창장(長江) 강 유역 허무두(河姆渡)문화보다

2000년 이상 앞선다.》


 

 

 

 

 

청동기의 경우도 순동과 석기가 함께 사용된 동석(銅石)병용시대가

츠펑(적봉) 시 일대를 중심으로 한

훙산(紅山)문화 만기(晩期·기원전 3500년∼기원전 3000년)에 이미 시작됐고,

본격 청동기시대에 진입한 샤자뎬(夏家店)하층문화도

기원전 20세기경 시작됐다는 점에서 황허문명의 청동기

진입시기(기원전 16세기경)를 훨씬 앞지른다.



문제는 이들 랴오허문명(요하문명)권이 그동안 우리가 고조선의 영역이라 짐작했던

요동을 넘어서 요서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 고대문화의 정체성으로 생각해 왔던 빗살무늬토기, 돌무덤, 석성,

비파형 청동검 뿐 아니라 중국 문화의 상징으로 여겼던 용, 옥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유물도 출토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중국학계 일각에선 랴오허문명과 황허문명이 만나

중국 문명을 이뤘다거나, 한 발 더 나아가 랴오허문명이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

주장하며 과거 동이족 문화 전체를 중국 문명의 일부로 포섭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학계의 인식은 동북공정이 고구려사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서 멈춰 있다.


여기에는 기존 통설을 뒤집는 파천황적 변화가 가져온 충격도 크지만

학계의 고질인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불화도 한몫한다.



역사학의 주류를 자처해 온

강단사학에선 정통으로 역사학을 공부하지 않은 고대사 연구자들을 재야사학이라 폄훼해 왔다.


재야사학계에선 오래전부터 단군조선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실체임을 주장하면서

만주뿐 아니라 중국 본토까지도 우리 민족의 고토라고 주장해 왔다.


랴오허문명과 관련해 새롭게 드러난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이런 재야사학계의 주장을 상당 부분 뒷받침한다.



강단사학계의 깊은 시름은 여기에 연유한다.

랴오허문명과 단군조선의 연계성을 인정할 경우

초민족주의적인 재야사학의 손을 들어줘야 하고 그렇다고 이를 부인한다면

중국의 역사왜곡에 말려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연 해법은 없을까.



28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열리는 ‘상고사 토론회’가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토론회는 이례적으로 재야사학자도, 강단사학자도 아닌

2명의 사회과학자가 초청됐다.

연세대 사회학 박사 출신으로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을 쓴

우실하(47) 항공대 교수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박사 출신인 ‘대쥬신을 찾아서’의 저자 김운회(46) 동양대 교수다.


동양사회사상사를 전공한 우 교수가 랴오허문명의 고고학 발굴 현장을 답사하고 관련 논문을 독파해

랴오허문명론의 실체를 파헤친 학자라면


중국 25사를 독파한 김 교수는 중국이 동호, 숙신, 예맥으로 분류한 동이족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문헌학을 통해 펼쳐 왔다.

 

 


우 교수는 1980년대 이후 집중 발굴된 랴오허문명 유적의 실태와 더불어

랴오허문명론의 핵심 이론가인 쑨서우다오(孫守道) 쿼다순(廓大順) 쑤빙치(蘇秉琦)

장비보(張碧波) 등이 고조선의 역사를 중국 역사화하기 위해 황허문명 기원론에서

점차 랴오허문명 기원론으로 이동해 갔음을 보여 준다.


특히 훙산문화의 주역은 단군조선에 등장하는 곰 토템 부족의 원형이며

이를 계승한 샤자뎬(하가점) 하층문화 야말로 단군조선의 실체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중국 25사에 등장하는 동이, 동호, 숙신, 예맥, 읍루 등의 표기가

서로 교차돼 사용되거나 동일 의미로 쓰였음을 보여 주는 문헌 분석을 토대로


한국에 수립된 국가가 ‘쥬신=조선=숙신’,‘고리=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동일국호의 변용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또한 몽골(원), 거란(요), 여진(금·청)과 한반도, 일본이 본디

하나의 동이(東夷)문명권에 속하며 특히 부여족의 이동을 통해

대륙부여(부여), 반도부여(백제), 열도부여(일본)가 성립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두 학자는 ‘동이사=한국사’로 바라보는 기존 재야사학계의 민족주의적

시각에 대해서 비판적 관점을 견지한다.


김 교수는 단군조선이 중국사에서 북적과 동이로 분류된 모든 민족의

공통 기원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 교수는 랴오허문명의 일부가 남하해 황허문명과 결합해 중국문명을 이뤘고

그 남아 있는 문화가 동이족문명을 이뤘다는 점에서 랴오허문명을 동북아 국가들의

‘공통의 시원 문명’으로 공유하자고 주장한다.



단군조선의 전유(專有)가 아니라 공유(共有)를 통해서 동북아 역사 갈등을 풀어갈

지혜를 찾자는 두 사람의 주장이 과연 우리 역사학계에서 어떻게 수용될지

주목된다. (끝)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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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 후기>>


그런데 이 토론회의 자리에 강단사학 중 식민사학의 후예로 의심되는 행동과 저술

활동을 해왔던 교원대 송호정이 참여하여 토론을 벌인다는 것이 문제다.



아래 토론회 일정을 보면....


일시 : 2007년 9월 28일(금) 13시

장소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관 3층 국제회의실

주최 : 국사편찬위원회

주관 : 한국고대학회

후원 :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일 정

13:00 ∼ 13:30  등록

13:30 ∼ 14:00  개회, 사회 : 정운용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국민의례

 환 영 사 : 유영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축    사 : 권철현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장)

 조부영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이사장)

 개 회 사 : 최광식 (한국고대학회 회장)


【주제발표1】

 사회 :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14:00 ∼ 14:50  제1주제

 遼河文明論과 한국상고사

 ▶발 표 : 우실하 (한국항공대학교 교수)

 ▶토 론 : 하문식 (세종대 역사학과)

14:50 ∼ 15:00  휴식


【주제발표2】

15:00 ∼ 15:50  제2주제

 한민족 기원과 대쥬신 - 한국 고대사 천년의 패러다임을 넘어 -

 ▶발 표 : 김운회 (동양대학교 교수)

 ▶토 론 : 송호정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15:50 ∼ 16:00  휴식

16:00 ∼ 17:30  종합토론, 사회 : 신형식 (상명대 사학과)

17:30  폐회



왜 문제가 되는가?

 

홍산문명, 요하문명의 동이족 문화 발상설은 고사하고

고조선의 건국설과 기원전 누천년의 고조선 등 선대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만주 요동 등의 청동기문화를 축소 호도하며,

 

국정교과서의 고조선 건국 BC 2,333년 확정을 기를 쓰고 부정하며,

 

요서 지방의 청동기 문화 등을 동호니 산융이니 하며 우리 족원을 혼란속에 밀어넣었으며,

 

이미 폐기처분의 상태에 놓인‘한반도 한사군설’을 어린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자가 바로 이 송호정이란 학자이기 때문이다.

 

 


S대 나와서 일관되게 역사 파 댓으니, 논리야 정연하겠고,(s대 비판은 아님이 본질임) 

발제(표)자로 나온 두사람(우실하, 김운회)은 사실 역사 아웃사이더로서 뒤늦게

우리 역사의 왜곡 상에

절치부심하며 노력하여 남의 영역 공부한 사람이니,


교묘한 말발이야 이 자를 당해 내겠는가?

그래서 문제이다.



따라서, 어려운 기회를 얻어 이루어지는 중요한 토론회이니 만큼

민족의 참역사를 연구했던 강호 이론가들의 적극적 토론회 참석을 희망합니다.


저들이 어떤 궤변으로 곡학아세 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살피고,

모순을 보일 때는 즉시 지적하여 바로잡아야 하지 안을까요!




아래는 그 송호정이란 학인이 지난 2월 28일자 중앙일보에

총대를 매고 국정교과서의 고조선 건국 확정에 찬물로 얼음짱을 놓은 기사의 일부입니다.


위에서 지적했던 말의 진위를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문기고 인용)

“(前略).... 이번 고등학교 교과서 청동기시대 및 고조선사 수정은

학계의 요구를 반영한 것은 아니다.


수정 내용이 현재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나 일반적 의견과는

상반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고조선 전공자로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고 자괴감마저 든다.


그동안 동북아시아 고고학 자료에 대한 연구는 많은 진전이 있었다.

청동기시대 유적 가운데 기원전 15세기에서 기원전 13세기까지 올라가는 유적들도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그 연대는 학계의 면밀한 검증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중국 동북지방 청동기시대의 전형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반달 칼,

그리고 미송리식 토기 등사용되던 시기는 기원전 10세기부터 시작,

기원전 8~7세기께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중국 및 우리 고고학계의 일반적 견해.


이번 고교 국사교과서의 청동기시대 시작 내용 수정은 그것이 청동기시대

유적인지 검증되지 않은

한두 자료를 근거로

'기원전 2000년께에서 기원전 1500년께에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는

비문(非文)으로 500년의 기간을 끌어올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고조선사 서술은 달라진 것이 없다.

집필자와 언론의 보도처럼 '~고 한다' 세 글자를 뺐다고 해서 신화가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수정된 국사교과서의 초기 고조선에 대한 내용은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봐

그것을 그대로 고조선 사회에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국사교과서에 기술된

기원전 2333년에서 기원전 3세기까지의 2000년에 이르는 고조선 사회는

주로 신화 세계 속에서 묘사되고 있으며,

고조선의 건국을 둘러싼 역사상이나 고조선의 사회상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 청동기시대에 부족 연합체로서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인 단군조선은

만주나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군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333년으로 잡은 것 역시

중국의 전설상 임금인 요임금의 즉위년을 추정해 본 중국인의 생각을

동국통감에서 인용한 것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번 고조선사 수정 과정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한다는 목적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정치 전략 차원에서 접근하는 동북공정 문제를

우리가 학계의 연구 성과와는 무관하게 연대 끌어올리기로

졸속 대응하려는 점은 큰 문제다.


다른 분야와 달리 고조선사 서술에는 재야사학자나 일반 시민의 견해를

고려하는 등 학문 외적인 요인이 많이 작용한다.


그러나 수십만 명의 청소년이 배우는 교과서가

학문 외적인 논리로 학계의 견해와 무관하게 개정되는 구조는 심각한 문제다.


동북공정에 대응한다는 조급함과 검증되지 않은 내용 수정은 우리 국정교과서 편찬 수준을 그대로 드러냈다.


교과서는 대부분의 학생은 물론 일반 대중의 당대 역사인식을 확인하는 텍스트다.

이 때문에 기존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해 신중히 서술해야 한다.


특히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던 단군과 고조선사 부분은 학계의 주장 가운데

합리적이고 다수인 견해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처럼 우리 역사의 시작을 학계의 검증 절차 없이 몇 백 년, 몇 천 년을

끌어올린다고 우리 역사가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역사 서술은 사료에 근거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이 돼야 한다.


송호정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기사 인용 끝)



이 글에서 ‘학계’를 계속 인용하는데, “학계의 연구 성과와 무관하게”,“학계의 견해와 무관하게”,

“학계의 주장”등등의‘학계’를 자신들 기득권 학파를 지칭한 것 같은데,

 

이건 천만의 말씀이다.

학문 주류세력의 이론이 옳다는 객관적 증거를 내봐라. 학문과 역사의 발전은 비주류와 아웃사이더로부터

나와진 것이 무수한 경우도 있다는 것 잊지 말길...


(고)조선을 인용한 문헌이 다수 존재하고, 홍산문화, 하가점 문화가 동이족의 습속과 전통을 반영한 유물로 드러내고,

중국이 이 문화들을 자기들의 고유 문화의 본류라고 생떼를 쓰고 있는 정황이 있는 것들이

합리적이고 과학적 증좌가 아닌가?


소수 힘쓰는 메인스트림인 자신들의 주장 가운데 합리적이고 다수의 견해를 수용해 달라고?

그 외에는 어떤 연구성과나 유물 유적이 드러나도 자신들의 기존 논리에 배치되면

검증되지 않은 한두 자료이고, 기간을 끌어 올리는 우를 범하는 것인가?


요하, 만주, 홍산문화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유물들을 보며, 이 지역에

고조선의 건국을 둘러싼 역사상이나 고조선의 사회상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고 하는가?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인 단군조선은

만주나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러하니 폐기처분의 상황에 몰린‘한반도 한사군설’을 아래처럼 신봉하지 않겠는가?


 

 

 

 

제발 학자로서의 냉정과 공정성과 객관성과 과학성을 되찾기를 앙망한다....

또한  장래에 국민들로부터 매국지사로 지목되어 수치속에서 한탄하는 일 없기를 바란다....

출처 : 한(桓) 동이민족사
글쓴이 : 稽古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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