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최만리 선조님과 세종임금

2009. 7. 17. 09:09대한민국 가문 탐구

세종과 최만리

 
1444년(세종 26)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상소로 인하여 최만리는 극단적 사대주의자이며 보수주의자로 비난 받았으며 반민족주의자로 낙인 찍히기도 하였다. 반면에 최만리는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추천된 사람이며 한글 창제의 협력자인바 그를 사대주의자 내지 반민족주의자로 비난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오해와 현대적 편견의 소치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실록 등의 나타난 내용을 토대로 최만리는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최만리를 대표로 하여 올린 이른바 언문 창제 반대 상소문에 담긴 구체적인 주장은 무엇이며 나아가 그 주장들의 근거는 어떠한 것인지, 세종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주장을 꺾기 위해 어떻게 조치하였는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1. 최만리는 어떤사람인가?
   
1.1. 최만리의 생애
최만리(崔萬理)의 본관은 해주(海州)로 해동공자라 일컬어지는 최충(崔冲, 984-1068)의 12대손이며 보한집(補閑集)의 저자인 최자(崔滋, 1188-1260)의 6대손이다. 또한 그의 외동딸이 본관이 덕수(德水)인 이의석(李宜碩)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의석의 증손(曾孫)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이다. 즉 이이는 최만리의 외현손(外玄孫)이 된다. 최만리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419년(세종 1) 4월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한 것으로 보아 1390년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세종(1397-1450)보다 나이가 약간 많거나 비슷했을 것이다. 과거에 급제한 최만리는 정9품인 정자(正字)라는 벼슬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 수문전(修文殿), 집현전, 보문각(寶文閣)을 두었었는데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며 문신에게 관직만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1420년(세종 2) 3월에 이르러 이 기관들 중 집현전만을 남겨 관사(官司)를 궁중에 설치하고, 다음의 표와 같이 직제를 정하였다. 아울러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해 집현전의 관리로 임명하여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다음해인 이 때 최만리는 집현전의 정7품 박사에 임명되었다.

 

 

1427년(세종 9)에 교리로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응교에 올랐으며 같은 해 7월에 세자[문종(文宗)]가 조현(朝見) 할 때의 서장관겸검찰관(書狀官兼檢察官)으로 직제학 정인지(鄭麟趾)와 집의 김종 역시 같은 해 8월에 세종이 세자(世子)에게 전지하여 매일 주강(晝講)할 때 좌필선(左弼善) 정인지(鄭麟趾)와 우문학(右文學) 최만리가 번갈아 가며 고금의 유익한 말과 훌륭한 정치를 진술하고 민간의 일을 들려주기도 하며 저녁에 이르러서야 나가게 하는 것을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라고 한 기록이 보이는바 이때 최만리는 집현전 응교로서 우문학을 겸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만리는 이후 수 년에 걸쳐 집현전 관리로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였던 듯하다. 1431년(세종 13) 10월 기사에 세자가 시종(侍從)한 지 오래된 최만리와 박중림(朴仲林)이 들어와서 강(講)할 때는 스스럼없이 상당히 어려운 것을 묻는 데 비해 날마다 교대로 들어오는 나머지 관원들에 대해서는 낯선 까닭에 세자가 부끄러워 머뭇머뭇하면서 말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은 서연관을 겸관이 아닌 녹관으로 바꾸었는데 서연관은 녹관을 두어 오랫동안 그 임무만을 전담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최만리는 1432년(세종 14)부터 1435년(세종 17) 7월까지 세자 좌보덕(左輔德, 종3품)을 맡았는데 겸관이 아니므로 이 시기에는 집현전의 직책은 맡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35년(세종 17) 7월에 이조(吏曹)에서 집현전의 기능이 임금 앞에서 글을 강론하는 것인바 서연관의 직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별도의 녹관을 둘 필요가 없이 집현전에 합칠 것을 주청하니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최만리는 세자 좌보덕에서 집현전 직제학으로 소속이 옮겨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436년(세종 18) 4월에 집현전 직제학 최만리를 초시의 대독관(代讀官)으로 삼았다는 기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438년(세종 20) 7월에 집현전 부제학에 오르고, 이듬해인 1439년 6월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1년 후인 1440년(세종 22) 7월에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1444(세종 26)년에 상소문제로 사직하기 전까지 계속 집현전 부제학으로 남아 있었다. 사직하고 낙향한 이듬해인 1445년(세종 27년) 10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

1.2. 세종과 최만리의 관계

앞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최만리가 관직에 있었던 25년 간의 대부분을 집현전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집현전에 소속되지 않았던 기간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던 1년 간과 세자의 서연관으로 겸직이 금지되었던 5년 간인데 이 중 세자의 서연관으로 있던 5년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형식상으로만 집현전 소속이 아니었을 뿐 실제로는 집현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종이 집현전에 무척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바 집현전이 새로 확장되던 때부터 붙박이로 근무한 최만리 또한 세종이 대단히 아끼는 신하였다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세종과 최만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해주 최씨 집안에 전해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참조할 수 있다.

최만리는 술을 좋아하였다. 어느 날은 취한 채로 어전에 들어가 임금을 뵈었더니 세종이 만리를 걱정하여 “경은 몸을 생각하여 앞으로 세 잔 이상씩은 마시지 마오.” 하였다. 이에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만리는 자신이 쓸 술잔을 스스로 크게 만들어 하루 세 잔씩만 마셨다. 후에 세종이 만리를 접견할 때 술을 많이 마셨음을 알고 나무라기를 “경은 또 취기를 띄고 나왔으니 어떻게 된 것이오 ” 하니 옆에 있던 동료가 말하기를 “만리는 어명대로 세 잔만을 마셨을 뿐입니다. 단지 스스로 큰 술잔을 만들어 마셨습니다.” 하였다. 이에 세종이 껄껄 웃으며 “경이 왕명을 그토록 철저히 지킬 줄은 몰랐소.” 하고 바로 명하여 공관(工官)으로 하여금 큰 은 술잔을 만들게 하여 그 잔을 집현전 본관에 갖다 두고 수시로 만리를 접대하게 하였다.

세종이 최만리에게 신문(新門) 밖의 저택을 하사하였다. 세상사람들은 이곳을 천 칸의 집이 들어설 만큼 넓다 하여 천간허(千間墟)라 불렀으며 그 고개 이름을 만리현(萬理峴)이라 불렀다.

최만리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 이듬해(1445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세종은 만리가 가고 없는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항상 비워둔 채 언제나 만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만리의 부음(訃音)을 듣고서는“대쪽같은 만리가... 결국은 죽었구나.” 하며 침식을 잊은 채 오랫동안 슬퍼하였다.



이상의 이야기는 최만리의 집안에서 전해오는 것이므로 최만리를 높이기 위해 상당히 윤색되었을 것이기는 하나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첫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역시 가승(家乘)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세종이 최만리에게 하사한 은잔이 집현전[후에 홍문관]에 계속 남아 있었는데 임진왜란 중에 없어졌다고 한다.

둘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현재 서울 마포구 공덕동과 중구 만리동2가 사이에 만리재[萬里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세종이 최만리에게 하사한 집이 있던 곳이라 한다. 현재는 ‘마을 리(里)’자를 쓰고 있는데 위의 이야기가 맞다면 와전된 것이라 하겠다. ‘만리동’이란 이름은 1946년에 일본식 지명을 고치며 ‘만리재’에서 따온 것이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 청파초등학교 뒷산에 만리창(萬里倉) 터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최만리가 탁지부(度支部) 외창(外倉)을 남대문 밖 연산강(燕山江) 위에 처음으로 세웠으므로 그 창고 이름을 만리창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최만리가 호조의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이는 믿을 수가 없다.

셋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최만리 이후 집현전 부제학의 임명이 1448년(세종 30) 5월에 가서야 이루어졌음을 참고할 수 있다. 실록에 따르면 정창손(鄭昌孫, 1402-1487)을 이 때 집현전 부제학으로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만리가 죽은 후 3년 후에야 집학전 부제학이 새로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세종이 최만리를 기다리기 위해 부제학 자리를 비워 놓았다기보다는 부제학에 임명할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최만리가 집현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컸었음을 짐작게 한다

1.3. 최만리가 올린 상소문들의 내용
실록에 따르면 최만리는 모두 14차례의 상소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3회의 상소는 일반 행정상의 과오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6차례는 세종의 불사(佛事)와 관련하여 척불(斥佛)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중간에 이 척불 상소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 상소를 한 차례 올렸다. 이후 3회는 세자의 섭정을 반대하기 위해 올린 것들이다.

최만리와 세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바 있으나 세조실록에 보이는 기사를 더 참조할 수 있다. 세조가 공신들을 모아 놓고 연회를 베풀다 필선(弼善) 정효상(鄭孝常)에게 이르기를 “문종이 세자였을 때, 서연관 최만리·박중림 등이 세자를 보익(輔翼)하며 하나라도 조그마한 과실(過失)이 있으면 문득 간(諫)하여 마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도 생각하면, 이 두 신하는 그 직책(職責)을 능히 다하였다고 할 만하다. 이제 그대들은 한번도 선한 말을 진달(陳達)하여 세자(世子)를 경계한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아첨(阿諂)함이 심하다 할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최만리는 문종이 스스럼 없이 대할 정도로 친했으되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아주 엄한 스승이었다 할 것이다. 세자의 스승인 최만리는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의 섭정을 시행하려 하자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이러한 반대는 신하된 당연한 도리이며 비단 최만리만 이러한 상소를 올린 것이 아니므로 그다지 특징적인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자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최만리의 청렴성을 확인시켜 준다 할 것이다.

최만리가 마지막으로 올린 것이 바로 문제의 언문 창제 반대 상소이다. 『연려실기술』이나 『대동야승』에는 『필원잡기』의 기사를 인용하여 최만리가 환관의 복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되어 있는데 실록에 이러한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2.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와 세종의 처결
   
2.1.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의 배경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에서 20여 년을 근무하여 집현전의 실질적인 최고 직책인 부제학을 맡고 있던 최만리는 왜 세종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이루고자 하는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고 나선 것일까 그것도 창제가 다 이루어진 후 2달이나 지난 시점에서 말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는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즉 1444년(세종 26) 2월 16일에 세종이 한글로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번역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최만리 등의 상소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실록에 실린 2월 16일 기사의 내용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1444년 2월 16일 기사에 따르면 세종은 집현전 학사 중 교리 최항(崔恒), 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 신숙주(申叔舟)·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와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강희안을 의사청(議事廳)에 나오도록 하여 한글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도록 명하였다. 또 동궁[세자]과 진양대군[수양대군],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이 사업을 감독하여 관장하게 하였으나 모든 일은 임금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도록 하였다. 상을 줌에도 후하게 하였으며 물자를 보급함에도 매우 우대하도록 하였다. 이상이 기사의 내용이다. 의사청이란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장소이고 『운회』는 앞서 밝혔듯이 『고금운회거요』를 말한다.

이 기사 내용을 통하여 세종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 사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세자와 대군들이 감독하게 하고도 일일이 세종 자신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였으며 특별히 상도 후하게 주고 물자 공급도 우대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사에서 ‘상을 줌에도 후하게 하였다[賞賜稠重]’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2월 16일 명령을 내리며 앞으로 일을 잘하란 의미에서 상을 후하게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상을 후하게 주었다는 것인가 그런데 일반적인 경우는 사업이 완료되고 나서 그에 따라 포상하는 법인바 이러한 예에 비추어 본다면 이 부분은 어느 쪽으로도 해석해도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록 기사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실록의 기사는 날짜별로 기록되며 일반적으로 그날 일어난 일을 기록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날 내지 상당 기간의 걸치는 사건임에도 하루치 기사에 몰아서 넣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해당 기사는 대개 사건이 시작된 날, 사건이 끝난 날에 실리게 되는데 간혹 사건이 진행 중인 중간 날에 실리기도 한다. 이는 실록이 왕의 사후 수 년 내지 수 십년 치의 기록을 모아 간행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2월 16일의 이 기사 역시 그 날 하루 동안에 벌어진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상당 기간에 걸친 일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뒤에서 살펴볼 최만리 등의 상소문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언급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즉 4일 뒤인 2월 20일에 올린 상소에서 최만리 등은 “옛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치고 근거도 없는 언문으로 음을 달아 공장(工匠) 수십 인을 불러들여 이를 새겨서 급하게 널리 유포시키려 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의 운서를 고쳤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최만리 등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이 가지는 특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할 것인데 2월 16일에 이 명령이 내려진 것이라면 불과 4일만에(실제로는 상소문을 준비하는 데 하루 내지 이틀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므로 명령이 내려진 직후일 것이다) 번역의 기본 방향이 잡히고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는 무리한 가정을 해야 한다. 더구나 새겨서 인쇄하여 반포하려 한다는 것은 이미 원고가 완성 단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 준다 할 것이다.

따라서 2월 16일의 이 기사는 이 때 『운회』의 번역을 명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이러한 명이 있었고 이날 원고가 상당히 완성되었기에 불러 상을 내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운회』의 번역을 명한 것은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아마 훈민정음의 창제 직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즉 1443년 12월에 이러한 명이 있었고 약 2달의 기간이 걸려 원고가 상당 부분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2.2. 세종과 최만리 등의 논쟁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辛碩祖), 직전 김문(金汶),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河緯之), 부수찬 송처검(宋處儉), 저작랑 조근(趙瑾)이 연명하여 이른바 언문 창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여기서는 실록 및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토대로 세종과 최만리 등의 주장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세종과 최만리 등이 대화하며 논쟁을 벌이는 가상적인 장면을 설정하였다. 이해의 편이를 위하여 말투도 가능한 한 현대적으로 구성하였다.

세 종: 내가 만든 훈민정음에 대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만리: 언문을 만드신 것이 지극히 신묘(神妙)합니다. 전하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발휘하시는 능력이 천고(千古)에 뛰어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간곡한 마음으로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부디 잘 판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 종: 그대들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으니 말하도록 하라.

최만리: 우리 조선은 건국 이래로 정성을 다해 사대(事大)를 하였으며 모든 일에 있어서는 중국의 제도를 따라 행하여 왔습니다. 이리하여 이제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글을 쓰고 같은 제도를 시행하는 문명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언문(諺文)을 창작하셨으니 보고 듣는 저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종: 훈민정음을 창작했다고 하는데 훈민정음은 완전히 새로 만든 글자가 아니라 모두 옛 글자에 근본을 두고 있다. 즉 글자의 형태는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지 않았느냐
최만리: 그러나 소리로써 글자를 합성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어긋나니 진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일입니다. 만약 이 언문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 이를 두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사대모화(事大慕華)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세 종: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정음을 만든 것은 사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의 제도를 가져다 쓰더라도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바꾸어 적용하지 않느냐 한자로는 우리말을 쉽게 또 정확히 적을 수 없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즉 이러한 우리의 실정을 고려하여 정음을 만든 것일 뿐이다. 나는 즉위한 이래 사대모화에 대해 조금도 소홀히 한 일이 없고 이러한 사실은 황제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혹 모함하려는 자가 정음을 만든 것을 빌미로 문제를 삼는다면 우리의 뜻이 사대모화에서 조금도 어긋난 적이 없음을 밝히고 이것이 오로지 우리나라 백성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임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최만리: 예로부터 9개 지역으로 나뉜 중국 안에서 기후나 지리가 비록 다르더라도 방언에 따라서 따로 글자를 만든 일이 없습니다. 오직 몽고, 서하(西夏), 여진, 일본, 서번(西蕃)과 같은 무리만이 제각기 자기들의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오랑캐들의 일이므로 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옛 글에도 중국(中國)의 문화로서 오랑캐의 문화를 변화시킨다 하였지 중국의 문화가 오랑캐 문화에 의해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대하여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을 간직하고 있어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중국과 견줄 만하다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향기로운 명약인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쇠똥구리가 만든 쇠똥 덩어리를 취하는 격이라 할 것입니다. 이 어찌 문명에 있어 큰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세 종: 대개 음(音)의 같음과 다름은 그 자체로 같고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같음과 다름에 기인하는 것이며, 사람의 같음과 다름은 또한 지방이 같고 다름에 기인한다. 즉 지세가 다르면 기후가 다르고, 기후가 다르면 사람들이 숨쉬는 것(발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 세상의 문자와 제도를 통일시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발음이나 말은 같아지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산하가 저절로 한 구획을 이루어 지리와 기후가 중국과 크게 다르니, 말소리가 어찌 중국어의 것과 서로 부합될 수 있겠는가 그러한즉 언어가 중국과 다른 까닭은 당연한 이치이다. 즉 예악과 문물은 우리가 중국과 같아질 수 있으나 언어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고 정음을 만드는 것이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라 하는 그대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최만리: 신라의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는 비록 거칠고 촌스러우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다가 어조사를 적는 데 이용하므로 한자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급 관리나 하인들이 이두를 익히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한문으로 된 여러 책을 읽어서 한자를 대강이라도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이두를 사용하게 됩니다. 즉 이두를 사용할지라도 반드시 한자에 의거하여야만 뜻을 통할 수 있으니 이두 때문에 한자를 공부하여 알게 되는 사람이 상당히 많고 따라서 학문을 진흥시키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예전부터 문자가 없어 끈을 묶어 의사소통을 하던 시대와 같다면 임시방편으로나마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올바른 소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임시방편으로 언문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좀 시일이 걸리더라도 중국에서 통행하는 한자를 익히도록 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낫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수천 년 동안 써오면서 문서나 계약서 등을 작성하는 데 어떠한 장애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이두를 바꾸어 따로 속되고 무익한 글자를 만든단 말씀입니까

만일 언문이 통용되면 관리가 되려는 사람들이 오로지 언문만을 익히고 한자를 배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관리가 되려는 사람이 언문으로써 벼슬자리에 오를 경우 뒷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일을 보고 ‘27자의 언문으로써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힘들여 성리학을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십 년 뒤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매우 적어질 것입니다. 비록 한글로써 능히 관공서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현(聖賢)의 문자를 알지 못하면 배우지 않고 담벼락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과 같아서 사리(事理)의 시비를 따지는 데는 어둡고 헛되이 언문(諺文)에만 공을 드릴 것이니 장차 어디에 쓸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쌓아왔던 학문[성리학]을 숭상하는 정책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까 두렵습니다.

이전부터 써 오던 이두도 비록 한자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님에도 식자층에서는 오히려 이를 속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 바꾸려고 하는 형편인데 하물며 언문은 한자와 전혀 관련이 없고 오로지 시장거리의 속된 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까 가령 언문이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문명한 정치를 이루려고 하는 때에 ‘여전히 언문을 인습적으로 그대로 사용하시겠습니까 ’ 하고 반드시 이를 바로잡겠다고 논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래된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일반적인 폐단입니다. 지금의 이 언문은 하나의 신기한 재주에 불과할 뿐입니다. 학문에 있어서는 손실만 가져오고 다스림에 있어서는 아무런 이로움도 없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아도 그 옳음을 알 수 없습니다.


세 종: 앞서 그대들이 이르기를 ‘정음은 소리를 쓰고 글자를 합성함에 있어서 모두 옛 것에 어긋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 또한 소리를 달리한 것이 아니냐 게다가 이두를 제작한 본래의 뜻도 바로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만일 이두(吏讀)가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언문(諺文)도 또한 백성들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은 설총(薛聰)이 한 일은 옳다고 하면서 군상(君上)이 한 일은 그릇되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또 언문을 제작한 것이 신기한 하나의 기예(技藝)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늙으막에 소일하기 어려워 책을 벗삼고 있을 뿐이니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만을 좋아하여 정음을 만들었겠는가 그리고 또한 이는 사냥을 하며 매를 풀어 놓은 일 등과는 다르다. 그러니 그대들의 말은 상당히 지나친 점이 있다.

최만리: 하나의 신기한 재주라고 말씀드린 것은 말을 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온 것이비 별다른 뜻이 있는 있어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세 종: 또한 내가 하급 관리들을 선발하는 데 정음을 넣도록 하였으나 전적으로 정음만을 대상으로 시험 보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대과(大科)의 경우에는 정음을 시험 과목에 편입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학문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대들의 주장은 너무 과장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다스림에 있어 아무 이로움도 없다 했는데 이 또한 옳지 않다. 가령 형을 집행하고 죄인 다스리는 문서들을 이두와 한문으로 써 왔는바 글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한 글자의 차이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만약 정음으로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적은 후 읽어 준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모두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최만리: 중국은 예전부터 말과 문자가 동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일이나 소송 사건에 있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힌 죄인 가운데 이두를 아는 사람이 직접 자신이 진술한 내용을 읽어 보고 그 내용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음을 발견하더라도 매를 견디지 못해서 승복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로 보건대 글의 뜻을 몰라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언문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즉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리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그 일을 담당한 관리가 어떠한 자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말과 글이 다르거나 다르지 않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문으로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저희들은 의심이 됩니다.


세 종: 내 일찍이 어리석은 백성들이 법률 조문을 몰라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법률 조문을 다 알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따로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서 이를 이두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면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교한 적이 있다.
그때 이조판서 허조(許稠)가 말하기를 ‘백성 중 간악한 무리들이 법률 조문을 자세히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고려하여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일들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그렇다면 백성이 알지 못하도록 내버려 두어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백성이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서 범법한 자를 벌준다면,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느냐 더욱이 선대의 임금들께서 재판시에 법률 조문을 읽게 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사람마다 모두 알게 하고자 함이 아니냐 ’ 하고 꾸짖은 적이 있다. 그대들의 말은 허조의 말과 같다 하겠다.
죄인을 공정하게 다루는가 하는 문제가 관리의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공정한 관리도 착오를 범하여 억울한 죄인을 만들 수 있다. 죄인을 다스림에 정음을 사용하면 억울한 일이 다소라도 줄어들 것이다. 죄인을 다스릴 적에 문서를 정음으로 작성하여 들려 주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라는 것은 정음이 쓰일 수 있는 한 예일 뿐이다. 가령 만약에 정음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한다면 일반 백성들이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충신·효자·열녀가 많이 나오지 않겠느냐

정창손: 비록 언문으로 번역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백성들이 알기 쉽도록 그림으로 그려 삼강행실도를 반포하였으나 그 뒤에 충신·효자·열녀가 많이 나온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이 삼강(三綱)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자질이 어떠하냐에 달린 것입니다. 반드시 언문으로 그 책을 번역, 배포한 뒤라야만 사람들이 그러한 행실을 본받는다고 어찌 보장하시겠습니까


세 종: 그대의 말은 허조의 말보다 심하구나. 이것이 어찌 이치를 아는 선비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교화나 가르침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냐 사람의 자질도 교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지 않고 자질 탓만을 하는 것이 선비된 도리로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느냐 그대야말로 참으로 쓸모없는 속된 선비에 불과하다.

최만리: 무릇 일을 이루고 공을 세움에 있어서는 빠른 시일 안에 서둘러 마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근래의 국가의 조치들은 모두 빨리 이루는 데에만 힘을 쓰고 있으니 이는 다스리는 근본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비록 언문이 부득이하여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들로부터 아래로는 하급 관리와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함께 상의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설혹 모두 옳다고 하더라도 시행하기 전후에 백성들에게 충분히 그 뜻을 거듭 설명한 다음 다시 세 번 더 생각하여 역대 제왕들의 다스림에 비추어 보아도 어긋남이 없고 중국과 상고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후세에 성인(聖人)이 다시 태어나 이를 보더라도 의심스러운 바가 없는 다음에야 비로소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사람의 뜻을 널리 묻지도 않고 하급 관리 10여 인에게 명하여 정음을 익히게 하며 또 옛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쳐서 황당한 언문을 붙여서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서 이를 새겨서 급하게 널리 유포시키려 하시니 천하와 후세의 공론이 어떠하겠습니까
게다가 이번에 청주(淸州) 초수리(椒水里)에 행차하심에 있어 올해 흉년이 든 것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간략하게 시행하도록 하셨는바 전에 비하여 10 중 8,9정도를 생략하시고 전하께 아뢰어야 할 공무(公務)도 모든 것을 대신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언문은 국가의 긴급한 일도 아니고, 부득이한 기한이 있는 일이 아님에도 어찌 행재소(行在所)에서까지 급하게 서두르시어 전하의 옥체를 조섭해야 할 시기에 번거롭게 하시는 것입니까 저희들은 더욱 그 옳은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 종: 그대들이 운서(韻書)를 아는가 사성(四聲)과 칠음(七音)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는가 우리나라의 한자음은 마땅히 중국의 음과 부합되어야 할 것이나 오랜 세월 동안 말해지는 사이에 자음과 모음이 저절로 어음에 이끌렸으니, 이것이 곧 한자음이 역시 따라서 변한 까닭이다. 비록 그 음은 변했더라도 청탁이나 사성은 예전과 같을 수 있을 것인데 일찍이 그 바른 것을 전해 주는 책이 없다. 그래서 어리석은 스승이나 일반 선비들이 반절법도 모르고 자모와 운모의 분류 방식도 모르고 혹은 글자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음으로 하고, 혹은 앞 시대에 임금의 휘자이기 때문에 피하던 것으로 인해서 다른 음을 빌려 쓰기도 하고, 혹은 두 글자를 합해서 하나로 하기도 하고, 혹은 한 음을 둘로 나누도 하며, 혹은 전혀 다른 글자를 빌려 쓰기도 하며, 혹은 점이나 획을 더하거나 덜며, 혹은 중국 본토음을 따르고 혹은 우리 나라 음을 따라서 자모와 발음, 청탁, 사성이 모두 변하였다. 만약 내가 이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는가

최만리: 예전 선비의 글에 이르기를 ‘무릇 모든 신기하고 보기 좋은 일들이 선비의 뜻을 빼앗아 간다. 편지 쓰기는 선비의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전적으로 이것만을 좋아하면 이 또한 저절로 뜻을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동궁께서는 비록 덕성을 많이 성취하셨지만 아직은 성학(聖學)에 깊이 마음을 써서 모자라는 점을 더욱 닦아야 하 것입니다. 언문이 설사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단지 선비의 육예(六藝)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치도(治道)에는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인데 동궁께서 이 일에 정신을 쏟고 마음을 기울여 날을 마치고 시간을 보내니 이는 실로 현재 시급히 닦아야 할 학문에 손해가 됩니다.

세 종: 내가 나이 들어 국가의 서무(庶務)는 세자가 맡아서 하는 까닭에 비록 작은 일이라도 세자가 마땅히 참여하여 결정하는데 하물며 정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이 이 일을 맡아서 해야겠느냐

최만리: 공적인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동궁께서 참여하여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그리 급박하지 않은 일에까지 하루 종일 마음을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 종: 정음을 만드는 일이 어찌 국가의 공적인 일이 아니란 말이냐 그대들과 더 이상 말하기 어렵다. 어찌 생각이 이리 다를 수 있단 말이냐

최만리: 저희들이 모두 보잘 것 없는 재주를 가지고 외람되게도 전하를 모시고 있으므로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감히 담고만 있을 없어 이에 삼가 가슴속에 가진 생각을 다 아뢰어 전하의 어지심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세 종: 그대들이 나를 가까이서 시종하므로 나의 뜻을 명확하게 알 것인데도 이같이 행동하니 이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으냐 또한 이전에 김문(金汶)은 말하기를 ‘언문을 제작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니다’ 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반대로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무리에 포함되어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내가 그대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눈 것은 정음에 관한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금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답하고 궁지에 몰리면 말을 교묘하게 바꾸어 응답하니 그대들에게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을 의금부에 하옥시켜라. 또 의금부에서는 김문이 전후에 태도를 바꾸어 말하게 된 사유를 조사하여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할지 결정하도록 하라.


세종은 그리고 그 다음날 이들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는데 속된 선비라는 꾸지람을 들은 정창손은 파직시키고 처음에는 정음 제정이 좋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반대를 하여 말을 바꾼 김문에게는 벌금을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창손도 얼마 후 다시 복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앞서 살펴보았듯이 최만리에 이어 부제학에 오른다. 김문의 죄는 의금부에서 조사하여 보고한 바로는 장(杖) 100대를 맞고, 소금을 굽거나 쇠를 만드는 등의 노역을 3년 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노역은 시키지 않고 장(杖) 100대도 직접 매를 맞지 않고 돈을 내어 속죄하도록 한 것이었다. 최만리는 다음날 석방되어 복직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여 살다가 다음해에 작고하였다.

2.3. 최만리 등의 상소에 대한 평가

최만리 등 같이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정음 제정의 반대 사유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주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국가적 이념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입장에 선 것이다. 사대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세종과 최만리 등이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최만리 등을 사대주의자로 몰아 세우는 것은 역사적 몰이해에서 빚어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은 앞서 보았듯이 『고금운회거요』를 번역하여 한글로 음을 달아 펴 내도록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급작스럽게 운서를 바꾸어 편찬하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를 아느냐 하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바로잡겠느냐고 하였다. 『고금운회거요』에 어떠한 한자음을 붙였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다음 해인 1447년에 간행된 『동국정운』의 한자음과 거의 같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최만리 등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을 바꾸어 중국 운서에 맞추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표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국정운식으로 한자음을 개신하려는 세종의 정책은 실패하였으니 최만리 등의 주장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을 놓고 최만리는 한글 창제의 협력자이며 그 상소는 한글 창제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한자음의 개정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다소의 무리가 있다. 상소문에 분명히 이두만으로 충분한데 굳이 언문을 만들어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서두에서 한글은 지극히 신묘한 것이라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금에 대한 예우의 말이고 또 이 말이 훈민정음의 정인지서에도 그대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만리 등의 말이 아니라 인용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가지는 의의는 최만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으나 사료의 부족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다수이다. 최만리 등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상소를 올림으로써 그 상소의 내용을 통해 간접적이고 부족하게나마 당시에 한글 창제를 둘러 싸고 벌어졌던 여러 사실들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없었다면 1443년 12월조 말미의 훈민정음 창제 기사와 같이 한글 창제 초기의 상황에 대해 극히 소략한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한글의 대한 반대 상소문을 통해 최만리 등은 후대의 한글 연구에 있어 소중한 사료를 남겨 주었다 하겠다.

출처 : 아산병원 한덕종박사
글쓴이 : 김능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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