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辛碩祖), 직전 김문(金汶),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河緯之), 부수찬 송처검(宋處儉), 저작랑 조근(趙瑾)이 연명하여 이른바 언문 창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여기서는 실록 및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토대로 세종과 최만리 등의 주장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세종과 최만리 등이 대화하며 논쟁을 벌이는 가상적인 장면을 설정하였다. 이해의 편이를 위하여 말투도 가능한 한 현대적으로 구성하였다.
세 종: 내가 만든 훈민정음에 대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만리: 언문을 만드신 것이 지극히 신묘(神妙)합니다. 전하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발휘하시는 능력이 천고(千古)에 뛰어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간곡한 마음으로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부디 잘 판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 종: 그대들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으니 말하도록 하라.
최만리: 우리 조선은 건국 이래로 정성을 다해 사대(事大)를 하였으며 모든 일에 있어서는 중국의 제도를 따라 행하여 왔습니다. 이리하여 이제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글을 쓰고 같은 제도를 시행하는 문명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언문(諺文)을 창작하셨으니 보고 듣는 저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종: 훈민정음을 창작했다고 하는데 훈민정음은 완전히 새로 만든 글자가 아니라 모두 옛 글자에 근본을 두고 있다. 즉 글자의 형태는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지 않았느냐 최만리: 그러나 소리로써 글자를 합성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어긋나니 진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일입니다. 만약 이 언문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 이를 두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사대모화(事大慕華)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세 종: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정음을 만든 것은 사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의 제도를 가져다 쓰더라도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바꾸어 적용하지 않느냐 한자로는 우리말을 쉽게 또 정확히 적을 수 없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즉 이러한 우리의 실정을 고려하여 정음을 만든 것일 뿐이다. 나는 즉위한 이래 사대모화에 대해 조금도 소홀히 한 일이 없고 이러한 사실은 황제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혹 모함하려는 자가 정음을 만든 것을 빌미로 문제를 삼는다면 우리의 뜻이 사대모화에서 조금도 어긋난 적이 없음을 밝히고 이것이 오로지 우리나라 백성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임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최만리: 예로부터 9개 지역으로 나뉜 중국 안에서 기후나 지리가 비록 다르더라도 방언에 따라서 따로 글자를 만든 일이 없습니다. 오직 몽고, 서하(西夏), 여진, 일본, 서번(西蕃)과 같은 무리만이 제각기 자기들의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오랑캐들의 일이므로 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옛 글에도 중국(中國)의 문화로서 오랑캐의 문화를 변화시킨다 하였지 중국의 문화가 오랑캐 문화에 의해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대하여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을 간직하고 있어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중국과 견줄 만하다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향기로운 명약인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쇠똥구리가 만든 쇠똥 덩어리를 취하는 격이라 할 것입니다. 이 어찌 문명에 있어 큰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세 종: 대개 음(音)의 같음과 다름은 그 자체로 같고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같음과 다름에 기인하는 것이며, 사람의 같음과 다름은 또한 지방이 같고 다름에 기인한다. 즉 지세가 다르면 기후가 다르고, 기후가 다르면 사람들이 숨쉬는 것(발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 세상의 문자와 제도를 통일시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발음이나 말은 같아지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산하가 저절로 한 구획을 이루어 지리와 기후가 중국과 크게 다르니, 말소리가 어찌 중국어의 것과 서로 부합될 수 있겠는가 그러한즉 언어가 중국과 다른 까닭은 당연한 이치이다. 즉 예악과 문물은 우리가 중국과 같아질 수 있으나 언어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고 정음을 만드는 것이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라 하는 그대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최만리: 신라의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는 비록 거칠고 촌스러우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다가 어조사를 적는 데 이용하므로 한자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급 관리나 하인들이 이두를 익히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한문으로 된 여러 책을 읽어서 한자를 대강이라도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이두를 사용하게 됩니다. 즉 이두를 사용할지라도 반드시 한자에 의거하여야만 뜻을 통할 수 있으니 이두 때문에 한자를 공부하여 알게 되는 사람이 상당히 많고 따라서 학문을 진흥시키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예전부터 문자가 없어 끈을 묶어 의사소통을 하던 시대와 같다면 임시방편으로나마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올바른 소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임시방편으로 언문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좀 시일이 걸리더라도 중국에서 통행하는 한자를 익히도록 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낫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수천 년 동안 써오면서 문서나 계약서 등을 작성하는 데 어떠한 장애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이두를 바꾸어 따로 속되고 무익한 글자를 만든단 말씀입니까
만일 언문이 통용되면 관리가 되려는 사람들이 오로지 언문만을 익히고 한자를 배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관리가 되려는 사람이 언문으로써 벼슬자리에 오를 경우 뒷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일을 보고 ‘27자의 언문으로써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힘들여 성리학을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십 년 뒤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매우 적어질 것입니다. 비록 한글로써 능히 관공서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현(聖賢)의 문자를 알지 못하면 배우지 않고 담벼락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과 같아서 사리(事理)의 시비를 따지는 데는 어둡고 헛되이 언문(諺文)에만 공을 드릴 것이니 장차 어디에 쓸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쌓아왔던 학문[성리학]을 숭상하는 정책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까 두렵습니다.
이전부터 써 오던 이두도 비록 한자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님에도 식자층에서는 오히려 이를 속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 바꾸려고 하는 형편인데 하물며 언문은 한자와 전혀 관련이 없고 오로지 시장거리의 속된 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까 가령 언문이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문명한 정치를 이루려고 하는 때에 ‘여전히 언문을 인습적으로 그대로 사용하시겠습니까 ’ 하고 반드시 이를 바로잡겠다고 논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래된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일반적인 폐단입니다. 지금의 이 언문은 하나의 신기한 재주에 불과할 뿐입니다. 학문에 있어서는 손실만 가져오고 다스림에 있어서는 아무런 이로움도 없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아도 그 옳음을 알 수 없습니다.
세 종: 앞서 그대들이 이르기를 ‘정음은 소리를 쓰고 글자를 합성함에 있어서 모두 옛 것에 어긋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 또한 소리를 달리한 것이 아니냐 게다가 이두를 제작한 본래의 뜻도 바로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만일 이두(吏讀)가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언문(諺文)도 또한 백성들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은 설총(薛聰)이 한 일은 옳다고 하면서 군상(君上)이 한 일은 그릇되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또 언문을 제작한 것이 신기한 하나의 기예(技藝)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늙으막에 소일하기 어려워 책을 벗삼고 있을 뿐이니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만을 좋아하여 정음을 만들었겠는가 그리고 또한 이는 사냥을 하며 매를 풀어 놓은 일 등과는 다르다. 그러니 그대들의 말은 상당히 지나친 점이 있다.
최만리: 하나의 신기한 재주라고 말씀드린 것은 말을 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온 것이비 별다른 뜻이 있는 있어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세 종: 또한 내가 하급 관리들을 선발하는 데 정음을 넣도록 하였으나 전적으로 정음만을 대상으로 시험 보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대과(大科)의 경우에는 정음을 시험 과목에 편입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학문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대들의 주장은 너무 과장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다스림에 있어 아무 이로움도 없다 했는데 이 또한 옳지 않다. 가령 형을 집행하고 죄인 다스리는 문서들을 이두와 한문으로 써 왔는바 글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한 글자의 차이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만약 정음으로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적은 후 읽어 준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모두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최만리: 중국은 예전부터 말과 문자가 동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일이나 소송 사건에 있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힌 죄인 가운데 이두를 아는 사람이 직접 자신이 진술한 내용을 읽어 보고 그 내용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음을 발견하더라도 매를 견디지 못해서 승복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로 보건대 글의 뜻을 몰라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언문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즉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리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그 일을 담당한 관리가 어떠한 자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말과 글이 다르거나 다르지 않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문으로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저희들은 의심이 됩니다.
세 종: 내 일찍이 어리석은 백성들이 법률 조문을 몰라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법률 조문을 다 알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따로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서 이를 이두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면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교한 적이 있다. 그때 이조판서 허조(許稠)가 말하기를 ‘백성 중 간악한 무리들이 법률 조문을 자세히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고려하여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일들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그렇다면 백성이 알지 못하도록 내버려 두어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백성이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서 범법한 자를 벌준다면,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느냐 더욱이 선대의 임금들께서 재판시에 법률 조문을 읽게 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사람마다 모두 알게 하고자 함이 아니냐 ’ 하고 꾸짖은 적이 있다. 그대들의 말은 허조의 말과 같다 하겠다. 죄인을 공정하게 다루는가 하는 문제가 관리의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공정한 관리도 착오를 범하여 억울한 죄인을 만들 수 있다. 죄인을 다스림에 정음을 사용하면 억울한 일이 다소라도 줄어들 것이다. 죄인을 다스릴 적에 문서를 정음으로 작성하여 들려 주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라는 것은 정음이 쓰일 수 있는 한 예일 뿐이다. 가령 만약에 정음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한다면 일반 백성들이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충신·효자·열녀가 많이 나오지 않겠느냐
정창손: 비록 언문으로 번역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백성들이 알기 쉽도록 그림으로 그려 삼강행실도를 반포하였으나 그 뒤에 충신·효자·열녀가 많이 나온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이 삼강(三綱)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자질이 어떠하냐에 달린 것입니다. 반드시 언문으로 그 책을 번역, 배포한 뒤라야만 사람들이 그러한 행실을 본받는다고 어찌 보장하시겠습니까
세 종: 그대의 말은 허조의 말보다 심하구나. 이것이 어찌 이치를 아는 선비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교화나 가르침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냐 사람의 자질도 교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지 않고 자질 탓만을 하는 것이 선비된 도리로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느냐 그대야말로 참으로 쓸모없는 속된 선비에 불과하다.
최만리: 무릇 일을 이루고 공을 세움에 있어서는 빠른 시일 안에 서둘러 마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근래의 국가의 조치들은 모두 빨리 이루는 데에만 힘을 쓰고 있으니 이는 다스리는 근본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비록 언문이 부득이하여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들로부터 아래로는 하급 관리와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함께 상의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설혹 모두 옳다고 하더라도 시행하기 전후에 백성들에게 충분히 그 뜻을 거듭 설명한 다음 다시 세 번 더 생각하여 역대 제왕들의 다스림에 비추어 보아도 어긋남이 없고 중국과 상고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후세에 성인(聖人)이 다시 태어나 이를 보더라도 의심스러운 바가 없는 다음에야 비로소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사람의 뜻을 널리 묻지도 않고 하급 관리 10여 인에게 명하여 정음을 익히게 하며 또 옛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쳐서 황당한 언문을 붙여서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서 이를 새겨서 급하게 널리 유포시키려 하시니 천하와 후세의 공론이 어떠하겠습니까 게다가 이번에 청주(淸州) 초수리(椒水里)에 행차하심에 있어 올해 흉년이 든 것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간략하게 시행하도록 하셨는바 전에 비하여 10 중 8,9정도를 생략하시고 전하께 아뢰어야 할 공무(公務)도 모든 것을 대신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언문은 국가의 긴급한 일도 아니고, 부득이한 기한이 있는 일이 아님에도 어찌 행재소(行在所)에서까지 급하게 서두르시어 전하의 옥체를 조섭해야 할 시기에 번거롭게 하시는 것입니까 저희들은 더욱 그 옳은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 종: 그대들이 운서(韻書)를 아는가 사성(四聲)과 칠음(七音)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는가 우리나라의 한자음은 마땅히 중국의 음과 부합되어야 할 것이나 오랜 세월 동안 말해지는 사이에 자음과 모음이 저절로 어음에 이끌렸으니, 이것이 곧 한자음이 역시 따라서 변한 까닭이다. 비록 그 음은 변했더라도 청탁이나 사성은 예전과 같을 수 있을 것인데 일찍이 그 바른 것을 전해 주는 책이 없다. 그래서 어리석은 스승이나 일반 선비들이 반절법도 모르고 자모와 운모의 분류 방식도 모르고 혹은 글자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음으로 하고, 혹은 앞 시대에 임금의 휘자이기 때문에 피하던 것으로 인해서 다른 음을 빌려 쓰기도 하고, 혹은 두 글자를 합해서 하나로 하기도 하고, 혹은 한 음을 둘로 나누도 하며, 혹은 전혀 다른 글자를 빌려 쓰기도 하며, 혹은 점이나 획을 더하거나 덜며, 혹은 중국 본토음을 따르고 혹은 우리 나라 음을 따라서 자모와 발음, 청탁, 사성이 모두 변하였다. 만약 내가 이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는가
최만리: 예전 선비의 글에 이르기를 ‘무릇 모든 신기하고 보기 좋은 일들이 선비의 뜻을 빼앗아 간다. 편지 쓰기는 선비의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전적으로 이것만을 좋아하면 이 또한 저절로 뜻을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동궁께서는 비록 덕성을 많이 성취하셨지만 아직은 성학(聖學)에 깊이 마음을 써서 모자라는 점을 더욱 닦아야 하 것입니다. 언문이 설사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단지 선비의 육예(六藝)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치도(治道)에는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인데 동궁께서 이 일에 정신을 쏟고 마음을 기울여 날을 마치고 시간을 보내니 이는 실로 현재 시급히 닦아야 할 학문에 손해가 됩니다.
세 종: 내가 나이 들어 국가의 서무(庶務)는 세자가 맡아서 하는 까닭에 비록 작은 일이라도 세자가 마땅히 참여하여 결정하는데 하물며 정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이 이 일을 맡아서 해야겠느냐
최만리: 공적인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동궁께서 참여하여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그리 급박하지 않은 일에까지 하루 종일 마음을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 종: 정음을 만드는 일이 어찌 국가의 공적인 일이 아니란 말이냐 그대들과 더 이상 말하기 어렵다. 어찌 생각이 이리 다를 수 있단 말이냐
최만리: 저희들이 모두 보잘 것 없는 재주를 가지고 외람되게도 전하를 모시고 있으므로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감히 담고만 있을 없어 이에 삼가 가슴속에 가진 생각을 다 아뢰어 전하의 어지심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세 종: 그대들이 나를 가까이서 시종하므로 나의 뜻을 명확하게 알 것인데도 이같이 행동하니 이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으냐 또한 이전에 김문(金汶)은 말하기를 ‘언문을 제작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니다’ 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반대로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무리에 포함되어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내가 그대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눈 것은 정음에 관한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금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답하고 궁지에 몰리면 말을 교묘하게 바꾸어 응답하니 그대들에게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을 의금부에 하옥시켜라. 또 의금부에서는 김문이 전후에 태도를 바꾸어 말하게 된 사유를 조사하여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할지 결정하도록 하라.
세종은 그리고 그 다음날 이들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는데 속된 선비라는 꾸지람을 들은 정창손은 파직시키고 처음에는 정음 제정이 좋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반대를 하여 말을 바꾼 김문에게는 벌금을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창손도 얼마 후 다시 복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앞서 살펴보았듯이 최만리에 이어 부제학에 오른다. 김문의 죄는 의금부에서 조사하여 보고한 바로는 장(杖) 100대를 맞고, 소금을 굽거나 쇠를 만드는 등의 노역을 3년 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노역은 시키지 않고 장(杖) 100대도 직접 매를 맞지 않고 돈을 내어 속죄하도록 한 것이었다. 최만리는 다음날 석방되어 복직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여 살다가 다음해에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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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 등 같이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정음 제정의 반대 사유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주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국가적 이념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입장에 선 것이다. 사대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세종과 최만리 등이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최만리 등을 사대주의자로 몰아 세우는 것은 역사적 몰이해에서 빚어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은 앞서 보았듯이 『고금운회거요』를 번역하여 한글로 음을 달아 펴 내도록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급작스럽게 운서를 바꾸어 편찬하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를 아느냐 하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바로잡겠느냐고 하였다. 『고금운회거요』에 어떠한 한자음을 붙였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다음 해인 1447년에 간행된 『동국정운』의 한자음과 거의 같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최만리 등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을 바꾸어 중국 운서에 맞추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표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국정운식으로 한자음을 개신하려는 세종의 정책은 실패하였으니 최만리 등의 주장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을 놓고 최만리는 한글 창제의 협력자이며 그 상소는 한글 창제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한자음의 개정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다소의 무리가 있다. 상소문에 분명히 이두만으로 충분한데 굳이 언문을 만들어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서두에서 한글은 지극히 신묘한 것이라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금에 대한 예우의 말이고 또 이 말이 훈민정음의 정인지서에도 그대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만리 등의 말이 아니라 인용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가지는 의의는 최만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으나 사료의 부족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다수이다. 최만리 등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상소를 올림으로써 그 상소의 내용을 통해 간접적이고 부족하게나마 당시에 한글 창제를 둘러 싸고 벌어졌던 여러 사실들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없었다면 1443년 12월조 말미의 훈민정음 창제 기사와 같이 한글 창제 초기의 상황에 대해 극히 소략한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한글의 대한 반대 상소문을 통해 최만리 등은 후대의 한글 연구에 있어 소중한 사료를 남겨 주었다 하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