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산이씨 배우리의 성씨 이야기 KBS 신바람 세상 (이름사랑)

2009. 7. 10. 11:44대한민국 가문 탐구

한산이씨 배우리의 성씨 이야기 KBS 신바람 세상 (이름사랑)

 배우리의 성씨 이야기-한산이씨 KBS-2R

www.namelove.com (이름사랑)

다른 성씨의 자료 보기 (성씨 이야기)

 

********************************************************************************
우편을 통해서 질문해 온 내용.
한산이씨 집안의 이세영이라는, 충주에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 70세. 5가지 정도를 꼭 알고 싶습니다.

① 한산이씨의 한산이라는 곳에 관해서 자세히---

② 한산이씨의 묘역으로 잘 알려진 곳 ③ 훌륭한 조상. ④ 집성촌 ⑤ 인구(전국에서 몇 위)
오늘, 한산이씨에 관해서--
******************************************************************************** 

① 시조에 관해서 알고는 계신 것 같은데, 그래도 성씨의 뿌리이니 시조에 관해서 먼저 소개를 해 주셔야겠지요.
② 한산이라는 곳이 지금의 어디죠? 한산모시라는 것을 엣날 학생 때 배운 것 같은데 그 한산?
③ 묘역에 관해서 알고 싶다고 하셨는데---
④ 능자리나 묘역에 관한 일화라도 있나요?
⑤ 어떤 인물들이 이 한산이씨 집안을 빛냈는지?
⑥ 한산이씨는 전국에 얼마나? (인구)
⑦ 한산이씨 집안 사람들은 어디에 많이 사는지? (집성촌)
 
(전통지리 연구원) '이름사랑'의 배우리 원장  www.namelove.com 


070719 성씨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 신바람 세상 `한산이씨 62위


 

한산이씨(韓山李氏)


□ 시조 이윤경
시조는 고려 숙종 때 호족으로서 권지호장직(權知戶長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으로 당대의 대문장이며, 우탁 이동(易東),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 변계량(卞季良) 등의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의 아들 목은(牧隱) 색(穡)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 본관지 한산
충남 서천군 한산면(韓山面)
본래 한산군의 땅으로서 한산읍내의 북쪽이 되어 북부면이라 하여 고촌, 죽동, 신동, 종지, 호암, 산성, 외상, 외하, 동자, 유산, 내하, 산음, 교촌, 서외, 서내, 내상의 16개 동리를 관할.
일제 대인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동상면의 원산, 야인, 신곡, 여사, 사곡, 나교, 동지, 토산, 송림, 축산, 송상, 송중, 송하, 오곡, 단상, 단중, 단하, 단서, 갈마, 녹양의 20개 동리와 동하면의 상동, 하동, 하서, 온동, 신후, 화산, 용두, 신성의 8개 동리와 임천군 홍상면의 포촌리, 교항리, 고읍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한산면이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 하여 죽촌, 종지, 호암, 성외, 동산, 지현, 원산, 여사, 나교, 동지, 송림, 축동, 송산, 송곡, 단상, 단하, 마양, 연봉, 온동, 용산, 신성의 21개리로 개편 관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송림리를 떼어 마산면에 넘겨주고, 화양면의 구동리를 병합해서 현재 21개리를 관할하게 됨. 동쪽은 부여군, 양화면, 남쪽은 화양면과 금강 건너 전라북동 옥구군, 나포면, 서쪽은 기산면, 북쪽은 마산면에 닿음.
한산모시로 유명한 고장이다.


□ 가문의 번영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 대문장가 이산해(李山海) 등으로써 이름난 한산이씨는 조선시대 상신 4명, 대제학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 급제자 195 명을 배출했다.
이종선(李種善)은 명문으로서 여흥부사 등을 지내고 1417년 풍해도와 충청도의 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문성유후(門城留後)에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이맹균은 1385년 문과에 급제, 성균직학(成均直學)을 거쳐 조선개국 후 1418년 충청도관찰사가되고 이듬해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425년 진위사(陳尉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고려 말의 석학(碩學)이요, 대유(大儒)로서, 조선조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이색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 장흥 등지로 유배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간신들에의해 주중폭사(舟中暴死)하였다.
유명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 또한 한산이씨 가문을 불사이군의 충절로서 빛낸 인물이었다. 그는 1436년 문과에 급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1456년 직제학에 이르렀다.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근세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를 들 수 있다.


□ 주요 인물
■ 목은 이색
(1328~1396) 고려 말의 문신이며, 학자. 자는 영숙이고, 호는 목은. 삼은의 한 사람
찬성사 곡의 아들로 이제현의 문인이다. 1341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개혁, 국방개혁,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1373년 한산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뒤에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하여 금주로 추방되었다가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목은 선조의 시
 <부벽루>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더니
빈 성터 위엔 구름은 천추일세
인마는 떠나고 오지 아니하니
천손은 지금 어디에 노니는가?
긴 한숨 쉬고 풍등에 으지하니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누나.
■ 이홍조
(1595~166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확, 호는 수은으로 찰방 문영의 아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병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에서 의병을 모아 영남의병대장 전식과 함께 서울로 진격하다가 화의성립으로 중도에 해산하였다. 그 공으로 1638년 자여도찰방에 서용되었으며, 그 뒤 의금부도사, 회인현감을 역임하였다. 그 때 조정에서 점차 당쟁이 심해지자 벼슬에 뜻을 잃고, 몇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일월산에 은거하여 독서로 소일하였다.
■ 이개(李塏)
1456년(세조 2) 2월에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질18)의 고변에 의하여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되어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하였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정(禹鼎:夏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하여 만든 아홉 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 홍모(鴻毛: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 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현릉(顯陵: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이때 이개의 매부인 전 집현전부수찬인 허조(許#조21)도 자결하였는데, 단종복위의 모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 이병연(李秉淵)
1671(현종 12)∼1751(영조 27). 조선 후기의 시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일원(一源). 호는 사천(#사34川) 또는 백악하(白嶽下). 산보(山甫)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속(涑)이다. 병성(秉成)의 형이다.
백산(白山)이라는 곳에 살았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며, 벼슬은 음보(蔭補)로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시에 뛰어나 영조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다. 문인 김익겸(金益謙)이 그의 시초(詩抄) 한 권을 가지고 중국에 갔을 때 강남(江南)의 문사들이 “명나라 이후의 시는 이 시에 비교가 안 된다. ”라고 그의 시를 극찬하였다고 한다.
일생 동안 무려 1만300여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현재 시집에 전하는 것은 500여수 뿐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산수, 영물시로, 대개 서정이 두드러지고 깊은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매화를 소재로 55수나 되는 시를 지었는데, 이는 대개 은일적인 기분을 표현한 것으로 생(生)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은연중 표현하고 있다. 중국의 자연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의경을 흠모하였던 것 같다.
80세가 넘도록 시작 생활을 계속하였다.
■ 이산해(李山海)
 1539 ∼ 1609 (중종 34∼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여수(汝受). 호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 시호 문충(文忠).
 진사를 거쳐 1561년(명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에 올라 사가독서를 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이조좌랑을 비롯하여 형조판서에 승진하고 이어 이조판서, 대사성을 지낸다.
1578년(선조 11) 대사간에 이르러 서인(西人)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光國)공신에 책록되었고 이듬해 정철이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으로 하여금 정철(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유배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사(兩司)로부터 국정(國政)을 그르치고 왜적(倭敵)을 들어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 백의(白衣)로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에 귀양갔다가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복관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600년 영의정에 재임(再任),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6세 때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서화(書畵)에 능하여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다. 선조 때 문장 8가(文章八家)라 일컬었다.
 조정에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나 다시 북인(北人)에 속하였다가 마지막에는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었다.
 저서로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고, 글씨에 <조정암광조묘비(趙靜庵光祖墓碑>(용인)가 있다.
■ 토정 이지함
자 형백(馨伯), 형중(馨仲). 호 수산(水山), 토정(土亭). 시호 문강(文康). 토정비결(土亭�訣) 저자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박순(朴淳),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교유했으며, 당대의 일사(逸士) 조식(曺植)은 마포로 그를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찾아와 1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로 지은 책으로, 이지함과는 관계없이 그의 이름을 가탁한 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지함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도가적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도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金繼輝)의 질문에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 이철경(李喆卿)
1914∼1989. 서예가. 호 갈물.
본적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로 두고, 1914년 6월 3일 경기도 개성시에서 출생하여 1989년 6월 14일 서울에서 76세를 1기로 영면했다. 그는 교육자, 의사, 한글학자, 민족주의자인 이만규의 3녀로, 전 서울고교 교장이었던 교육자 서정권의 부인으로, 가수이자 방송인인 둘째아들 서유석 등 3남 2녀의 어머니로, 40년을 교육자로, 60년을 예술가로, 수십 년을 여성운동가로 일인 다역의 삶을 살아온 추앙 받는 모범여성이다.
그는 예술가로의 우리말조차 사용하기 어렵던 일제시기와 현대를 살면서 자신의 전공인 음악 보다 한글서예가로 남궁억(1863∼1939), 윤백영(1888∼1986) 등과 더불어 한글궁체의 서 예술화 활동을 왕성하게 해왔고, 더불어 오늘의 한글서예를 정착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철경, 각경(珏卿), 미경(美卿) 세 자매가 모두 한글서예에 침혹(沈惑)하여 뛰어난 필재(筆才)를 발휘하였는데, 각경과는 쌍둥이다.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 1938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강사, 배화, 이화, 진명,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1979년까지 금란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일찍이, 1948년 문교부 검인정교과서 검정위원과 서예교과서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갈물한글서회를 창설하였으며, 대한주부클럽연합회 회장, 여성교육자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한일여성친선협회 이사,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단 자문위원,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회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두루 역임하여 여성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8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고, 미경과 자매전을 캐나다와 미국에서 열었으며, 1991년 <갈물 이철경서 집>을 발간하였다. 이밖에도 많은 단체전에 참가하였으며, 수상으로는 1929 ∼1930년 동아일보사 주최 전국학생작품공모전 서예부문에 입상하였고, 1969년 제1회신사임당상, 197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궁체쓰는 법>, <초등글씨본>, <중등글씨본>, <한글습자 가정편지틀>, <한글서예>, <한글> 등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관동별곡〉, 〈속미인곡〉, 〈김활란박사 묘비〉, 〈신사임당동상 명문〉, 〈육영수여사 묘비〉, 〈유관순열사 기념비〉, 〈독립선언문〉, 〈고당 조만식선생 어록비〉, 〈이승만박사 어록비〉, 〈나의 소원〉(白凡 金九) 등이 있다.
갈물 이철경(李喆卿)은 본적을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로 두고, 1914년 6월 3일 경기도 개성시에서 출생하여 1989년 6월 14일 서울에서 76세를 1기로 영면했다. 그는 교육자, 의사, 한글학자,


□ 유적지
■ 수송영당
서울 종로구 수송동
향사일 양력 5월 5일, 10월 10일
■ 서산서원
경상북도 기념물 제43호
서산서원은 1771년(영조 47)에 이 지방 유림들의 공의로 이색 선생과 이홍조 선생의 학덕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묘우인 숭덕사는 맞배지붕으로 그 안에 이색 선생을 주향으로 하여 이홍조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압각수
압각수(鴨脚樹)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 중앙공원 내에 있는 은행나무 이름인데, 동구여지승람에 의하여 고려 공양광2년(1390)에 이초와 윤이가 명나라 태조에게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하여 이를 반대한 이색 등을 살해하고 이현보 등은 유배하였다고 무고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이색등 10여명이 옥에 갇히는 소위 "이초의 난"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는데 마침 큰 홍수를 만나 이색등은 이 압각수에 올라 화를 면하였다.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이는 이색 등이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석방하였다고 하는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나무이다. 압각수라는 이름은 잎의 모양이 오리류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주장과 나무뿌리가 물오리발처럼 발가락 사이가 붙어 있어 생겼다는 주장이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 약 900년, 높이 30㎝, 밑둘레 8m이다.
■ 한산이씨 묘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있는 조선시대 묘역.
1989년 12월 29일 경기도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한산이씨 종친회가 소유하고 있다. 고려 말 학자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이씨의 묘역이다.
신도시 개발지역인 분당지구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체 규모는 87, 000여 평으로 해발고도 약 70m의 영장산(靈長山)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동, 서, 북쪽에 한산이씨 묘역임을 알리는 한산이씨묘산입수비(韓山李氏墓山入首碑)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2기는 중앙공원을 조성하면서 공원으로 이전하였다.
정남쪽에는 이지함의 조부(祖父)로 봉화현감(奉化縣監)을 지낸 이장윤(李長潤)을 비롯하여 이질(李秩), 이지숙(李之菽), 이증(李增), 이확(李穫), 이집(李潗), 이정(李程) 등의 묘역이 있다.
남동쪽에는 이증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경류(李慶流), 이경류의 애마(愛馬), 이증의 손자인 이정룡(李廷龍) 등의 묘역이 있다. 남서쪽에는 이오(李奧), 이원(李垣), 이한(李漢), 이병건(李秉健) 등의 묘역이 있다.
남서쪽 중앙공원 입구 쪽에는 1722년(경종 2)에 이장윤, 이질, 이지숙의 유사(遺事)를 기록하여 건립한 한산이씨삼세이하유사비(韓山李氏三世以下遺事碑)가 있다.
비문(碑文)은 후손 이병연이 지었고 크기는 높이 198cm, 너비 80cm이다. 그밖에 이증의 신도비(1695), 이정룡의 신도비(1728), 이경류의 정각비(旌閣碑:1727)가 있다.
한산이씨의 세장지(世葬地:대대로 묘를 쓰고 있는 땅)이자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준 땅)로서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오랫동안 조성되어왔기 때문에 묘제(墓制) 및 석물(石物) 양식 연구에 중요하다.
■ 월하능
고양시 성사동에서 도내동쪽으로 이어진 69번 군도로를 따라 강고개를 지나면 군부대가 하나 있고, 그 군부대 우측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300m 정도 들어가면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의 자연촌락명칭이 월하능이다.
월하능 지명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 현종 때 선대왕인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능을 구하던 조정의 지관이 이 곳을 지나다가 국왕의 능자리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날이 저물어 결정하지 못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자, 주위의 지형을 다시 살펴보니 간밤의 지형과는 달리 골짜기가 좁아 왕능으론 좋은 명당자리가 되지는 못했다 한다. 그 후 이 곳을 달밤에 본 능자리라 하여 월하능이라 하며 지금은 약 6호 정도의 집이 있다.
지관이 본 월하능 지점에는 현재 광목공의 묘소가 있다. 광목공은 목은의 3형제 중 둘째인 인제공의 장남이다. 이 묘소는 현재 군부대 바로 앞에 있는데, 조선시대에 건립된 묘표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광목공의 이름은 이숙야이며 목은 이색의 손자이다. /// (방송 대담 배우리)

[출처] 이름사랑 배우리 원장의 성씨 이야기- 한산이씨|작성자 이름사랑

한산이씨 묘역. 네이버 이미지 자료

 

 

출처 : 이름사랑
글쓴이 : 이름사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