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창녕조씨 본관(1985년도)

2009. 7. 9. 16:59대한민국 가문 탐구

조(曺)씨
가흥 강릉 광주 남평 능성 수성 안동 영광 영암 인천 장흥 진주 창녕 창산 창원 청도 청양 평창 함평 화순
총 20개의 본관과 304,810명이 있다.(1985년)

가흥조씨(嘉興曺氏)

시조 조천령(曺千齡)은 조국주(曹國柱)의 아들로 중종때 문과에 올라 부사(府使)를 지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0명이 있었다.

남평조씨(南平曺氏)

시조 조신의(曺臣義)는 모평감무(牟平監務)를 역임했다고 전해오나 문헌이 없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후손들이 창녕(昌寧)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남평으로 하고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41명이 있었다.

능성조씨(綾城曺氏)

시조 조사조(曺思朝)는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전해온다.
전해오는 문헌이 없어 후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창녕조씨에서 분관하였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74명이 있었다.

수성조씨(壽城曺氏)

시조 조윤성(曺允誠)은 조선 세종때 문과에 급제, 승문박사(承文博士)를 지냈다.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으며 창녕조씨에서 분관하였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3명이 있었다.

안동조씨(安東曺氏)

시조 조석재(曺碩材)는 조선 정조때 호장을 지냈다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전해온다. 본관의 유래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85명이 있었다.

영암조씨(靈岩曺氏)

시조 조상현(曺尙賢)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 중종조에 문과에 올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그밖의 내용은 문헌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32명이 있었다.

장흥조씨(長興曺氏)

시조 조정통(曺精通)은 창녕조씨의 후손으로 고려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고 한다. 그밖의 유래 등은 문헌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15명이 있었다.

창녕조씨(曺氏)

본관인 창녕은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 또는 비사벌인 데
555년 하주라 칭하고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는 화왕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태조 때 창녕으로 고치고 1018년 밀성군(밀양)에 귀속되었다가 1895년 창녕군이 되었다.
창녕조씨의 시조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 전하는 조계룡(曺繼龍)이다.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가 준수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 학사가 이상이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계룡은 자라서 진평왕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창녕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문헌의 실전으로 계룡의 후손 겸(謙)을 1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겸은 신라 말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낸 흠(欽)의 아들로 고려 태조의 딸 덕공 공주와 혼인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지냈다. [창녕조씨 가첩]에 의하면 겸이 손자인 연우(延祐)로부터 10세손 자기(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 평장사를 배출하여 가문의 번성을 누린 것으로 전한다.
고려 말에 와서 크게 이름을 떨친 민수(敏修)는 공민왕 때 순주부사로 여러 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치고 이등공신에 올라 우왕초 경상도 도순문사로 왜구를 물리쳐 문하평리에 이어 문하시중을 역임하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388년 요동정벌군의 좌군도통사로 출정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하여 창왕을 세우는데 공을 세워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이 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관찰사를 지낸 항(沆)의 아들 석문(錫文)이 유명하였는데, 이조, 형조, 예조의 정랑을 지냈고,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삼등공신으로 도승지에 올라 창녕군에 봉해졌다. 1467년 "이시애의 난" 때는 병마부총사로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적개일등공신이 되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1476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호조참판 위(偉)는 현감 계문(繼門)의 아들로 김종직에게 글을 배우고 사가독서를 한 뒤 성종대에서 성리학의 대가로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석학 식(植)은 편교 언형(彦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대 유학계 대학자로 추앙되었으며, 뛰어난 학행으로 여러번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진력하여 문하에서
김효원, 김우옹, 정인홍 등 저명한 학자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한편 중종 때 무신으로 이름난 윤손(潤孫)은 대사헌 숙기(淑沂)의 아들이다. 수차에 걸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워 한성부판윤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좌찬성에 올랐다.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계상(繼商)과 계은(繼殷) 형제는 영흥판관을 지낸 구서(九敍)의 아들로, 계상은 공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지냈고, 계은은 목사를 거쳐 종부사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계상의 아들 광원(光遠)은 명종때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을 지냈으며, 그의 증손 문수(文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시문과 서예에 능하여 명필로 손꼽혔다.
그밖의 인물로는 영조때 이조정랑, 이조판서 등을 지낸 후 예문관 제학에 오른 명교(命敎)가
글씨에 뛰어나 [능가사사적비]를 비롯한 많은 비문을 남겼으며, 윤형(允亨)도 초서와 예서에 능했으며 특히 그림은 풀, 돌, 대나무를 잘 그려 많은 작품을 남겼다. 중종 때에는 청백리에 녹선된 치우와 그의 증손 광익(光益), 호익(好益)이 이름났다.
호익은 임진왜란 때 소모관(召募官)으로 군민을 규합하여 중화, 상원 등지에 전공을 세워 녹비를 하사 받았고, 정유재란 때는 안주, 성천, 정주 등지의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근대에 와서는 만식(晩植)이 민족독립운동가로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며,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여 명망높은 창녕조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녕조씨는 남한에 총 72,203가구, 299,6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충남 보령군 주포면 봉당리, 경북 경산군 용성면 대종동
전남 나주군 동강면 월량리, 경북 달성군 구지면 수리동
전남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 경북 고령군 다산면 송곡동
경남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동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청도조씨(淸道曺氏)

시조 조중도(曺仲道)는 사직(司直)을 지냈다고만 전해질뿐 시기 등은 알 수 없다.
창녕조씨에서 분관하였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5명이 있었다.
출처 : 다정한 .원앙이
글쓴이 : 사무국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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